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Genius Demon Hunter RAW novel - Chapter 353
353화
긴 전쟁의 끝
“……그게 무슨 말이지?”
원이 의아함을 드러냈다.
의문을 가진 건 토즈스도 마찬가지였다.
가온의 출신 성분을 모르는 그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실제로 도시에선 가온의 과거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가온은 마수사냥꾼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이후였으니 말이다.
“말 그대로입니다. 마리얌 여신은 바흘-라를 상대하기 위해 몇 가지 준비를 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저라는 겁니다.”
하지만 가온은 자신이 지구에서 신작 게임을 시작했다가 이곳으로 왔다는 사실을 구구절절 말하지 않았다.
그저 마리얌의 선택을 받았다고만 했을 뿐이었다.
부족한 부분이 많았고 속 시원히 해결되지 않는 구석도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은 되었다.
“확실히……10년 만에 8레벨의 초월자가 됐다는 건 가장 큰 의문이었지.”
원은 가온은 지그시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온이 짧은 시간 만에 초월자가 된 걸 여신의 은총쯤으로 이해한 것이다.
“쉬운 싸움이 아닐 텐데……괜찮겠나?”
원이 조심스레 가온에게 물었다.
드래곤이 나서 차원의 틈을 막았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바흘-라의 손짓 한 번에 날개가 꺾이고 목이 잘려 스러지던 동족의 모습이 훤했다.
원 또한 그때 치명상을 입고 부득불 길고 긴 수면기를 가져야 하지 않았던가.
물론 원만이 유일하게 차원의 틈을 빠져나왔던 건 비단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오랜 봉인 탓에 바흘-라의 힘이 예전만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결코 무시할 수 없어.”
상대는 신이다.
원은 가온에게 계속해서 그 말의 의미를 상기시키고 있었다.
이에 가온이 미소를 베물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싸움이었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의 여정은 이 한 순간만을 위해 달려온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온은.
이 싸움이 무엇을 위한 투쟁인지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이제 그 목적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마지막 결승점만 넘으면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어머니…….’
오랜 시간, 수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조금도 흐릿해진 적 없는 그리운 존재.
가온은 병상에 누워 계신 어머니를 그리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마리얌 여신이 준비한 변수가 바로 전데 제가 그 싸움에서 물러날 수는 없지요.”
“……진심이군.”
원은 가온의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섞이지 않았음을 깨닫곤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두렵지 않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퉁퉁.
가온은 자신의 가슴께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곳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있을 겁니다. 끈질긴 생명력 하나는 알아주는 편이니 버티는 것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가온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더 가벼웠다.
남는 자들을 위한 그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해서 가온의 마음이 무엇인지 모를까.
“나는…….”
원이 운을 떼놓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이에 가온이 말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압니다. 하지만 원은 여기에 남아있어야 합니다.”
“…….”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원이 있어야 할 곳은 저 위가 아니라, 부화장입니다.”
원의 표정이 복잡미묘하게 변했다.
이에 가온은 더 짙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설득했다.
“다른 드래곤들이 차원의 틈에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바흘-라를 막아설 수 있었던 건, 종족의 미래를 당신에게 맡겼기 때문일 겁니다.”
“…….”
“그들이 남긴 알을 모두 모아 부화장을 만들었다고 했지 않습니까. 새롭게 태어날 그들을 위해서라도 당신은 반드시 이곳에 남아있어야 합니다.”
원에게선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지만 가온은 알았다.
자신의 설득이 통했다는 것을.
“처음 드래곤이 헌신적으로 차원의 틈을 막아주지 않았다면, 이 싸움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우웅.
가온은 투기를 이용해 자신의 몸을 가볍게 띄워올렸다.
“그러니 이 다음은 제 몫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덩달아 위로 젖혀지기 시작했다.
“밑에서 빌어나 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가온은 고도를 높였다.
거창한 인사도 절절한 작별도 없었다.
다소 가벼운 끝인사.
그게 끝이었다.
이별을 앞두고 분위기가 더 무거워지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결코 예상할 수 없었다.
그 인사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를 말이다.
* * *
“와주셔서 감사해요.”
“마리얌…….”
가온은 마리얌의 전성이 아닌 육성을 들으며 새삼 소회를 느꼈다.
“그때 들었던 목소리와 다르지 않군.”
처음 이 세상으로 끌려와 뭣도 모르고 들렸던 신전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 말이다.
마리얌은 가온이 어떤 순간을 떠올리는지 알아차린 듯 얼굴을 붉혔다.
“가온 님은 정말 많이 달라지셨어요. 그때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이요.”
“뭐……나도 여기까지 다다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바라던 것 이상으로 정말 잘 해주셨어요. 너무 감사할 따름이에요.”
“목적 없는 헌신은 아니니까 너무 그렇게 볼 필요는 없어.”
“아! 당연하죠! 약속은 반드시 지켜질 거예요.”
마리얌은 가온과 했던 약속을 아직 잊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더 상기시켜주었다.
“흠흠.”
이에 가온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주제를 바꿨다.
“바흘-라를 상대로 내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진 모르겠어. 하지만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도울게.”
“그래요.”
마리얌은 가온을 향해 싱긋, 웃었다.
“든든하네요.”
“뭐가?”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게 이렇게 안정감을 줄 수 있는지 몰랐거든요.”
“……글쎄. 내가 그리 도움이 되는 입장은 아닐 텐데.”
“충분히 도움되고 있는 걸요.”
마리얌은 두 손을 모으며 미소를 지었다.
가온은 마리얌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지직, 직!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금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바흘-라의 봉인이 깨지는 소리였다.
데칸은 케츨러와 사사미르를 제물로 바치고 자신 또한 희생해 봉인진의 위력을 높였지만, 그렇다고 바로 바흘-라의 봉인이 풀리는 건 아니었다.
약해질대로 약해진 봉인이었지만, 바흘-라가 그것을 뚫고 나오는 데에는 꽤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고 말이다.
그오오오오───
무형의 존재감이 깨진 봉인 너머로 흘러나온다.
그것만으로도 가온은 꽤 짙은 압력을 느껴야만 했다.
화륵!
가온은 투기로 몸을 감싸 밀려드는 영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했다.
콰직! 콰지지직!
봉인이 강제로 열리고 그 안으로부터 마기가 폭발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한다.
‘나온다!’
“마리얌…….”
거인족이라고 하기엔 작고, 2미터가 넘는 가온보다는 큰 키.
머리 위로 삐죽 솟은 두 개의 뿔.
새빨간 눈동자.
바지만 입은 채 고스란히 상반신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지만, 직접 볼 수는 없었다.
새까만 칠흑의 체모가 온몸을 가득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만히 서서 마리얌을 주시했다.
그리고는 한참이 지나 입을 열었다.
“데칸과 말렉, 그리고 나머지 군단장들과의 연결이 느껴지지 않는군.”
봉인된 상태에서 외부의 상황을 인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지속적으로 약해지는 봉인은 충직한 수하들의 노력이 분명했다.
그런데 웬걸, 봉인을 깨고 나오니 그들을 느낄 수가 없었다.
“네 짓이군.”
바흘-라는 마리얌을 향해 옅은 분노를 표했다.
다른 군단장은 몰라도 데칸과 말렉을 잃은 건 그에게도 큰 피해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충직하고 능력 있는 추종자를 만드는 건 시간과 노력, 거기에 꽤 많은 운까지 따라주어야 가능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긴 말은 필요없지.”
바흘-라는 곧바로 마기를 일으켰다.
“……!!”
가온은 그 마기의 흐름에 눈을 부릅떴다.
그 힘의 여파만으로도 몸을 가누기가 힘들 정도였기 때문이다.
‘꽤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가온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리곤 카크랑을 상대할 때처럼 투기를 몸에 휘둘렀다.
처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완성도.
그러는 사이, 바흘-라와 마리얌은 벌써 전투를 시작한 상태였다.
바흘-라의 마기와 마리얌의 신성력이 맞부딪히며 엄청난 압력이 터져나왔다.
가온은 투기를 덧대 날아가지 않도록 애써야 했다.
봉인이 있던 차원의 경계는 모든 것이 흐릿한 곳이었다.
공기도, 땅도 가온이 알고 있는 것과 비슷한 조건을 가진 건 단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때문에 가온은 이곳의 환경에 적응하는 것부터가 난관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가온은 적응보다 먼저 바흘-라를 향해 공격했다.
가온은 몸을 움직여 바흘-라를 향했다.
“귀찮게 하지 마라.”
바흘-라는 가온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흘긋, 눈길을 잠시 돌리는 정도.
그게 다였다.
하지만 가온은 그런 바흘-라의 가벼운 몸짓에서 파생된 힘을 받아내는 것만으로도 사력을 다해야 했다.
팟!
휘둘렀던 투기는 단숨에 닳아 사라지고, 순도 높은 마기는 곧장 가온의 몸을 두드렸다.
퍼벅! 퍼버버벅!
“큽!”
가온은 데칸에게서 회수한 틸리티 덕분에 한층 더 두꺼워진 갑옷에 생명력을 잔뜩 불어넣으며 그 공격을 버텨냈다.
“너…….”
그러자 바흘-라는 살짝 놀란 눈으로 가온을 주시했다.
가온이 착용한 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본 것이다.
“틸리티를 정화해 사용하고 있는 모양이군.”
바흘-라는 가온이 가진 틸리티가 어떤 상태인지 파악했다.
차르륵!
그는 검 하나를 뽑아들었다.
타락시킨 틸리티를 이용해 만든 검이었다.
“그래, 틸리티의 방어력은 그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지.”
휘릭!
가벼운 휘두름.
손에 쥐고 있던 검이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없다.
퍽!!!
“크악!”
가온은 그 검의 존재를 인지하기도 전에 고통과 함께 뒤로 나뒹굴어야 했다.
몇 바퀴를 구르고 나서야 놓친 검이 배를 꿰뚫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틸리티의 방어력은 틸리티의 공격력 앞에 무용한 법.”
바흘-라는 무한한 틸리티의 방어력을 동일한 틸리티를 이용해 뚫어낸 것이다.
“어쩌지 마리얌? 네가 데려온 녀석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데.”
바흘-라는 씨익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의 도발에도 마리얌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런가요? 어쩌죠?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음?”
바흘-라는 마리얌의 여유로운 태도에 흠칫, 가온에게 고개를 돌렸다.
빈사상태, 혹은 즉사를 면하지 못했을 거라 판단했던 가온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복부를 꿰뚫었던 상처뿐만 아니라, 던졌던 검까지 보이지 않았다.
카앙!
바흘-라는 공격해오는 가온을 향해 다시 틸리티로 만든 검을 맞댔다.
울컥!
그 순간 가온의 몸에서 쏟아지는 기운.
“생명력?”
바흘-라가 의아함을 느낀 순간, 모든 일은 이미 끝나 있었다.
가온이 쏟아낸 생명력이 바흘-라의 틸리티를 집어삼키더니 단숨에 타락을 정화시켜버린 것이다.
“……뭐?!”
정화된 틸리티는 원래부터 가온의 것이었던 것처럼 그에게 흘러들어 갑옷을 더 두껍고 탄탄하게 만들었다.
“……감히!”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바흘-라가 분노하며 공격을 시도했다.
“그렇겐 안 됩니다.”
하지만 마리얌이 그걸 가만히 보아 넘길리 만무했다.
그녀의 신성력이 둘 사이를 파고들어 바흘-라의 공격을 막아냈다.
가온은 마리얌의 지원에 힘입어 더 많은 생명력을 쏟아냈다.
툭, 투둑!
덕분에 바흘-라가 가진 많은 틸리티들이 정화되어 그의 몸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노오오옴!!”
바흘-라는 잔뜩 분노해 마기를 폭발시켰다.
투쾅!
엄청난 폭발과 함께 가온이 밀려났다.
하지만 가온은 아쉬움보다 만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사이 이미 모든 틸리티를 정화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틸리티는 바흘-라에게도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하나의 세계를 멸망시키고 노획한 전리품인 데에다 그 성능이 매우 훌륭했기 때문이다.
“넌 반드시 내 손에 죽는다!”
그렇기에 바흘-라가 가온에게 분노하는 건 합당한 처사였다.
콰앙!
바흘-라는 마리얌의 공격이 자신에게 닿는 것을 감수했다.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가온을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콰르르르! 콰직!
그 어떤 맹공을 퍼부어도.
“칵!”
“커흑!”
“끄으으으으!”
신음만 흘릴 뿐, 가온을 죽일 수 없었다.
완전체가 된 틸리티의 방어력이 바흘-라의 공격을 대부분 무효화했으며.
일부 흘러들어오는 피해는 1차적으로 하울이, 2차적으론 무한회복이 감당했기 때문이다.
물론 바흘-라의 공격이 치명적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내부로 파고드는 고통은 결코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온은 버텨냈다.
포기할 줄 모르는 투쟁의 화신답게 말이다.
* * *
번쩍! 번쩍!
하늘의 변화가 심상치 않았다.
처음엔 모든 사람이 놀라 하던 일도 멈추고 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봤을 만큼 그건 기형적인 변화였다.
하늘의 절반이 짙은 어둠으로 물들고, 나머지 절반이 환한 빛으로 찼다.
어둠과 빛은 서로 뒤섞이며 엎치락뒤치락 하기 시작했다.
어떨 땐 어둠이 잔뜩 끼어 한낮에도 사위가 분간되지 않을 만큼 칠흑같았고.
또 어떨 땐 깊은 새벽에도 커튼을 친 침실의 이불 안까지도 환히 밝힐 만큼 밝았다.
신들의 전쟁.
사람들은 알았다.
그것이 바흘-라와 마리얌의 싸움이라는 것을.
싸움의 결과에 따라 그들의 처지도 달라질 거라는 것도.
처음엔 불안한 기색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리얌을 향해 기도했다.
부디 자신들의 일상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사람들은 여전히 신을 향해 기도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마리얌이 아닌 다른 존재를 향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온…….’
‘당신의 투쟁이 꺼지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네.’
그건 바로 붉은 오크들이었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신을 믿지 않았다.
에초부터 붉은 오크는 꺾이지 않는 신념을 믿으며 불굴의 투쟁을 위해 사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여신을 향해 기도하는 것 대신, 같은 투쟁의 업을 짊어진 가온을 향해 빌었다.
그의 투지가 꺾이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외에도 마리얌을 향해 기도하다 이따금 가온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렇게 가온을 향한 사람들의 믿음이 모여 유의미한 크기가 되었을 때.
그 믿음은 비로소 가온에게 닿기 시작했다.
* * *
“컥!”
“크윽!”
비명을 지르는 시간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오냐! 틸리티를 뒤집어쓰고 그 안에 숨었다 이거구나! 그렇다면 그 안에서 고통에 치를 떨다 죽게 해주마!”
바흘-라가 집요하게 가온을 노려댔기 때문이다.
바흘-라가 봉인되어 있던 시간동안, 마리얌도 그와의 전투를 준비했다.
하지만, 내정을 전문적으로 다루던 신인 마리얌이 아무리 제대로 준비를 한다 한들 바흘-라에 비견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리얌의 공격은 어딘가 어색했고 빈틈이 많았다.
바흘-라가 마리얌의 공격을 무시한 채 가온만 두드릴 수 있었던 데에는 바로 그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온에게는 고통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시간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타 천치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고통이었지만.
가온은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그가 피워 올린 투쟁의 불꽃은 꺼지는 법이 없었으니까.
거기다 가온이 지닌 재능은 상상이상.
처음엔 허공을 향해 내뻗는 무의미한 팔동작이었을 뿐인 움직임에.
턱!
어느새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했다.
“……막아?!”
바흘-라의 움직임이 보이고 그 경로를 예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온은 무수한 고통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그렇게 미약한 반항이 시작되었을 때.
‘가온.’
‘가온 님.’
‘가온 님……!’
그를 향한 사람들의 믿음도 가온에게 닿기 시작했다.
“……?!”
그 믿음은 가온을 바꾸어놓기 시작했다.
지속된 믿음은 다른 의미에서의 신앙.
그건 신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마스터피스라고 할 수 있었다.
가온의 변화는 내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변화를 알아차린 건 누구보다 가까이 있던 바흘-라였다.
“레벨 업?!”
신의 탄생을 목도한 바흘-라는 분노에 눈이 뒤집혀 가진 모든 마기를 폭발적으로 뿜어냈다.
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근간.
딱 그 정도만 남겨둔 채로 말이다.
가온이 9레벨에 오르면 이 일방적인 구도에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리얌이야 내정에 특화된 신이지만, 가온의 근간은 전투였으니.
그가 신이 되어 변화에 적응하는 순간,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틸리티를 이용해 뛰어난 수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가온은 안전을 보장받은 채, 변화에 적응할 수 있었다.
바흘-라를 불안에 떨게 하는 요소는 바로 그것이었다.
“죽어!!”
바흘-라는 자신이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가온을 공격했다.
쿠와아아아아앙!!!!!
엄청난 폭발이 가온을 휩쓴다.
하지만.
“늦었다, 바흘-라.”
그는 좀 더 일찍 그런 공격을 해야만 했다.
이렇게 위기에 닿아서야 시도하는 게 아니라.
그랬다면 이렇게 투쟁의 신이 탄생하는 걸 보지 않아도 됐을 테니 말이다.
촤르륵!
가온의 몸에서 더없이 순수한 틸리티가 쏟아져 나온다.
타락시켜 반쯤 억지로 다루던 바흘-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운용법.
카득! 카드득!
가온의 몸에서 쏟아진 틸리티는 바흘-라의 팔다리를 결박했다.
바흘-라는 조소했다.
“이런다고 네가 날 어찌할 수 있을 거 같아?”
“아니. 널 어찌하는 건 내가 아니다, 바흘라.”
“뭐?”
“잊었나? 애초에 네 상대는 내가 아니라 마리얌이었다.”
“……?!”
바흘-라는 가온의 말에 흠칫거렸다.
그제야 마리얌의 존재를 깨달은 것이다.
아무리 마리얌이 전투에 미숙하다고 할지라도.
“……놔! 이거 놔!!”
이렇듯 팔다리가 속박된 상태의 적을 맞추지 못할 리가 없었다.
특히나, 그 적이 큰 기운을 소모하고 빈껍데기나 마찬가지인 상태라면 더더욱.
“긴 악연이었습니다, 바흘-라.”
마리얌은 가온이 바흘-라의 팔다리를 묶은 순간 직감했다.
긴 전쟁을 끝낼 순간이 도래했음을.
위잉, 위이이잉─────!
마리얌은 가장 순수한 신성력으로 바흘-라를 저격했다.
“아, 안……!”
마리얌의 신성력에 닿은 바흘-라는 조금씩 형태를 잃으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둠이 빛에 사라지듯.
긴 새벽을 지나 동이 트듯 그렇게.
하늘을 물들였던 어둠이 개기 시작했다.
“끝났……나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마리얌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그 물음에 가온이 대답했다.
“그래. 끝났다.”
그건.
긴 전쟁의 끝을 알리는.
확신으로 가득 찬 대답이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