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12)
검은 머리 영국 의사-12화(12/505)
12화 아저씨 내 말 좀 들어 봐 [1]
콘돔이라.
콘돔…….
좋은데.
좋기는 한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 시기 사람들이 콘돔을…… 쓰나?’
필요성을 느끼고 있을까?
업턴의 리스터 집안을 떠올려 보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비록 술 파는 퀘이커 교도들이긴 했어도 사생활은 어마무시하게 엄격하지 않았나.
물론 부부끼리도 쓰는 게 콘돔이지만…….
결혼 전에 쓴다……?
‘어우…….’
화형당할 것 같은데.
‘아니, 그래도 이거 대박 아이템인데.’
고작 화형에 물러서기엔 좀 너무 아까운 아이템이었다.
그래, 이건 잘 엮어서 얘기나 해 봐야겠다.
나는 일단 고무를 옆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잠에 들었다.
아침에 날 흔들어 깨운 건 앨프리드, 내 어벙한 선배였다.
“이, 일어나 봐.”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보니 창백한 얼굴의 선배가 눈에 들어왔다.
사실 목소리부터 사정없이 떨려 오는 것이, 심상찮은 일이 발생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얼굴 대신 일단 선배의 손가락부터 봤다.
“아…… 부었네.”
“이거…… 이거 네가 얘기해 준 그대로야! 난 이제 죽을 거야…….”
“잠깐만 있어 봐요. 일단 좀 보게.”
“으아아.”
“아니, 좀 있어 보라고. 봐야 할 거 아니에요.”
“으어.”
“조지프.”
“응.”
지랄하는 선배를 175가 넘는 거구의 조지프에게 맡기고, 나는 손가락을 면밀히 살폈다.
부었다.
확실히…… 이건 염증 반응이었다.
“으악!”
눌렀더니 자지러지게 아파했다.
압통이 있다, 이 얘기였다.
그 말은 곧 안에 염증이 꽉꽉 들어찼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안 좋은데…… 이거.’
당연히 좋지 않았다.
21세기, 아니지, 20세기만 해도 그냥 약국 가서 항생제 들어간 연고 사다가 바르면 대부분 해결될 상처이긴 하지만.
‘아니지. 이거 시체에서…… 음. 주사로 항생제 맞아야 할지도?’
백번 양보해서 항생제 맞으면 바로 해결될 문제라지만.
여기는 먹고 죽을 항생 물질도 없었다.
‘이제부터라도 곰팡이를 키워 봐?’
페니실린이 퍼뜩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지금으로서는 별 의미 없는 생각이었다.
대개의 곰팡이는 유익한 효과를 나타내는 대신 사람을 먹어 치우니까.
“칼 줘 봐요.”
“으응……? 역시 절단이야? 안 돼…… 안 된다고. 검지가 없으면 수술을…….”
“안 자르니까 지랄 말고. 칼 어딨어요.”
“지랄? 지랄이랬니?”
“더 반항하면 더한 욕도 해 줄 테니까 빨리 칼 어딨는지 말해 봐요. 내가 존대를 할 때 잘하라고.”
“어…….”
난 쓸데없는 생각을 멈추고, 칼부터 찾았다.
당연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선배는 집에 칼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 부엌의 위치도 정확히 몰랐다.
요리 따위 해 본 적이 없다나 뭐라나.
그랬을 것 같긴 했다.
이만한 크기의 저택에 살면서 계란 후라이를 직접 해 먹는 철부지 소년은 좀…… 이상향에서나 존재할 것 같잖아?
“좋아.”
말로는 좋다고 했지만 좋지 않았다.
기껏 찾아낸 부엌도 그리 깨끗하지만은 않아서 그랬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커다란 솥이었는데, 무언가 괴상한 것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아, 이건 스튜예요.”
“스튜요?”
스튜.
익숙한 이름이지만 동시에 낯선 음식이었다.
들어는 봤는데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는 그런 음식이랄까?
허나 단언컨대 21세기에서 먹어 본 스튜는 저런 게 아닐 것 같았다.
대한민국에서 저런 거 돈 받고 팔았다가는 경찰이 아니라 손님한테 죽을걸.
“그래요. 으음. 일단 좀 떨어질까.”
나는 지옥으로 가는 길에 있는 강처럼 생긴 음식으로부터 선배와 조지프를 떼어 놓고자 살짝 안쪽으로 피신했다.
그다음에 물을 끓이라고 일렀다.
보아하니 행주고 뭐고 다 썩은 것 같아서, 그나마 최근에 마련한 것 같은 천 쪼가리를 삶으라고 했다.
거즈는커녕 닦아 낼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니 궁여지책을 마련한 것이라고 보면 되었다.
“칼 있습니다.”
“아……. 이거…… 닦아야죠.”
“아, 네네. 하긴 음식물이랑 섞이면 맛이…….”
“제가 선배를 요리할 건 아니니까요.”
“그럼 굳이 닦아야 될까요?”
“제가…… 제가 닦겠습니다.”
하인인지 직원인지 모를 사람이 들고 온 칼은 깨끗하지 못했다.
아니, 더러웠다.
‘이 새끼들아…… 이러다 다 죽어…….’
식중독이라는 개념이 없나.
아, 없겠구나.
얼마 전에 런던에서 콜레라가 돌았다고 했지.
엄청 죽었다고 들었다.
싸는 족족 물을 채워 줘야 하는데, 그걸 지금은 모르니까.
망할 놈들.
북북.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끓인 물에 칼을 넣고 박박 문질러 닦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칼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마음이 푸근해졌다.
쌓였던 한이 풀려 나가는 느낌이랄까.
언제부터 쌓였던 한이냐고?
리스턴 박사님의 그 괴상한 칼을 봤을 때부터 가슴 한구석이 꽉 막혀 있었다.
“좋아.”
이번엔 진짜 좋았다.
깨끗한 칼, 그리고 조지프에게 붙들린 채 겁먹은 얼굴로 날 보고 있는 선배.
아니지.
겁먹은 선배는 안 좋지.
마취제가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그럼…… 어제 만든 알코올로 손을 좀 닦을게요.”
“으…….”
“아파요?”
“아프지!”
“네. 참아야죠, 뭐.”
“야.”
야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나라고 댁 아픈 게 좋지는 않다고.
안 아파해야 부담 없이 죽죽 가르지.
“음.”
하여간 나는 알코올로 선배의 손가락을 닦고, 안쪽 상처를 살펴보았다.
핀셋 같은 게 있으면 참 좋겠는데 그런 게 없어서, 소독한 포크 끝으로 살을 들어 젖혔다.
사이코패스 같은 말이긴 한데, 생각만큼 이상한 광경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꽤 잘 보였다.
‘아이 씨…… 근육 색이…….’
본래 근육은 선홍빛을 띠어야 했다.
허나 내 눈앞에 놓인 선배의 손가락 근육 색은 연분홍이었다.
이쁜 분홍이 아니라 꽃이 지기 전에 보이곤 하는 창백한 분홍이었다.
곧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그런 분홍.
“응?”
“냄새나죠? 안쪽이 살짝 썩었어요.”
“안 돼…… 주여…….”
“안 될 건 없지만 기도는 하세요. 혹시 모르니까.”
“너…….”
고름이 찬 게 분명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양이 그리 많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생각해 보니까…… 어제 그냥 겉에만 소독할 게 아니라…… 안을 헤집었어야 했는데.’
병원에 있을 땐 이런 상처를 본 적이 없었다.
시신 만지다가 다친 상처라니.
그건 병원이 아니라 일단 경찰서부터 보내야 하지 않겠나.
그것도 썩은 시신이라면 경찰서에서도 난감해할 것 같은데.
“아파요.”
“나도 알아!”
“아니, 더 아플 거라고.”
“뭐? 으, 으아!”
하여간 나는 부은 부위 주변을 칼로 툭 하고 쨌다.
그러자 피와 함께 누런 고름이 섞여 주변으로 흘러나왔다.
냄새가 별로 좋지 못했다.
혐기성 세균이 그새 자라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무슨 균일까 하는 추론은 의미가 없었다.
별의별 게 다 자라고 있겠지.
“으……으!”
“뭐 해요! 못 움직이게 다들 잡아서 눌러!”
하인들은 요리하는 공간이 별안간 살벌한 공간이 되어 버린 것에 놀라 주춤거리다가, 내 일갈에 황급히 다가와선 주인을 눌렀다.
“너, 너!”
“수술하는 거 봤죠? 원래 이래요. 당황하지 말고 눌러.”
앨프리드는 몇몇 하인들에게 배신감 느낀다는 눈빛을 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하필 외과 의사를 하고 싶다는 도련님 때문에 광장에서 벌써 몇 번이나 살해 현장을 아니, 수술 현장을 봤거든.
그때 본 거에 비하면 뭐 이건 별것도 아니었다.
고작해야 손가락 아닌가.
물론 느껴지는 통증은 별 차이 없을 것 같았다.
지이익-
우리 뇌가 수용 가능한 고통에는 한계가 있거든.
물론 걱정과는 별개로, 내 손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비록 핀셋과 메스 대신 포크와 부엌칼을 쥐고 있는 상황이긴 해도, 외과 의사 짬밥이 어디 가는 건 아니라 벌써 익숙해졌다.
“으아아아!”
“아파요, 아파.”
“이 개새끼가!”
“아픈 거 알아요오.”
선배의 비명을 배경음 삼아, 나는 상처를 더 열고 안에 있던 고름을 죄다 빼냈다.
그러곤 알코올로 열린 상처를 박박 닦았다.
어느 것 하나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 처치가 없었다.
이 정도면 역사에 존재했던 그 어떤 고문보다도 더 효율적인 고문 아닐까.
“으아…….”
하여간 나는 한 10분 정도 만에 처치를 끝냈다.
아까까지만 해도 누런 고름이 흘러나오던 상처에서는 이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
끔찍한 광경이라고 느끼겠지만.
썩은 상처를 후빈 외과 의사로서는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뭐가 되었건, 이제 죽은 건 다 제거가 된 거니까.
칼끝에 갈려 나온 것들이 다 썩은 살이거든.
아마 거기에 균도 적잖게 있었겠지.
“선배, 이거 봐요.”
“……뭘 봐. 너무 아파.”
“이게 선배 살이에요.”
“알아, 나도!”
“썩은 살이에요.”
“응?”
선배는 내 말에 화를 막 내다가, 썩은 살이라고 하니까 정신을 차리고는 칼끝을 바라보았다.
“절단 수술을 할 때 봤겠지만…… 원래 근육은 선홍빛이에요. 큰 근육은 좀 더 색이 진한데, 이건 작은 근육이니까.”
“음. 근데 이건…….”
“근육이 죽으면 이런 색이 돼요. 냄새도 맡아 봐요.”
“썩은 내가 나는데.”
“고름이랑 섞여서 그래요.”
“고름은 왜 생긴 건데?”
의사를 꿈꾸는 양반이라 그런가, 아픔도 잊고 되게 학구적이었다.
나도 오랜만에 학생과 마주한 느낌이 들어서 생각 없이 말했다.
“백혈구가 세균하고 싸우다 죽은 사체의 모임이 고름이죠.”
“응?”
“아.”
동시에 나는 의문에 찬 여러 눈동자와 마주할 수 있었다.
‘이렇게 화형인가.’
다시 태어나 이토록 당황스러웠던 적이 있을까?
없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가, 머리가 팽팽 돌았다.
“조선에서 쓰는 말인데…… 하하. 제가 실수했네요.”
“조선말이 되게 영어 같네?”
“어, 뭐. 사람 말이 다 그렇지.”
나는 조지프의 말에 대강 둘러대며 말을 이었다.
“이 나쁜 기운이…… 들어오면 우리도 보호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가?”
“그렇죠. 일단 피부가 그 기운을 막아 주는 거예요. 그래서 상처 안 나면 안 죽잖아요.”
“아.”
“그다음, 피부 안에도 이걸 막는 무언가가 있는 거예요. 싸움에서 지거나 하면 이 노란 고름이 생기는 거고요.”
“아아.”
쉽지는 않았다.
눈높이 교육이 쉬울 리가 없지 않나.
망할.
“뭐, 저희도 정확하지는 않아요. 그냥 조선에서는 이렇게 생각한다, 뭐 이런 거죠.”
“조선 사람들은 생각이 되게 깊구나.”
“그렇죠.”
거짓말은 아닐 터였다.
성리학의 고수들이 엄청 많을 테니까.
생각이 깊지 않을까?
그럴 거야 아마도.
“아무튼, 이거 이제 이대로 열어 둡시다.”
“열어 놔? 붕대 안 감고?”
“붕대…….”
선배는 어느 틈엔가 챙겨 온 붕대를 들이밀었다.
만든 지 좀 된 것 같았다.
쉰내가 났다.
붕대에서 쉰내가 난다고.
“아뇨. 큰 상처도 아닌데…… 일단은 열어 두죠.”
나는 그 말을 하면서 부엌에 달린 창문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여기 혹시 지구가 아닌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