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10)
검은 머리 영국 의사-10화(10/505)
10화 선배 부자네 [1]
속으로 부채 살랑거리는 내 모습을 상상하고 있으려니, 학교 앞으로 마차가 와서 섰다.
미친.
진짜 부자잖아?
우리는 걸어 다니는데.
고작해야 학생 신분이면서 마차를 타?
“안 타?”
이래서 사람이 좋은 차를 모나 보다 싶었다.
안에서 ‘안 타?’ 이러는데 살짝 설렜다.
대단한 일이었다.
이 새끼는 장갑도 안 끼고 시신 해부하는 놈이잖아.
다시 말하면, 내 머릿속에서 멍청한 놈이라고 낙인찍힌 놈인데도 설레다니.
“자, 그럼 갑니다.”
하여간 올라타니까 마부가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이 시기 런던은 그야말로 인구 과밀 그 자체다 보니 속도가 나진 않았다.
마차로 마음껏 달리면 아마 100미터마다 사람 하나는 죽일 수 있을 게 분명해서 그랬다.
‘아, 냄새.’
달리다 보니 은은한 똥내가 났다.
템스강이 그 근원이었다.
전생의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유럽 여행이었고, 그중엔 빅벤인지 뭔지 하는 시계탑을 템스강 주변 카페에 앉아서 보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템스강이라고 하면 똥 냄새 말곤 생각나는 게 없었다.
아마 아직 빅벤이 건설되기도 전이라서 더 그럴 터였다.
“거의 다 왔어.”
물론 빅벤 말고도 볼만한 건물은 꽤 있었다.
왜 런던이 현시점에서 세계의 중심지라 불리는지 알려 주겠다는 듯, 도로 양옆으로는 석조 건물들이 즐비했다.
또 마차도 엄청 많았다.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마차들이 태반이라, 이게 진짜 런던이구나 싶을 지경이었다.
“저기야.”
선배가 가리킨 저택을 봤을 때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여기가 런던이라는 사실에 안도해라.
대나무만 자랐으면 죽창 들고…….
‘아니지, 아냐. 이 양반 이제 나랑 친해질 것 같다구?’
부자 친구.
있으면 좋지 않겠나.
그런 일념 하나로 참았다.
“와…….”
반면 조지프는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업턴을 떠나 런던에 들어온 직후부터는 계속 살풍경만 보아 와서 그럴 터였다.
게다가 선배의 저택은 이 땅값 비싼 런던에 있으면서도 업턴에 있는 리스터 집보다도 규모가 더 웅장했다.
“진짜 좋네요?”
“응? 으응. 뭐…… 우리 아버지가 무역을 좀 크게 해서. 형들은 다 무역 쪽으로 갔고 나만 의대에 왔지.”
“아…….”
이런 경우가 왕왕 있다고 들었다.
이때만 해도 장자 우선이다 보니, 막내는 아무리 부잣집 사람이라고 해도 각자도생해야 하는 느낌?
물론 그네들의 각자도생과 어려운 사람들의 각자도생은 참 다르긴 하지만.
하여간 가업을 물려받는 대신 의대나 법대로 진학하는 경우는 대개 장자보다 그 밑의 둘째 셋째들이 많았다.
다그닥-
마차는 곧 저택 정문 앞에서 멈추어 섰다.
안쪽에서 달려 나오던 집사가 날 보곤 멈춰 섰다.
마차랑 싱크로가 묘하게 맞아서 무슨 영화라도 찍는 줄 알았다.
“그.”
이런 상황에 익숙한 조지프가 나서려 했는데, 의외로 선배가 먼저 나섰다.
“이 친구는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온 내 후배일세.”
“아…… 조선이라면…….”
“모르지 않아?”
“네, 모릅니다.”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려던, 나이 지긋한 집사를 지나쳐 집으로 들어갔다.
올라가는 계단이 높아서 제법 걸어야 했다.
“나도 사실 청이나 저팬은 들어 봤는데 조선은 익숙지가 않네.”
“네, 뭐…… 그럴 거예요. 저희는 신비의 나라라서.”
“아하.”
올라가는 동안 시간이 붕 뜬 덕분에 개소리를 좀 나눠 봤다.
옆을 보니 조지프가 뭔 개소리냐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괜찮았다.
나도 내가 개소리하고 있다는 건 아니까.
뭐가 되었건, 중요한 건 오늘 여기에 왔다는 것 아니겠나.
집도 큰 게 운 좋으면 얹혀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집안일 좀 해도 되니까,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오.”
커다란 문 안쪽은 로비였다.
다른 용어가 있을 수도 있는데, 전혀 모르겠다.
하여간 넓은 공간에 뭐가 잔뜩 있었다.
장식장 안에도, 기둥 위에도.
“아, 이건 아버지가 무역하면서 가져온 것들이야. 엄청 귀한 것들도 있다던데.”
“어…… 그래 보이는데요?”
저거 고려청자 아니냐?
이 새끼들 이거 국보 반출하네.
아닌가?
중국 청자인가?
조선까지 들락거리는 배가 많지는 않았을 것 같긴 한데…….
“이건…… 이건 뭐예요?”
그렇게 귀해 보이는 것들을 지나 응접실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탁자 밑에 뭐가 놓여 있어서 집어 들었는데,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물건이었다.
‘고무…… 고무 아닌가?’
고무.
21세기 문명의 이기.
한낱 고무 보고 너무 오바하는 거 아니냐 싶을 수도 있을 텐데.
이곳에서는 그냥 플라스틱도 볼 수가 없다고.
“아, 이거? 난 모르겠네. 아버지가 샘플로 가져왔다가 그냥 두신 거 같아.”
“샘플……? 음.”
“왜?”
“아니, 이게.”
하여간 고무가 있었다.
내가 아까부터 계속 고민하고 있던 게 하나 있다면, 다름 아닌 장갑이란 말이지.
아무리 하기 싫어도 해부를 하긴 해야 할 텐데.
맨손으로 할 수는 없잖아.
아니, 수술도 맨손으로 해야 하는데…….
해부가 그냥 꺼림칙한 정도라면, 수술은 양심에 너무 찔렸다.
아무리 독한 소독약을 들이붓는다 해도 손 전체가 멸균이 되진 않을 거거든.
‘그렇다고 일반 천으로 장갑 만드는 건 진짜 미친 짓이지.’
보호는 될 수 있을 터였다.
두껍게 만들면 뭐…… 설마 찔리겠나.
해부할 때는 안전할 거란 얘기였다.
설령 너무 두꺼워서 움직임이 둔해지더라도 상관없을 거고.
하지만 수술을 천 장갑으로 해?
차라리 맨손을 깨끗이 닦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그게 뭐? 나 일단 여기 소독 좀 더 해 주면 안 될까?”
“아, 맞아. 내 정신 좀 봐.”
내가 고무에만 정신이 팔려 있자, 초조했는지 선배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
여기 이득을 보러 온 것도 맞지만.
일단은 저 인간 살리러 온 거니까.
‘살 수 있을까……?’
죽을 수도 있었다.
딱 처치를 하긴 했지만, 균이 조금이라도 들어갔으면 감염이 일어날 테니까.
바깥을 소독하는 게 지금 상황에서 크게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지.’
머리로는 의심하고 있었지만, 손은 망설이지 않았다.
우선 술을 증류해서 순수 알코올을 만들어 받았다.
엄청 초보적인 단계로밖에 진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순수 알코올은 아닐 터였다.
“오…….”
“이런 건 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그냥 냄비에 술 끓이면서 위를 둥근 철제 바구니로 감싸 맺히는 물을 아래로 받는 게 다였다.
그럼에도 선배와 조지프는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슬쩍 주변을 보니 집사도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뭐랄까.
기대에 부응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인지상정 아닐까.
“조선……에서 배웠습니다. 후후.”
최대한 신비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어.”
“아니, 너 여기서 태어…….”
조지프가 살짝 시비를 걸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신비의 나라 조선에서 온 의학자 김태평이 술을 알코올로 만드는 순간이지 않나.
“일단 이걸로 소독부터 하죠. 엄청 아프실 거예요. 알코올이 상처에 닿으면 진짜 아프거든요.”
“음.”
내 말에 조지프는 입을 다물었고, 선배는 긴장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육안으로 볼 때는 딱히 뭐가 없어 보이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괜찮을 거란 확신은 없었다.
하루 정도 지나 봐야 알 수 있지 않을까?
‘부으면 째야지 뭐.’
일단 외과의가 있으니 남들보단 살아날 가능성이 클 거라 여기며, 알코올로 상처를 닦아 내었다.
“으, 으아. 이거…….”
“에는 것 같은 통증이죠? 알아요. 아마 나중에 여기 감각이 좀 없어질 겁니다.”
“왜, 왜?”
알코올 독성 때문에 신경 조직이 죽어서요, 라고 말하면 동양의 신비가 아니라 사탄의 자식처럼 보이겠지?
“기운이…….”
“아, 그렇구나.”
해서 나는 사탄의 자식이나 할 법한 소리를 했고, 19세기 상식에 따라 납득받았다.
‘아…… 빨리 바꾸고 싶다.’
이 무지몽매한 것들에게 21세기 과학의 세례를 내리고 싶다!
하지만 너무 서두르면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힌 채로 불에 탈 것 같으니 천천히 가야 했다.
“우선 이렇게 하고…… 시간을 두고 봐야 합니다. 내일 여기가 붉게 붓는다? 그럼 칼로 좀 째야 할 수도 있어요.”
“손가락을 잘라?”
아니, 미친놈아.
손가락을 왜 잘라.
아, 아니지.
무리도 아니긴 하지.
‘아…… 지금은 그냥 다 자르는 시대지.’
참 호쾌한 시절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생각 없는 놈들이라고 해야 할지.
하여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아뇨. 살짝 절개만 해서 고름을 빼는 거예요.”
“난 살아 있는 사람인데 고름이 생겨?”
이 미친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뒤통수를 후려 까고 싶었지만 참았다.
“네, 생길 수 있죠. 그게 핏속으로 번져 들어가면 큰일인데…… 하여간 결국 중요한 건 여기. 이 다친 부위를 잘 정리하는 거예요.”
“으음…….”
말해 놓고 너무 의사 같았나 싶어서, 으음 하는 선배를 빤히 바라보았다.
다행히 이 인간은 여태 봐 왔던 선배들의 장렬한 죽음을 떠올리고 있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아무것도 안 했으면 뭐…… 죽었지.
그 뭐야.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누구도 오염된 칼로 괜히 가슴 한번 그었다가 죽었잖아.
평범한 인간들 따위는…… 게다가 시신에 오염된 칼이면 말 다 했지.
“하여간 내일 아침에 바로 봐야 할 것 같은데…… 저희 집이 여기서 좀 멀어서. 이거 어쩌죠?”
나는 일단 약부터 팔았다.
내색은 안 했지만, 따라올 때부터 여기까지 다 계산을 했단 말이지.
소독을 했으니 죽을 가능성은 팍 떨어졌어도, 매일 처치를 해야 더더욱 안심할 수 있을 터였다.
언제가 돼야 완전히 안심할 수 있을까?
내 계산으론 한 2주 정도 필요했다.
근거?
그건 모르겠고, 여기 방 개수 보니까 2주는 몰래 살아도 될 것 같았다.
“어…… 우리 집에 방 많은데. 괜찮으면 여기서 지내.”
난 대답하는 대신 조지프를 바라보았다.
녀석의 눈동자는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의사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내색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녀석도 결국 부잣집 도련님 아닌가.
근데 거기로 돌아가고 싶을까?
“평아 어쩌지. 사실 날도 좀 늦었고. 오늘은…….”
애쓴다, 애써.
그래, 형이 인마 여기 빌붙어 살게 해 줄게.
형편 보니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그래요. 그럼 오늘 여기서 지내죠.”
그리고 내일 째 보고 또 입 털어서 계속 있어야지.
그렇게 2주쯤 지나면 정도 들었겠다, 계속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못된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닫혀 있던 적이 없었으니 그냥 기척을 낸 것에 불과했다.
하여간 선배는 뒤를 돌아보았고, 문을 두드린 집사가 말했다.
“주인님께서 오셨습니다.”
“아, 네. 얘들아 가서 인사하자. 아버지가 좀 특이한 분이긴 한데……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너무 긴장하지는 말고.”
주인님.
아버지.
백인 꼰대가 왔다는 얘기를 듣자 나도 모르게 긴장했다.
쫄보라고 욕하지는 마라.
여기 오면 누구라도 이렇게 될 테니.
“저도 가도 될까요?”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어서 거절당하려고 물었더니, 선배가 웃었다.
“될 거야. 어차피 저쪽에서 교역하는 상대가 다 동양인이라서.”
“아.”
“그럼 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