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1)
검은 머리 영국 의사-1화&프롤로그(1/505)
프롤로그 – 19세기로?
“주혁아.”
“빨리 말이나 해 줘. 나…… 어렵겠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은근한 기대는 있었다.
세상에 말이나 되는가?
내 나이가 이제 고작해야 서른여덟인데 죽는다고?
이제 겨우 전문의 따고 군대 갔다 왔는데, 이제야 펠로우 끝나고 좀 살 만할까 싶은데?
“이게…… 너 찍은 CT야.”
친구 녀석은 대답 대신 모니터를 돌려 내게 보여 주었다.
화면에 뜬 것은 내 머릿속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뇌, 그중에서도 위에서부터 가로로 잘랐을 때 중간 정도 되는 부분?
외면하려 해도 의사로서 수련받은 지식이 있는 탓에, 거의 4cm가량 되는 종양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조영된 정도도 그렇고, 생긴 것도 그렇고.
“악성이야. 정확한 건 조직 검사를 해 봐야겠지만…… 이대로면 수술은 어려워.”
“하…….”
그래, 딱 봐도 수술은 못 할 거같이 생겼다.
X같이 생겼다, 진짜.
저런 게 왜 내 머릿속에 생겼지?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어…….”
방금까지 분명 진료실이었던 거 같은데.
눈을 떠 보니 낯익은 천장이 보였다.
병실에 누워 있었다.
“벌써 발작이 있었어?”
“네.”
“부모님한테는 연락 드렸고?”
“그게, 주혁이 고아입니다. 결혼도 안 했고요.”
“아…… 그…… 참.”
내가 깨어났다는 걸 모르는지, 옆에서 신경외과 시니어 교수와 친구 놈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얼마나…… 남았을까요?”
친구 놈이 어두운 낯빛으로 물었다.
교수는 즉각 답을 하지 못하고 한숨부터 쉬었다.
‘안 돼…….’
익숙한 모습이었다.
당장 나도 췌장암이나 담도암 환자들을 앞에 두고는 선뜻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다시 말하면,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길어야 한 달? 나이가 젊어서 더 그래.”
“하.”
“그나마 홀몸이니까…… 잘 추스르라고 해. 즐거운 기억이라도 갖고 가라고 하고.”
“호스피스 병동으로 연결할까요?”
“통증이 생기면 별수 없지. 완화 치료는 해야 할 거야.”
완화 치료.
삶의 연장이 아니라, 죽음으로 가는 길을 조금이라도 편히 만들기 위한 치료였다.
‘이런 시발…….’
나는 그저 열심히 살아왔을 뿐인데.
그 결과, 이제 겨우 임용을 받아서 교수가 됐는데.
교수 명함도 뽑기 전에 뇌종양이라니.
이게 대체…….
이게 대체 뭔 놈의 인생이란 말인가.
그 뒤로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래, 잘 다녀와라.”
“고마워.”
퇴원하자마자 바로 기차를 타고 동해로 향했다.
바다라도 보고 죽자는 심정이었다.
무사히 도착해서 해안가로 걸어가려는데, 무언가가 빠르게 내게 날아들었다.
“어, 뭐야.”
처음엔 뇌종양으로 인한 환상인가 했다.
집채만 한 트럭이 갑자기 여기서 나타날 리가 없지 않나.
안 그래도 암까지 걸렸는데 트럭이 와?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으, 으아아.”
그런 생각을 날아가면서 했다.
검은색 아스팔트가 보이나 싶더니, 정신이 툭 하고 끊어졌다.
* * *
“어? 애가 웁니다!”
그리고 눈을 떠 보니 낯선 천장이 흔들리고 있었다.
누군가 나를 들어서 흔들고 있는 느낌.
아니, 진짜 흔들고 있었다.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러더니 처음 보는 여자에게 나를 들이밀었다.
여자는 나를 보고 웃더니, 이내 까무러쳤다.
나도 어쩐지 힘이 너무 없어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옴짝달싹할 수 없게 묶여 있었다.
고개도 잘 안 돌아갔지만, 돌아가는 상황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나, 아무래도 아기가 된 거 같은데…….’
1화 19세기 [1]
내가 태어난 곳은.
그러니까 다시 태어난 곳은 19세기 영국의 업턴(Upton)이라는 작은 도시였다.
“야, 원숭이!”
인구 12,000명 정도 되는 소도시.
솔직히 21세기의 기억을 빗대어 보자면, 도시가 아니라 시골 마을 정도 되는 수준이었다.
“니네 뒤질래? 감히 내 친구한테!”
“어어, 조지프가 화낸다!”
“야, 너도 저 새끼들이 저러면 뭐라고 좀 해! 네가 가만히 있으니까 더 저러는 거 아니야.”
“뭐…… 어쩔 수 없잖아. 내가 다르게 생긴걸.”
21세기에도 있던 것이 인종차별이지 않나.
섬나라 영국은 더 심하고.
근데 내가 다시 태어난 시대는 심지어 19세기였다.
지금의 영국엔 아예 나 같은 동양인을 처음 보는 놈들이 태반이었다.
‘아니…… 어떻게 조선이 아니라 영국에서 다시 태어났냐고…….’
나조차도 의문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집안이 글쎄 조선 최초의 천주교 집안 중 하나였더라고?
‘신부, 수녀님 되겠다고 마카오 가시다가 눈이 맞아서 그만…….’
우리 부모님은 무려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카오로 향하다가, 항해 중 사랑이 싹텄다고 했다.
그래도 뭐, 그냥 그 길로 조선으로 돌아가면 됐을 텐데, 기왕 이리된 거 영국이라도 구경해 보자는 마음으로 에이단 신부님을 따라왔고.
그사이에 남들 다 일하는 배 안에서 뭔 짓을 했는지 내가 태어나 정착하게 되었다는 게 집안 내력이었다.
“다 하나님 자식인데! 다르게 생겼다는 거 하나로, 뭐 원숭이? 저 새끼들을 내가 진짜!”
그러다 보니 나름 신부님이 이것저것 도와준 덕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특히 아버지가 독실한 퀘이커(Quaker) 교도인 리스터 집안이 운영하는 포도주 상단에 취직했기 때문에, 오히려 어지간한 집안보다 더 잘살았다.
나?
나야 뭐 리스터 집안…… 그러니까 조지프 리스터랑 친구 먹고 잘 지내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도 해 볼래?”
“아, 너 눈 괜찮아? 그거 자주 하면 눈 아프다며.”
“괜찮아. 간단한 거야 뭐…… 할 수 있지.”
애가 괜찮은 것도 괜찮은 건데.
이 녀석에게는 현미경이 있었다.
워낙 원시적인 형태의 물건이다 보니, 보다 보면 눈알이 빠질 것처럼 아프다는 게 문제긴 했지만.
재밌는 게 너무 많은 21세기에서 19세기로 돌아온 내겐 현미경 만한 장난감도 별로 없었다.
“그럼 일단 뭐라도 잡을까?”
“좋아.”
게다가 동양인인 나도 동네 인싸인 조지프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도시 최고 부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집안이다 보니, 다들 조지프에게는 잘 보이려고 애를 썼기에 그랬다.
물론 애새끼들 중에는 천지 분간 못하고 덤비는 놈들이 있긴 했지만.
이래 봬도 21세기 한국에서 교수까지 올라갔던 사람 아닌가.
악이나 깡이나 나한테 비할 수 있는 놈은 단 하나도 없었다.
“어, 어어. 당겨!”
“오케이!”
하여간 나는 리스터와 종종 근처 바닷가에 놀러 가서 새우나 생선 등을 잡아 올렸다.
그러곤 간단한 해부를 시행하고, 그걸 현미경으로 관찰했다.
나에게야 심장 뛰는 새우가 그리 신기할 일은 아니었지만.
“와…… 진짜…… 뛴다…….”
조지프에게는 신세계 그 자체였다.
“역시 난 의대에 가야겠어.”
그 때문인지, 얘 꿈이 의사가 되었다.
새우랑 인간은 많이 다르긴 할 텐데.
이런 걸 가지고 꿈을 정해도 되나 싶긴 했지만, 조지프의 아버지는 그런 조지프의 결정에 아주 신이 났다.
“그래? 의대에 가겠다고?”
“네, 아버지. 태평이랑 함께 가려고요!”
“태평이. 음.”
“의대 학비 비싼 건 알아요. 하지만 태평이는 저랑 제일 친한 친구고…… 또 똑똑하다고요. 같이 가면 나중에 얼마든지 갚을 수 있을 거예요.”
얼마나 신이 났는지, 당장 나까지 의대에 보내 주기로 약속했을 지경이었다.
“말로만 그럴 게 아니라, 아예 런던으로 가서 구경도 해 보거라.”
“네? 정말요?”
“그래, 정말이지. 태평이, 너도 아버지께 허락을 구하거라.”
“네, 감사합니다. 아버님.”
돈까지 내준다는데 우리 아빠가 뭘 어쩌겠나.
게다가 당장 대학을 들어가겠다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견학을 가는 것뿐이었다.
“런던……?”
“네, 런던. 포도주 팔러 가시는 길에 같이 따라갔다 오는 거래요.”
“뭐…… 좋겠지. 다만 혼자 다니지는 말거라. 알지? 위험해.”
“아, 네. 물론이죠.”
허락은 쉬웠다.
물론 걱정이야 되시겠지만.
내가 애인가.
15살이니까 애는 애긴 한데.
이 시대에 15살이면 사실 어른이나 마찬가지인 데다가, 전생의 나이까지 합치면 쉰도 넘었다.
사실 아버지보다 내가 나이가 많다, 이 말이었다.
‘존나 떨린다…….’
그럼에도 업턴을 떠나 런던으로 향하는 길은 설레었다.
다시 태어난 뒤로 이 작은 도시를 떠나 본 적이 없었으니 당연했다.
그리고 그 설렘은 출발과 동시에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길이…… 완전 엉망이네.’
19세기라는 걸 잊고 있었다.
영국이 아무리 산업혁명으로 빠르게 발전했다곤 해도, 19세기는 19세기였다.
“어어…….”
“야, 꽉 잡아.”
조지프도 신세는 같았다.
녀석도 업턴 촌놈이기에 이런 길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아마 나보다 더 놀라긴 했을 터였다.
녀석의 집은 그야말로 고급 그 자체니까.
정원에 놓인 동양풍 다리부터 잘 꾸며진 나무까지…….
그에 비하면, 이 길은 그냥 지옥이었다.
“자, 저기가 런던이다.”
아니, 지옥이라는 말은 취소였다.
지옥은 런던이었다.
“저…… 회색 도시가요?”
아닌 것 같은데?
아저씨가 그랬잖아요.
런던이 세계 최고의 도시라고.
근데 저건…….
“그래, 저 검은 연기가 바로 런던의 상징이란다.”
아니야…… 상징으로 삼지 마…….
저 안에 들어가면 안 돼…….
다그닥다그닥-
내 바람과는 관계없이, 마차는 곧 런던으로 진입했다.
멀리서도 희극과는 거리가 멀었던 런던은 가까이서 보니 진짜 비극 그 자체였다.
“읍.”
“하하하! 촌놈이라 그런가, 도시 냄새에 적응을 못 하는구만!”
냄새가 시벌…….
나는 내게 촌놈을 운운하는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속으로 시발시발 하면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욕은 역시 신토불이였다.
엿 같은 상황이 와도 시벌 한 번 하면 좀 속이 풀리는 기분이 들지 않나?
‘아니, 아닌데.’
오늘은 아니었다.
풀릴 수가 없었다.
런던은…….
“웩, 웨에에엑”
마차 타고 가는데 옆에서 토하고.
“지나갑시다, 지나가요!”
그 옆으로 거적때기를 씌운 무언가가 지나가는데, 얼핏 사람 발 같은 게 보였다.
설마 아니겠지 하고 있으려니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웃는 낯이었다.
“저게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의과 대학에 납품되는 시신이란다. 그래서 그런가, 거기 해부 실력이 아주 최고래!”
네?
뭐요?
시신을 납품한다고요?
납품이라는 단어 자체도 문제긴 했는데, 그건 아저씨가 포도주 상인이니 직업병이라고 애써 이해하고 넘길 수 있을 거 같았다.
정말 문제는 그냥 저 시신에 있었다.
‘부패……가 좀 많이 진행된 것…… 같은데?’
저걸 해부했다가는 지식을 습득하기 이전에 끔찍한 감염병을 습득할 거 같은뎁쇼?
“하하. 조지프는 그래도 내가 런던에 대해 이것저것 얘기해 준 게 많은데, 태평이 너는 처음이라 그런지 바싹 얼었구나! 가슴을 펴! 대도시에서는 당당해야 해!”
“아니…….”
당당한 게 문제가 아니라, 이 사람아.
저런 걸 해부하면 안 된다고.
그 대학에도 가면 안 되고.
“어, 다 왔네. 일단 세우자. 볼일이야 맨날 하는 일이니까 금방 끝날 거다. 여기 서서 좀 기다리고 있으면, 나와서 의과 대학이나 구경하러 가자꾸나.”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저씨는 마차에서 내려 가게에 들어갔다.
그러곤 인부들과 함께 부지런히 포도주를 안으로 날랐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일손을 보태려니, 원래 가게에 있던 꼬마 놈이 나를 뚫어져라 보기 시작했다.
“왜?”
또 원숭이 타령이 시작되려나 하는데,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와, 되게 특이하게 생겼다.”
이것이 순수 어택인가.
저렇게 해맑은 얼굴로 특이하게 생겼다고 하다니.
“인석이, 들어가 있어!”
다행인 것은 가게 주인이 착하다는 점이었다.
“미안하네, 뭘 몰라서 저래. 하하. 자네가 피부도 노랗고 눈이 작고, 머리가 까매서 신기했던 모양이네.”
착하다는 말은 취소.
상처를 아주 그냥 후벼 파네.
21세기였으면 인종차별 죄로 사형까지 시킬 수 있겠어.
“아, 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곳은 19세기.
나쁜 아저씨들이 잡아가서 서커스에 팔아넘길 수도 있는 시대지.
해서, 나는 지난 10여 년간 아버지와 신부님께 배운 대로 고개를 푹 숙였다.
“어, 정말? 이거 우리가 운이 좋구만.”
그 후로도 계속 포도주를 나르고 있으려니, 아저씨가 슬슬 일선에서 빠져 가게 주인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뭐라 할 일은 아니었다.
원래 사장이 궂은일까지 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래. 자네 아들이 의과 대학에 관심이 있다니 잘됐구만. 여기 마무리는 내가 할 테니, 먼저 가게.”
“어, 그러지. 그렇게 하겠네. 고마워.”
“우리 사이에 이런 거 가지고 무얼.”
하여간 그렇게 대화를 나누나 싶더니, 갑자기 아저씨가 나와 조지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가자.”
“네? 어딜요?”
“수술한대. 그거 구경 가자고.”
“네?”
수술하는 걸 구경하러 간다고?
이건 또 무슨 신박한 소리란 말인가.
그거 구경하면 안 되는 건데.
해서 멍한 표정을 짓자, 아저씨가 또 웃었다.
“우리 업턴 촌놈이 오늘 놀라 자빠지겠네. 수술이라는 게 있단다, 이 세상에는!”
알아요, 아저씨.
내가 외과 전문의에 교수까지 됐다고.
비록 교수 되자마자 뇌종양에 걸려서…….
아니, 그 전에 트럭에 치여서 죽긴 했지만.
“일단 가자고. 늦으면 못 봐. 수술이라는 게 참 어? 볼만한 거란다.”
“어어.”
“가자, 뭐 해? 설마 겁나서 그래? 너 해부도 곧잘 하잖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뭐라 할 새도 없이 나는 아저씨의 손에, 그리고 조지프의 손에 끌려가기 시작했다.
“옳지. 저기 자리 있네.”
도착한 곳은 심지어 실내도 아니었다.
광장이었다.
사방이 탁 트인 광장.
평소라면 비어 있었을 것 같은 공간에 웬 책상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안 돼! 나 안 받고 그냥 죽을 거야!”
무슨 일인가 싶어서 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웬 남자가 네 명의 사내에 의해 끌려 오고 있었다.
“수술하기 전에 사형 집행부터 하는 거예요?”
“아니, 수술인데?”
“저게요?”
“어. 넌 처음이라 그래. 수술이란 게 있어. 사람을 살리는 방법 중 하나란다.”
아저씨는 그 꼴을 보면서 인자하게 웃었다.
나는 여전히 끌려 오는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저걸 뭐라고 해야 할까.
그래, 공포.
환자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