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122)
검은 머리 영국 의사-122화(122/505)
122화 정식으로 의사 [1]
왕족의 위력이란 이러한 것인가.
빅토리아 공주는 그날 있었던 일이 엄청 인상 깊었었는지, 내 위치를 물어 왔던 모양이었다.
원장은 눈치 빠른 사람인 만큼, 그때 일단 정식 닥터라고 답을 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원장과 리스턴 박사를 포함해 우리 병원의 중추들 앞에 서게 되었다.
“자…… 정식으로 인터뷰를 진행할 겁니다.”
원장님은 약간 지위는 높은데 심성은 별로 좋지 못한 사람처럼 웃으며 입을 열었다.
벌써 뭔가 이야기가 이루어진 건지, 평소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
그러니까 토마스나 제멜 그리고 기타 등등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허나 왕족을 거들먹거렸을 텐데 여기서 지가 뭐라고 입을 털겠나.
그저 어금니 꽉 깨물고 있을 뿐이었다.
“리스턴 박사?”
“네. 닥터 평의 재능은 저 이상입니다. 이미 쌓은 지식도 많고 임상적인 능력도 대단합니다. 무엇보다 어제 봤을 텐데, 강의 능력 또한 출중합니다. 그냥 의사가 아니라 교수 자리를 줘야 합니다.”
“과연 그렇군.”
이게…….
이미 의과 대학 커리큘럼이 완전히 자리 잡은 곳이었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사실이 그렇지 않나.
어?
좀 잘한다고 학생을 의사에 교수로 만들어 준다고?
말이 안 된다고 보면 되는데…….
다행히 이 시기 유럽 의과 대학은 개판이었다.
인맥으로 돌아가는 것도 모자라 교수 자리도 알음알음 주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인맥과 알음알음의 끝판왕인 왕족을 잠시나마 또 어설프게나마 등에 업은 상황이었다.
‘뭐…… 사실 그거 아니더라도 좀 있으면 될 거 같긴 했지.’
리스턴 박사와 블런델이 그렇게 밀어주는데 안 해 주겠어?
특히 리스턴 박사는 요새 버는 돈이 너무 많다 보니, 병원이 자연스레 을이었다.
맨날 전보 오고 하는 내용이 스카우트 관련이더라고.
심지어 프랑스에서도 왔다.
파리에서도 팔다리 좀 잘라 달라 이건데…….
“블런델 박사?”
“임상적인 능력만 출중한 것이 아닙니다. 발상의 전환에 따른 기발한 아이디어가 넘칩니다. 가령 죽음을 판정하는 기술도…… 이번에 받아 보셨죠?”
“청진기?”
“네.”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낫더군. 죽음을 판정하는 거 외에도 쓰일 수 있을 거 같아.”
“그럼요. 그 외에도…….”
“그래, 최고의 인재다, 이거지?”
블런델은 리스턴에 비하면 좀 처지는 사람이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최근의 일일 뿐, 이 사람 또한 런던에서 알아주는 산부인과 의사였다.
아마 내게 좀 더 배우다 보면 더 나아질 것이고.
“자, 나머지 뭐 다른 의견 있어요?”
원장은 이 둘에게만 상세 의견을 묻고는 이내 지겹다는 표정과 함께 다른 이들을 둘러보았다.
완전히 들러리로 세웠다 이건데, 불만을 가질 수는 있을지언정 표하는 이는 없었다.
그만큼 이 대영제국의 왕족과 귀족들의 입김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새끼들…….’
물론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빅토리아 공주와 총리의 지엄한 명에 따라 나는 런던 왕립오페라에서 정기적으로 해부학 실습을 해야만 했다.
아니, 실습이라기보다는 강의가 될 텐데…….
-신기한 걸 좀 많이 봤으면 합니다.
순수한 흥미 위주의 요청을 받았더랬다.
이게 참 21세기 기준으로 생각하면 이상한 일인데…….
해부 예술이라는 용어도 존재하는 데다가, 심지어 전시회도 열리는 세상이니만큼 그들에게는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하여간, 나는 그렇게 요식행위에 불과한 인터뷰 끝에 원장의 부름을 받을 수 있었다.
“자, 그럼 만장일치로 우리 닥터 평에게 의사로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겠습니다. 이쪽으로.”
“네, 원장님.”
“내 빠른 시일 내에 이런 일이 있을 거 같긴 했는데 하하 이렇게 빠를 줄이야. 뭐 잘된 일이지. 안 그래도 리스턴 박사 혼자 사지 절단술을 감당하기엔 어려움이 있었거든. 정식으로 교수가 되었으니, 응? 이제라도 팍팍 자르게.”
“아…… 네. 근데 저는 좀 길이 달라서…….”
“하하하하! 원대로 하게. 다만 환자를 많이 보긴 해야 하네. 알았지?”
“네, 원장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아니, 아니지. 그냥 해부만 해도 되네. 후원금이…… 응. 응.”
“네, 원장님.”
중간에 좀 섬뜩한 말이 있기는 했지만, 다행히 원장은 다른 이들보다도 더 왕족과 귀족들의 입김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보니 결국에는 온전한 말로 돌아왔다.
동시에 가운을 받았다.
원래도 야매로 이케 구해 가지고 입고 있긴 했는데, 이 가운에는 나름대로 내 이름도 적혀 있었다.
원래 이름이 김태평인데 평만 있는 게 좀 이상하긴 하지만…….
‘할 거면 킴이라고 하지…… 왜…….’
조선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 아니냐.
하여간 섬나라 놈들 이거 어?
남의 문화에 관심 없는 거 진짜 너무 종특이야.
“오…… 평 교수님.”
“평 교수님.”
그렇게 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와 보니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평교수, 평교수 하니까 뭔가 좀 지위가 낮아 보이잖아.
물론 지금은 평교수가 맞긴 하다만…….
어?
나도 언젠가는 보직도 받고 할 텐데…….
“이제 진짜 교수구나.”
“하긴 네가 교수 안 되는 게 더 이상하긴 해.”
“교수님.”
물론 굳이 나쁜 점을 콕 집어다 말해서 그런 것이지, 실제로는 기분이 퍽 좋았다.
친구, 선배 그리고 부하에게 교수 소리 듣는 게 어찌 기분이 나쁠 수 있겠어.
“닥터 평. 교수가 되었으니 기념으로 연구실도 가 보지 그러나.”
“아…….”
연구실!
생각해 보니까 나 전생에서도 온전한 나만의 연구실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임용되자마자 죽어 버려 가지고…….
그전까지는 창문도 없는 이상한 방에 펠로우 네 명이서 우겨 지냈단 말이지…….
그 전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가 보죠.”
전생보다 어찌 보면 사회적으로 더 성공한 게 아닌가 싶은 느낌마저 들었다.
한껏 기분이 들뜬 나는 허허 웃으며 내 연구실로 향했다.
나름 원장님이 배려를 했는지 내 연구실은 리스턴 박사와 블런델 교수님 사이에 놓여 있었다.
그래, 아무래도 아는 사람들하고 부대끼는 게 편하지.
덜커덕.
하고 문을 열었더니, 안이 비어 있지 않았다.
“응?”
“아, 교수님 짐이 안 빠졌구만.”
“교수님이요?”
“어어. 돌아가셔 가지고. 하하.”
“어떤……?”
“좀 이상한 사람인데. 남들이 싫어하는 수술을 열심히 하던, 그런 분이시지.”
“싫어……?”
나는 그 말을 중얼거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돌아가신 분이 쓰시던 연구실을 물려받았다니 기분이 좀 묘하기도 해서 약간은 감상에 젖은 눈을 하고서였다.
허나 보다 보니 아직 묘한 기분을 느끼기엔 좀 너무 성급했단 생각이 들었다.
“이게 뭐죠?”
나는 새 부리같이 생긴 것을 집어 들었다.
어디서 본 거 같긴 한데, 그게 아니었으면 해서 물은 거다.
“아, 그게 아마 항문 벌림개일걸세.”
“아.”
아, 맞구나.
달리 말하면 직장경인데…….
생각보다 저거 쓸 일이 많았다.
아마 이 시기에는 더더욱 그렇긴 했을 터였다.
어차피 대장은 보고 싶어도 못 보니까 여길 봐서 여러 가지를 유추해야 했을 터였다.
“이 교수님이 치질이랑 전립선 비대증을 주로 보셨네. 이게 참…… 어? 참 중요한 질환이고 한데 의사들이 외면하기 십상인 질환 아닌가. 정말 훌륭한 분이야.”
“아…….”
그랬군.
치질과 전립선 비대증이라…….
사실 학문적으로만 따져 보면 전혀, 그야말로 전혀 연관이 없는 질환이긴 했다.
하나는 외과 하나는 비뇨기과에서 보고 있지 않나.
아예 계통이 다르다 이 말인데, 이 시기는 그러한 분류가 명확지 않다 보니 그냥 아랫도리는 하나로 퉁쳐서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남들이 기피하는 걸 모아 놨더니 하필 이렇게 되었을 수도 있고…….
“다 버리진 말게. 어쩌면 아주 중요한 자료가 있을 수도 있어. 이럴 게 아니라 나도 좀 봐야겠군그래.”
“아, 나도. 아무래도 내 환자 중에 치질을 앓는 환자가 너무 많아서 말이지. 이전엔 이 교수님께 보내면 되었는데 그게 안 되니 까다롭게 되었네.”
꽤 평판이 좋았던 분인지 리스턴 박사와 블런델은 연신 칭찬을 해 대고 있었다.
뭐…….
실제로 저 두 질환을 이 시기에 주로 했다면 인격 하나는 끝내주지 않았을까 싶었다.
물론 실제로 사람을 살리는 데 일조를 했는가 여부를 따진다면 아예 다른 얘기가 될 거 같긴 한데…….
똑똑똑.
그렇게 안에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면서, 애초에 짐도 없는 편이다 보니 은근슬쩍 뭉개고 앉을까 하고 있으려니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네.”
“원장일세.”
원장이었다.
“어떤가?”
그는 두 손을 슥슥 비비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딱 눈을 보고 나서 알았다.
‘이 새끼…… 그냥 날 배려해서 여길 준 게 아니로구나.’
치질도 그렇고 전립선 비대증도 그렇고 엄청 흔한 질환이지 않나?
특히 치질 같은 경우엔 얼마나 흔한 질환이냐면,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단일 수술 건수 2위에 빛나는 질환이었다.
두 발로 걷는 짐승인 이상 치질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가 어려워서 그랬다.
이른바 숙명 같은 질환이라 이건데…….
그거 보던 의사가, 실제로 얼마나 환자에게 도움이 되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라졌으니 얼마나 병원 입장에서 안타깝겠나.
“우리 닥터 평의 재능을 내가 믿는 거 알고 있겠지?”
“네, 뭐.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래. 아직 제대로 된 분야를 정하지 않기도 했고?”
“네네.”
“그럼 이…… 치질과 전립선 비대증에 대한 치료도 한번 고려를 해 보는 것이 어떻겠나? 우연이라곤 공교롭지 않나? 딱 어제 가셨다네.”
“하…… 그렇군요?”
하필 가셔도 어제 가셨다니.
어쩐지 오래 비워 둔 거 같지가 않다 싶었다.
먼지도 없고…….
심지어 책상 위에 있는 책이나 노트도 펼쳐져 있는 그대로였다.
자세히 보니 노트엔 날짜가 쓰여 있었는데, 잡힌 수술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옆에는 간단한 그림도 있었는데 딱 보니 치질 그림이었다.
‘와…… 이건 아픈 걸 떠나서, 그냥 두면 죽겠는데……?’
치질로 사람이 죽나 싶겠지만.
실제로 죽기도 했다.
피가 막 나면…….
어쩌겠어.
심지어 상처가 있는데 대변이 나오다 보면 감염에도 취약해지지 않겠나.
패혈증으로 죽기도 했다.
나는 애써 끔찍한 그림에서 눈을 뗀 후, 원장을 바라보았다.
원장은 여전히 나만 보고 있었다.
“당장 뭘 하라는 건 아니고…… 여기 연구 자료들을 좀 보게. 혹 연습 상대가 필요하면 말하고. 뭐…… 이런 말을 공개적으로 하기는 좀 그렇지만, 이곳 런던에는 돈만 주면 실험체가 되어 줄 만한 사람이 아주 많다네.”
그러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끔찍한 말을 해 댔다.
더 끔찍한 건 저 말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란 얘기였다.
실제로 이 시기 런던에서 사람의 생명은 충분히 돈으로 거래가 가능했으니까.
심지어 정당한 돈을 지불했다면 경찰에서도 달리 문제 삼지 않는 편이었다.
“아…… 네. 일단 여기 자료부터 보겠습니다.”
물론 난 딱히 연습이 필요치는 않았다.
다만 시기의 한계가 있다 보니 참고할 자료가 필요할 뿐이었다.
영 아니다 싶으면 되는대로 기구도 만들고 해야 할 텐데, 그래도 누군가의 평생이 담긴 자료를 보면 도움이 되지 않겠나.
‘교수도 되었겠다…… 나도 팔다리 자르기 싫으면 캐시 카우 될 만한 수술 하나는 만들어 놔야겠지.’
참고로 치질 수술은 수술 건수에 힘입어 매출 면에서는 외과의 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 나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외과 의사는 치질 수술의 달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