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93
093화
식사를 마친 일행이 집을 나섰다.
“다녀올게요.”
마지막으로 밖으로 나온 아스켈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묘한 눈빛. 이안이 턱을 까딱였다.
“왜.”
“…아닙니다. 가시죠.”
아스켈이 몸을 돌렸다.
‘내가 어쩌려는 건지 궁금한 거군.’
이안은 간만의 포만감을 느끼며 그의 뒤를 따랐다.
투박하지만 나쁘지 않은 식사였다.
더불어, 딱히 궁금하지 않던 마을의 상황도 제법 자세히 알게 됐다.
흔한 얘기였다. 고향을 떠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대립.
다만 여긴 후자 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할 뿐이었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었다.
이 세계만 그런 건 아니지만, 인간들의 판단 기준은 보통 합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호오.”
광장을 지나던 샬롯이, 문득 마을 입구 쪽을 돌아보았다.
십여 명의 남자들이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건장한 성인부터, 아스켈 또래의 소년들까지 섞여 있었다.
“수색대가 돌아왔군요. 수색은 허탕인 모양입니다. 사냥만 했네요.”
“누가 대전사지?”
샬롯이 물었다. 아스켈이 가장 덩치가 큰, 곰 가죽으로 만든 망토를 걸친 남자를 가리켰다.
“발레리입니다. 대전사 중에서 가장 젊죠. 강하기도 하고요. 카르하의 총애를 받는다고들 하더군요.”
이안이 보기에도 힘깨나 쓸 것 같은 놈이었다.
발레리를 비롯한 몇몇이 일행 쪽을 바라본 건 그때였다.
그들이 사냥해 온 짐승들을 받으러 온 마을 주민 몇몇이 그들에게 뭔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경계심과 비웃음이 뒤섞인 눈빛들.
“가서 말을 좀 해 볼까요.”
아스켈이 물었다.
이안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발레리의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 숙소로나 안내해.”
“…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이안을 돌아본 아스켈이, 이내 다시 걸음을 옮겼다.
***
“오만한 눈빛을 가진 놈이더군.”
샬롯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이안이 피식했다.
“네 예전 눈빛과 비슷한 것 같은데.”
“그럴지도. 하긴, 패배를 경험한 적 없는 자가 가질 법한 눈이다.”
“언젠간 알게 될 겁니다.”
빈집의 문을 열면서 아스켈이 말했다.
“이왕이면 제 손으로 느끼게 해 주고 싶지만요. 들어오시죠.”
“네가? 몇 년은 걸리겠군.”
집으로 들어서며 샬롯이 말했다.
이안의 말대로 미리 난로를 켜 둔 실내는 따듯했다. 딱딱해 보이는 침대. 방 중앙에 놓인 둥글고 커다란 통은, 이안이 쓸 욕조였다.
“몇 년… 그보다는 빨랐으면 좋겠는데요. 마을이 겨울을 몇 번이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
“글쎄. 두 번도 버티기 힘들 거다.”
단죄의 검을 비롯한 무기들부터 벗어내기 시작하면서, 이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아스켈의 미간이 좁아졌다.
“겨우 두 번이요? 우리 마을의 전사들이 그렇게까지 약하지는 않습니다, 이안 님.”
“강하고 약한 건 상대적인 거다.”
흉갑의 연결 고리들을 풀면서 이안이 덧붙였다.
“살고 싶다면 너라도 마을을 떠나는 게 좋아. 너희 영감님은 네가 떠난다고 하면 오히려 좋아할 것 같은데.”
이안은 저녁 식사를 떠올렸다.
과거 마족과의 전쟁에서 눈을 잃었다던 노인은, 일행의 다음 목적지를 넌지시 물었었다.
그리고 트라벨가라고 대답했을 때 이어진 잠깐의 망설임을, 이안은 놓치지 않았다.
“저 혼자 떠날 수는 없죠.”
“뭐, 알아서 해라. 목욕부터 할 거니까, 준비해.”
“…아, 네.”
아스켈이 재빨리 움직였다.
눈을 가득 담은 커다란 냄비를 난로 위에 올린 그가 밖으로 나가, 어디서 또 눈을 퍼 왔다.
퍼온 눈은 욕조로 들어갔다.
‘뭘 어떻게 할 건가 했는데. 이런 식이군.’
생각하며, 이안은 샬롯과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난 목욕부터 할 거다.”
“…그래서, 보지 말란 얘긴가?”
“그건 알아서들 하고. 너희도 씻을 건지 물은 거다.”
“…?! 진심으로 물은 거냐?”
“어머. 음흉하네, 이안.”
샬롯과 테사이아의 반응에 오히려 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뭐라는 거야, 이것들이.
“같이 들어가잔 얘긴 아니었다만.”
“…그렇군. 오해했다.”
“난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
배시시 미소 짓는 테사이아를 무시한 채, 이안은 안에 받쳐 입은 방한복을 제외한 모든 장비를 벗어 던졌다.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그사이, 욕조에 끓는 물을 한 번 부은 아스켈이 다시 한번 냄비에 눈을 퍼 와 난로 위에 얹었다.
“한 번만 더 부으면 될 겁니다.”
“난 오래 들어가 있을 거니까, 멈추라고 할 때까지 계속 준비해.”
“…목욕을 정말 좋아하시는군요. 알겠습니다.”
이안이 욕조를 응시하는 사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샬롯이 입을 열었다.
“북부의 전사들은 수인 전사들과는 추구한 바가 다른 것 같더군.”
“저들도 너처럼 싸우다 죽길 바랄 것 같았나?”
“비슷한 부류라 생각했다. 하지만 저들의 투쟁은 생존과 자유를 위한 수단이더군. 목숨 건 전투 그 자체가 아니라.”
눈을 한 삽 더 떠와 욕조에 부은 아스켈이 입을 열었다.
“죽기 위해 싸우거나 싸우기 위해 싸우는 자들을, 북부에선 광전사라 부릅니다.”
“…….”
샬롯의 표정이 묘해졌다.
테사이아가 씩 미소 지었다.
“그럼 넌 확실히 광전사네, 야옹아.”
“…추구하는 가치가 다를 뿐이다. 멍청한 귀쟁아.”
냄비의 끓는 물을 욕조에 부으면서, 아스켈이 읊조렸다.
“여기서 계속 버틴다면, 마을의 전사들도 사실상 광전사나 다름없어지겠죠. 언젠가는 끝이 올 걸, 다들 모르진 않을 테니까요.”
“혹시 모르지.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카르하에 버금가는 초인이 탄생할지도.”
이안의 말에, 아스켈이 그럴 리 없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냄비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옷을 벗은 이안이 욕조에 들어갔다. 딱 좋은 온기. 손으로 몸을 몇 번 문지르자 땟국물이 거뭇하게 번졌다.
‘비누만 있었어도….’
내심 탄식하던 그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침대에 엎드려 양팔로 턱을 괸 테사이아가 실실 미소 짓고 있었다.
샬롯은 아예 옆으로 돌아앉은 채였다.
“목덜미가 아주 탐스럽네, 이안.”
왜 저렇게 보나 했더니.
“원래 먹지 못하는 사과가 더 붉어 보이는 법이지.”
“재미있는 격언이네. 딱 너 같아.”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란 말도 있지. 눈 돌려라.”
돌아온 아스켈이 새로운 솥을 난로 위에 얹었다.
몸을 적당히 문지른 이안이 욕조 옆에 머리를 기댔다.
뼈 사이에 고여 있던 한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이안의 잘 잡힌 근육과 그 위에 새겨진 크고 작은 흉터들을 눈에 담던 아스켈이, 문득 내뱉었다.
“전 지금도 이해가 안 됩니다.”
“뭐가.”
이안이 눈도 뜨지 않은 채 물었다.
“그 하얀 악마요. 왜 굳이, 전사가 이렇게나 많은 마을을 목표로 삼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야 할 이유가 있겠지.”
“짐작 가는 게 있으십니까?”
“글쎄….”
이안은 게임을 떠올렸다.
게임에서 이게 야만 전사의 전용 퀘스트가 된 이유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변이된 하피 여왕은 강력한 장거리 공격이 가능하거나, 놈에게 은밀하게 접근할 수만 있으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네임드였다.
야만 전사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부분들이었다.
물론 변이된 하피 여왕은 반드시 잡을 필요는 없는 놈이었다.
게임의 난이도를 높이기 위해, 상성 상 좋지 않은 전투를 유도한 것이리라.
현실이 된 지금은, 적당한 다른 이유가 생겼겠지만.
“…하긴. 놈의 의도는 중요한 게 아니죠.”
혼자 결론 내린 아스켈이 읊조렸다. 대꾸도 하지 않고 목욕을 만끽하는 이안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이윽고 덧붙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이라도 발레리에게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 결정이 마음에 들진 않더라도, 놈을 퇴치하는 게 우선이라는 걸 모르진 않을 겁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하지만….”
“전사들은 도움이 안 돼.”
이어진 말에, 순간 굳어졌던 아스켈이 눈을 끔뻑였다.
“이안 님은 저희 마을의 전사들을 얕보시는군요.”
“약해서가 아니야. 전사들이 튀어 나가면, 놈이 또 도망칠 거란 얘기지. 전사들은 하던 대로 목책 뒤에 있어 주는 게, 오히려 우리 일에는 도움이 될 거다.”
“그럼, 정말 세 분이서 해결하신다고요?”
“정확히는 둘이다. 이번 일은, 나랑 샬롯이면 충분해.”
아스켈이 다시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안이 만들어 낸 광경을 봤지만, 동시에 그 하얀 괴물이 얼마나 끔찍한지도 잘 알았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이안이 슬쩍 눈을 떴다. 그가 옆의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저 녀석은 마력을 아주 잘 감지하지. 하피가 숨은 위치를 알려 줄 거다. 저 녀석의 역할은 그걸로 끝이지. 그리고….”
이안의 시선이 샬롯에게로 향했다.
“샬롯이 한쪽에서 언데드들과 싸울 거다. 정확히는 시간만 끌 거야. 혼자인 데다 강해 보이지 않으니, 하피는 도망치지 않고 부하들을 이용해서 저 녀석을 사냥하려 할 거다. 그리고 그사이에.”
아스켈을 바라본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조용히 놈에게 다가가서, 날개부터 찢어 놓을 거다. 그 뒤엔, 목을 벨 거고.”
“…….”
아주 단순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스켈이 볼 때는 말이 되지 않는 부분이 더 많았다.
샬롯 혼자 수십의 언데드와 대적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이안도 홀로 그 거대한 괴물을 상대해야 하니까.
그게 말처럼 간단했다면, 마을의 전사들이 이렇게 고전하진 않았으리라.
하지만 이안의 말투와 표정은 태연했고, 심지어 샬롯과 테사이아도 마찬가지였다.
“넌 목책 너머에서 다른 전사들과 함께 구경이나 해. 네가 마을을 위한 옳은 선택을 했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될 테니까. 그리고 지금은….”
그런 아스켈을 바라보며 말한 이안이, 슬쩍 턱짓했다.
“뜨거운 물이나 한 번 더 부어라.”
“…아, 네.”
***
밤.
“…….”
목책 너머를 응시하는 전사들의 눈빛이 침침하게 일렁였다.
목책 너머, 숲의 경계선을 따라 늘어선 수십의 언데드들이 그들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밤 이어지는 긴장은, 강인한 북부의 전사들조차 지치게 했다.
이런 끔찍한 밤이 영원히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그전에 저것들이 끝내 마을을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에 잠을 설치는 이들이 늘고 있었다.
“…….”
마을의 대전사인 발레리도 마을 전체에 점점 동요가 번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덤덤한 얼굴과 달리, 그는 내일 수색할 지역의 지리를 쉼 없이 되새기는 중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그 하얀 악마의 둥지를 찾아, 이 불안을 잠재워야 했다. 끝내 이주하거나, 대전사의 지위를 내려놓고 싶지 않다면.
그래서였다.
“……!”
곁에 다가선 아스켈의 존재를 평소보다 늦게 깨달은 것은.
“잘 시간일 텐데.”
아스켈을 돌아본 발레리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죽은 전 대전사의 아들인 그는, 발레리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뛰어난 전사의 피를 물려받았으면서도, 전통을 버리려 하는 겁쟁이.
하지만 동시에 내칠 수는 없는 존재였다. 이 녀석 덕분에 자신의 존재가 더 두드러지니까.
아스켈이 덤덤하게 말했다.
“잠이 안 와서.”
“그 외지인들은 뭐지? 다들 네가 마족을 데려왔다고 수군대던데.”
“수인이야. 마족이 아니라. 그리고, 마물 사냥꾼들이지.”
“뭐라고…?”
발레리의 인상이 구겨졌다.
“마을의 일에, 정말 외지인을 끌어들였단 말이냐?”
“그래.”
담담한 대답에 발레리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고작 셋이 뭘 할 수 있겠냐는 생각이 이어졌다.
오늘 밤이 지나면, 아스켈은 겁쟁이 앞에 비겁자라는 수식어까지 더해질지도 몰랐다.
아스켈이 덧붙인 건 그때였다.
“끼어들지 말라더라.”
“……?”
“마을의 전사들은 한 명도 나오지 말래. 우리가 나가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거라고.”
“…정말 그렇게 말했다고?”
“그래.”
믿는 구석이 있기라도 한 건가.
발레리의 미간이 좁아질 찰나.
“어…?! 저기…!”
측면의 목책에서 탄성이 터졌다.
동시에 숲의 경계에 서 있던 언데드들의 고개가 일제히 옆으로 돌아갔다.
서로를 돌아본 발레리와 아스켈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돌렸다.
빠각! 콰직!
“……!”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홀로 언데드들과 싸우고 있는 수인의 모습이었다.
거대한 전투 도끼를 들고, 언데드들을 박살 내고 있었다.
“…….”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발레리의 눈매가, 이윽고 가늘어졌다.
용맹하긴 했지만 기대만큼 강하지는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언데드들이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죽으려고 작정했군.”
“저 도끼는 탐나는데. 저 마족이 죽으면, 누가 가질지 내기하자.”
어느새 주위로 모여든 전사들이 수군댔다. 모든 언데드들이 몰려가고 있어서, 다른 목책은 지킬 필요가 없었다.
빡-! 빠각!
용맹하게 저항하고 있긴 하지만, 수인은 점점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언데드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포위당하기 전에 간신히 한쪽을 뚫은 그녀가, 언데드들에게 쫓기기 시작했다.
완전히 궁지에 몰린 듯한 모습이었다.
“마족이란 거, 생각보다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우리가 들은 얘기가 과장된 걸지도 모르겠어.”
전사들이 하나둘씩 비웃었다.
외부인인 그녀를 도와주려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마을의 일에 멋대로 끼어들었으니, 그 책임을 지는 것도 본인의 몫이었다.
“…….”
수인을 지켜보던 발레리의 시선이, 문득 아스켈에게로 돌아갔다.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였다.
초조한 것이리라.
발레리는 지금이 바로, 저 마족을 구하러 가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그럼 아스켈의 결정은 더 어리석어 보일 것이고 자신의 관대함은 더 도드라지리라.
“…안 되겠군.”
결정을 내린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연 그때였다.
“키- 에에엑-!”
숲 저 너머에서, 생전 처음 듣는 비명이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듣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얼어붙는 듯한 소리.
낄낄대던 전사들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
“……?!”
다들 목소리가 들려 온 방향을 말없이 돌아보는 가운데.
콰지직-! 콰득-!
목책 저 아래에서 들려 오는 소리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저런…?”
“미쳤군….”
수인 쪽을 돌아본 전사 몇몇이 탄식을 흘렸다.
궁지에 몰려 도망 다니던 수인이, 오히려 놈들의 한복판으로 파고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살 행위처럼 보였지만.
콰지지직-! 빠각-!
언데드들은 그저 일방적으로 박살나고 터져 나갈 뿐이었다.
수인의 공세를 뚫긴 커녕, 더는 그녀의 근처로 다가가지도 못했다.
마치 비명이 울려 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극적인 변화였다.
“기다렸다고…?”
발레리의 미간이 천천히 구겨졌다.
정말 저 많은 언데드를 단신으로 상대하면서, 전력을 감추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발레리가 저도 모르게 아스켈을 내려다본 그때.
“키엑-! 키에에에엑-!”
저 멀리에서 또다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번엔 비명이 전부가 아니었다.
푸확-!
어두컴컴한 숲을 뚫고, 새하얗고 거대한 마물이 솟구쳐 오른 것이다.
너덜너덜한 날개를 마구 홰치며 솟구치던 놈이, 이윽고 힘에 부친 듯 날갯짓을 멈췄다.
“……!”
솟구치던 괴물이 허공에 잠시 부유하듯 멈췄다. 놈의 등에 올라탄 새카만 형체가 비로소 또렷해졌다.
흑발의 외지인이었다.
머리 위로 검을 치켜든.
밤하늘을 등진 검날이 달빛을 반사해 일렁였고.
콰직-!
다음 순간 번뜩이는 궤적을 그리며 괴물의 목덜미로 떨어졌다.
“키에에에엑-!”
정신을 뒤흔드는 비명을 밤하늘에 흩뿌리며, 괴물이 다시 숲의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