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107)
검은 머리 영국 의사-107화(107/505)
107화 얼떨결에 [1]
“시신을 모아요……?”
“모아야지, 그럼. 적어도 스무 명은 올 텐데……. 이래서야 어디 되겠나?”
리스턴 박사님은 해부 실습실을 가리켰다.
딱히 시신이 모자랐던 적도 없었고, 지금 보기에도 전혀 그런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스무 명의 외과 의사가 와서 한 번씩이라도 실습을 해 봐야 된다고 가정하고 나서 다시 보니…… 확실히 턱없이 부족해 보이긴 했다.
애초에 포르말린이 없는 시대다 보니 시신을 확보한다고 해도 실습이 가능한 기간이 너무 짧을 수밖에 없지 않나.
시신 한 구로 한 학기 또는 1년 내내 실습을 진행하기도 했던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온 내게는 꽤나 불합리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니 모아야지.”
“어…… 어디서요?”
“그게 문제일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 시기 런던에서는 시신 구하는 일이 아주 어렵지 않았다.
여기만 해도…….
저 봐.
쿵.
오늘도 한 구 들어오잖아.
매일은 아니더라도…….
거의 매주 한두 구씩은 들어오고 있었다.
동의 따위는 구할 생각도 없어서 가능한 일이긴 했다.
그러니까 거대한 부도덕함의 발현이라고 봐도 무방한 일이라 이건데…….
“에든버러에서 그 미친놈들이 걸리지만 않았어도 훨씬 수월할 텐데…….”
놀라운 건 이게 많이 개선된 결과라는 점이었다.
방금 리스턴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던 저 사건.
그러니까 옛 스코틀랜드의 수도이자 보이지 않는 손의 주인공 애덤 스미스, 경험주의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흄을 탄생시킨, 북부의 아테네라는 별명까지 지니고 있는 도시에서 정말이지 충격적인 사건이 하나 벌어졌더랬다.
‘윌리엄 버크…… 윌리엄 헤어…….’
이름만 들어서는 뭔지 모르겠는, 그냥 평범한 이름의 두 놈은 천인공노할 만한 짓을 저질렀다.
공범도 있었다.
로버트 녹스.
제법 유명한 해부학자인데…… 이 런던 대학교에도 그가 저술한 책이 있을 정도였다.
저명한 해부학자가 대체 어떤 범죄에 연루되었는고 하니, 어지간한 범죄도 아니고 연쇄 살인에 연루가 되어 있었다.
물론 말이 연쇄 살인이지, 그 용어가 등장하는 건 1900년대 후반에나 나오는 것이다 보니 그런 용어가 쓰이진 않았지만 내가 볼 땐 이놈들도 흠잡을 때 없는 연쇄 살인범들이었다.
“둘이 죽인 게 열여섯이던가?”
“네? 아, 네. 알려진 것이 그렇죠.”
“더 있을 수 있겠지. 사실…… 뭐 그놈들만 그랬겠나.”
“그…… 그렇죠.”
리스턴의 말마따나 놈들이 죽인 이의 수는 무려 열여섯 명이나 되었다.
알려진 것이 그러니 더 있을 가능성이 농후한데…….
목적은 바로 시신 해부에 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녹스 박사가 그들에게서 해부 목적으로 시신을 샀다.
놈들은 말 그대로 시신을 ‘생산’했고.
“아니…… 어차피 죽어 나가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에든버러는 사정이 좀 다른가?”
“그보다는…… 뭐…… 젊고 건강한 시신을 원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거참. 미친놈. 아무리 시신 해부가 하고 싶어도 그렇지…… 사람을 죽이다니.”
“끝까지 억울하다고 했을걸요. 실제로 뭐…… 안 죽었잖아요.”
“안 죽었지. 듣자니 여기저기 강의하려고 뭘 알아보고 있다는데, 내 눈에 띄면 죽은 목숨이지.”
“그…….”
내가 봤을 때…….
그전에도 아니, 지금도 알음알음 그런 일이 발생하고 있을 터였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대학에서 해부하는 시신 중에도 간혹 출처가 불분명한 것들이 있지 않던가.
굳이 파고들지 않는 건 괜히 알게 되었다가 손 쓰기 어려운 일을 마주하게 될까 봐서였다.
물론 저 일이 명명백백히 밝혀지고 나서는 나름의 단속도 생겼고 그래서 시신 공급이 줄어들게 된 것도 사실이긴 했다.
실제로 어떤 대학에서는 아예 시신 해부를 금하기까지 했다고 들었다.
‘이 인간…… 그래서 화를 내는 거 아닌가?’
그 전…….
그러니까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해부 실습실에 시신이 부족한 일은 아예 없었다고 들었다.
오히려 너무 많이 몰려와서 지급할 돈이 부족할 때가 훨씬 많았다고 했다.
그게 줄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일 같았다.
살해당해서 끌려오는 시신이 줄었다는 얘기잖아.
“아무튼, 말씀대로 구하긴 해야 할 거 같은데요?”
당연하지만 내가 감히 리스턴 앞에서 이따위 말을 할 만한 용자는 아니었다.
해서 그냥 다른 얘기를 꺼냈다.
윌리엄 버크니 헤어니 하는 소리는 적어도 해부 실습실에서 하기엔 너무나도 부적절한 소리이지 않나.
세상에 시신 해부를 위한 살인이라니…….
그따위 말을 재판장에서 했다는 것도 놀라웠다.
어떤 목적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범죄를 저질러 놓고서도 당당했다니.
“그렇지. 다른 병원으로 가는 걸 이번 주, 다음 주만이라도 우리가 다 얻어 와야겠는데.”
하여간 리스턴은 목적 지향적인 인간이니만큼 화제 돌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불행한 것은 이 인간이 이런 말을 하면서 나를 비롯한 제자들을 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
“네?”
조지프와 앨프리드가 얼빠진 소리를 내 봐야 별 소용은 없었다.
“제가 구해 오겠습니다!”
어차피 리스턴이 마음을 정하면 따라야 하는 것이 운명 아니겠나.
그렇다고 시신 구하는 일에 열정을 보이는 콜린이 정상이라는 얘기는 아니었다.
대체 어디 가서 어떤 짓을 해서 구해 올 건데…….
묘하게 사이코패스적인 기질이 있는 놈이다 보니 그것도 걱정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러거나 말거나 버릴 텐데 이제는 완전히 숙이고 들어온 마당이라 그럴 수도 없단 말이지.
“그래, 구해 오게.”
“네? 형. 구해 오라뇨. 방금 윌리엄 버크, 헤어 얘기해 놓고?”
“죽이라는 게 아니잖아. 그냥 구해 오라 이거지.”
“그 말이…… 그 말 아닙니까……?”
“오해 말게. 의사가 사람을 죽여서야 되겠나. 그냥 어떻게든 구해 와.”
그러니까…….
당신 같은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어쩐지 조폭 같고, 어떻게든 안에 살인이라는 옵션이 당연히 들어가 있을 거 같단 말이지.
“그 일단 묘지로 갈까요? 거기로 하루에도 어마어마한 양의 시신이 들어오니까요.”
“아니, 거기는…… 이미 썩은 시신이 너무 많네. 그보다는 역시…….”
역시 뒤에 불길한 단어가 있을 거 같았다.
길거리라든지, 남의 집이라든지 하는 말들.
이런 생각이 나는 것도 문제지만 막상 듣고 나면 정말이지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거 같아서 나는 최대한 서둘렀다.
“겨, 경찰서 어떻습니까!”
“경찰서……?”
“살인 사건이 나거나 하면…… 따라가는 거죠. 그럼…… 아니, 부검을 하려나.”
“오. 좋은 생각인데!”
“아니, 부검은…….”
“부검이야 여기서 하면 되지. 우리가 해 주면 그치들도 고마워할 거야.”
어…….
그런가?
고마워하나……?
하긴 부검이라는 것도 다 의학이 발전하고 나서야 따라서 발전하지 않았겠나?
비록 내가 부검을…… 그러니까 법의학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기껏해야 학생 때 들은 게 다지만.
그럼에도 여기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나을 거 같긴 했다.
“자, 그럼,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다들 나가 보지.”
“그…… 진짜로 경찰서 가는 겁니까?”
“자네가 얘기해 놓고 왜 이제 와서 딴소린가.”
“다른 친구들…… 아니, 아닙니다.”
이 새끼들.
해부하기가 어지간히 싫었는지, 나간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해가 아예 안 가는 건 아니긴 했다.
포르말린 냄새만 해도 머리가 아픈데 여긴…….
아, 실수로 심호흡했더니 토할 거 같다…….
“가자!”
하여간, 우리는 해부 실습실을 나와 마차를 타고 경찰서로 향했다.
우리의 리스턴 박사님이 하도 팔다리를 많이 잘라 버린 덕에 마차가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이것도 빨리 새로운 술식을 개발하든 뭘 하든 해서 절단술이 필요한 사람 자체를 줄여야 할 텐데…….
내가 몸이 하나다 보니 여전히 런던에는 리스턴의 일거리가 차고 넘쳤다.
“여어.”
“지, 지원 요청!”
“나 리스턴일세.”
“리스턴! 지명수배자…… 아니, 교수님.”
그렇게 경찰서로 들어가는 동안 잠시 소란이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얼굴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다행히 경찰서랑 엮일 일들이 좀 있었다 보니 이제는 나름 리스턴 얼굴을 아는 경찰들이 있어서 구치소 대신 멀쩡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일전에 매독 걸린 놈, 킬리언도 해결해 주지 않았나?
알고 보니 그놈이 매독만 퍼뜨린 게 아니라 이리저리 돈도 좀 삥땅 쳤던 모양이었다.
썩은 빵을 먹고 매독이 낫는 동시에 감방으로 갔는데, 그 덕에 경찰들 체면이 서서 그런가 아니면 경찰서장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리스턴 얼굴 때문인가는 몰라도 대우가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살인 사건 나는 거 좀 없나?”
거기에 대고 리스턴이 말했다.
경찰서 와서 첫 대사로 내뱉기에 이보다 부적절한 게 있을까 싶긴 한데…….
“그…… 자수하려는 건 아니죠?”
“무슨 소린가! 명예로운 의사에게.”
“살인 운운하시니까……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우리가 방금 죽은 시신을…….”
아니, 아니로군.
더 부적절한 말이 있을 수 있었다.
미친놈이 살인 다음에 시신을 언급해?
“저어기 경찰관님.”
이렇게 되면 하는 수 없었다.
아무래도 동양인의 입장에서 경찰한테 직접 말 거는 것이 참으로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냥 같이 왔다는 사실 만으로 감옥 가긴 싫거든.
“아…… 말하게.”
상대는 여느 영국인이 그러하듯 내 얼굴을 보더니 지독히도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물론 내 옆에 리스턴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이상 선을 넘지는 못했다.
혼자 있었으면…….
말 걸었다는 죄목으로 감방 들어갔을 수도 있었다.
이 시기 영국은…….
진짜로 그래…….
“저희가 검시를 해 드리려고 합니다.”
“검시를……? 예산이 없어서 돈을 줄 수 없을 텐데……?”
검시에 돈을 쓰지 않는 것도 그랬다.
높으신 분이 희생자라면야 얘기가 완전히 달라지겠지만…….
그런 분이 잘못되는 경우는 애초에 거의 없었다.
반대로 그렇지 못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건 적어도 이 시기 런던에서는 그냥 일상다반사였다.
맨날 죽어 나간다니까, 진짜로?
“괜찮습니다. 무료로 해 드릴겁니다.”
“으음.”
무료.
런던에서 무료란 말은 곧 사기를 뜻했다.
당연하게도 경관의 얼굴이 점차 안 좋아지고 있었다.
리스턴이 그때 나섰다.
“대신이라고 하긴 뭣한데, 그 시신을 우리 병원에 두면 해부도 할걸세.”
“아…… 그…… 음.”
무료가 아니라는 얘기를 듣자 얼굴이 좀 풀렸다.
딱히 경찰 얼굴이 풀릴 만한 얘기는 아니었던 거 같지만…….
21세기의 눈으로 보면 안 되었다.
이곳은 19세기.
스스로를 문명인이라 주장하는 야만인들의 시대였다.
“그러죠.”
“좋군.”
“네, 좋네요. 마침 잘된 것이…… 신고가 하나 들어왔습니다. 가시죠.”
“오오.”
구두 계약이 성립됨과 동시에 우리는 살인 현장으로 가게 되었다.
난 분명히 의산데…….
사람 살리기 위해 애쓰고 있는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어 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렇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