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129)
검은 머리 영국 의사-129화(129/505)
129화 멈춰 [5]
나는 연구실로 돌아왔다.
이전 교수의 연구 자료들이 그득한 곳으로.
보고 있자니 짜증이 나서 일단 좀 치웠다.
저장 강박이라도 있었는지 뭔지 뭐가 엄청 많아서 치우는 데만도 오래 걸렸다.
“흐음.”
그렇다고 무턱대고 다 버리기는 좀 그래서 일단 기구들은 남겨 두었다.
전립선 비대증과 치질 치료에 쓴 기구들인데…….
딱히 이대로 쓸 생각은 없었다.
이대로 쓰면 기껏해야 교수 열화판이나 되지 않겠나?
해서 나는 일단 그림부터 그렸다.
“전립선이야?”
“어.”
“근데…… 너무 상세하게 그리니까 보기가 좀 그렇네…….”
내 그림을 보던 조지프가 인상을 썼다.
거세당한 할아버지도 잘만 보고 있던 주제에 고작 그림에 인상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내 그림이 뛰어나다는 증명 같아서 어깨를 조금 으쓱해 보였다.
“자, 일단…… 일직선으로 집어넣을 때의 단점을 생각해 보자고.”
물론 그렇게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나는 그림에 대고 교수님의 도구를 움직여 보았다.
“아으.”
“하, 하지 마.”
“교수님…….”
그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는지 셋 다 신음을 흘렸다.
예민한 부분이니만큼 공감 능력이 미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도 괴롭긴 매한가지였다.
왜냐?
한번 과로하다가 쓰러져서…….
소변줄 꼽은 적이 있거든.
말하자면 이놈들에게 이 고통이 상상이라면 내게는 회상이다 이 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관둘 수는 없었다.
‘그 망할 수술이…….’
거세.
고환 제거술…….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 악마의 수술이 뭐가 되었건 간에 전립선 비대증에 효과가 있을 수밖에 없어서 그랬다.
남성 호르몬의 영향으로 점점 더 커져만 가고 있는 전립선에 남성 호르몬의 공급이 뚝 끊기게 되면 어찌 되겠나.
일단 더 악화되는 일은 없을 터였다.
거기에 더해 아마도 완화도 될 거 같았다.
‘그 망할 수술을…… 이겨 내야 된다 이건데…….’
쉽지 않았다.
일단 지금 여기 있는 기구들로는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아니, 뭐 누구 죽이는 데 쓰면 이길 수도 있을 거 같긴 한데…….
“여기 끝이 뾰족하지 않고…… 좀 뭉툭하면 어떨까.”
“그래도 아프지 않을까?”
“아프지…….”
“이건 아플 거 같은데요.”
“마취하고 쑤실 거야. 통증은 관계없어. 실질적인 손상이 있냐 없냐, 이것만 고려해야 해.”
제자들, 그러니까 내 친구들의 반응은 굉장히 애매했다.
괜찮았다.
어차피 지금 내가 떠드는 건, 떠들면서 스스로 답을 찾기 위함이니까.
예전에 우리 교수님이 이랬었는데 미친놈 같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해 보면 꽤나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래…… 폴리도 그렇고…… 내시경들도 그렇고 다 끝은 동그래.’
말을 하다 보니 과연 이전 기억들이 물밀듯 튀어나오고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친한 친구 중에 비뇨기과 녀석이 없었다는 점이고 그래서라고 하기는 좀 뭣한데 하여간, 전립선 비대증 수술을 본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하다못해 교과서라도 정독해 본 경험이 있다면 모르겠는데…….
비뇨기과는 완전 마이너 중에서도 마이너 과다 보니, 학생 때보다는 정작 레지던트가 되고 나서야 뭘 배우는 과다 보니 관련 지식이 진짜 얄팍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걸 이렇게 만들고.’
나는 내 생각의 흐름대로 뾰족했던 기구를 동그랗다고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러곤 다시금 움직여 봤는데, 이제 다른 문제가 생겼다.
이래서는 절대 전립선을 제거할 수가 없다는 문제였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면서 효과를 없앤다는 느낌…….
‘아. 이비인후과에서 데브라이더(Debrider, 회전식 칼날 흡입기)를 쓰지?”
내시경 비슷한 기구라면 나도 외과다 보니 지겹도록 사용하긴 했더랬다.
복강경이 모든 수술의 대세로 떠오른 지 꽤 되지 않았나?
젊은 외과 의사라면 누구나 많이 다룰 수밖에 없었다.
다만 지금은 딱히 도움이 되질 않았다.
복강은…….
가스로 채워서 수술해 보면 생각보다 안이 넓었다.
그래서 기구도 그 넓은 곳을 카메라로 들여다보면서 이런저런 조작을 할 수 있게끔, 그러니까 꽤 복잡한 형태로 발전해 버렸다.
때문에 나는 내 절친이었던 이비인후과 친구가 했던 수술을 떠올렸다.
‘좀 자세히 볼걸. 밥 먹으러 가자고 하지 말고…….’
새끼가 밥때만 되면 이상하게 수술을 지연시키는 바람에 가서 보챘던 기억부터 났다.
물론 난 기본적으로 외과 의사고 또 그 이전에 의학도다 보니 아예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식으로만 있진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남아 있는 지식이 있다, 이 말이었다.
“여기…… 이 기구를 뭉툭하게 만들면 안전해지겠지.”
“근데 뾰족해야 구멍이 뚫리는 거 아냐? 여기가 이렇게 막히는 병이 전립선 비대증이잖아.”
“그래, 맞지. 그렇다면…… 이렇게 뭉툭하게 만들고, 여기에 이빨을 달면 어때?”
“이빨……?”
내 말에 친구들은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이 되었다.
설마하니 뭐 마법으로 이빨을 달려나? 뭐 이런 얼굴이었다.
“자, 이렇게.”
당연히 그런 건 아니었다.
이게 지금 기술로 가능할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대장장이들의 야금 기술은 꽤 대단하지 않던가?
대량 생산이야 어렵겠지만 수제작으로 하나둘 만드는 건 될 거 같았다.
“바깥 원통과 안에 원통을 따로 만드는 거야. 그리고 바깥 원통에 작은 구멍을 내, 옆으로. 그다음에 이 날카로운 이빨이 달린 안쪽 원통을 왔다 갔다 하면…….”
“갉아 먹는구나. 오…….”
“오호.”
“이것…… 대단한데요?”
얘들이 기본 지식이 없어서 그렇지 머리가 나쁜 애들은 아니지 않나.
내가 그림만으로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이해를 해 나가고 있었다.
벌커덕.
그리고 그때 리스턴 박사가 들어왔다.
보아하니 팔이나 다리 하나쯤 자르고 온 모양이었다.
얼굴에 엷은 핏자국이 튀어 있었다.
“음, 이게 뭔가?”
그는 언제나 그렇듯 내 그림에 관심을 보였다.
천재, 천재 하는 것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나는 그의 핏자국…….
아니, 그의 열망 가득해 보이는 눈망울을 보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흐음.”
그러자 그는 꽤 흥미로워하면서도 코 밑을 손가락으로 슥 훑었다.
내가 이런 걸 대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뭔가 아이디어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저럴 때 꼭 뭔 소리를 하더라고.
“평.”
“네.”
아무래도 기반 지식이 부족하다 보니 대부분 개소리였지만…….
뭐가 되었건 리스턴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지 않나?
이 양반이 21세기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면 진짜 뭐라도 했을 게 분명했다.
“이게 꼭 일직선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나?”
아무튼, 개소리를 한다고 해도 경청해야 하는 사람이기에 나는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질문이 뭔가 머리통을 후려치는 듯한 느낌이 일었다.
“어……?”
“자네 이 이빨이라는 발상. 아주 좋단 말이야. 안전하면서 동시에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는 더 제거할 수 있을 거 같아. 자 보라고.”
리스턴은 일단 일직선으로 이루어진 교수님 기구를 이용해 내 그림 주변을 푹푹 찔렀다.
일직선으로만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라 조금의 변주를 주었다는 건데…….
그렇게 하니까 확실히 전립선 주변을 좀 더 제거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오.”
“근데 이거…… 여기를 구부려 보세나.”
“구부려? 힉.”
리스턴은 실제로 기구를 구부렸다.
이게 철인데…….
그냥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구부릴 수 있는 건가.
그렇게 놀라고 있을 틈도 없었다.
리스턴이 다시 그 기울어진 기구를 가지고 전립선 그림 근처에 대고 왔다 갔다 하는 순간 유레카란 단어가 들려와서 그랬다.
“이거…….”
“그래, 이렇게 하면 더 많이 제거할 수 있지 않겠나?”
“확실히 그래요. 문제는…….”
“이렇게 구부린 상태에서는 이게 그냥 원통이면 왔다 갔다 하지 않겠지. 그거야 만들 놈이 알아서 할 일 아니겠나.”
그…….
의뢰하는 사람 입장에서 그렇게 대충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리스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리스턴은 껄껄 웃었다.
여전히 피가 묻어 있어서 웃어도 무서웠다.
“걱정 말게. 내가 의뢰하면 다 해 준다네.”
“그야…….”
그렇지.
리스턴이 같이 가 준다면,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다름없지 않겠나.
해서 우리는 곧장 대장장이에게 찾아갔다.
하루 종일 일이 워낙 많았기 때문일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내일 올까요?”
“응? 무슨 소리야. 위에 불 들어와 있잖아.”
“그…… 퇴근…….”
쾅.
리스턴은 문이 닫혀 있다면 부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뭔지 주먹으로 문을 후려쳤다.
“뭐, 뭐야!”
그와 동시에 위층에서 비명 비슷한 것이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겁에 질린 대장장이가 문을 살짝 열었다.
“워워.”
안을 보니 망치를 쥐고 있어서 일단 안심을 시켰다.
아니, 그 전에 일단 리스턴에게 망치를 빼앗겼다.
“히익.”
“히익은 무슨. 나 자네 노모 살려 준 사람일세. 얼굴 알잖아.”
“알긴 아는데…… 무슨 일입니까? 그때 돈은 다 드린 거 같은데…….”
“아, 뭐 수금하러 온 건 아니고. 자, 이것 좀 만들어 보게.”
리스턴은 그렇게 안으로 밀고 들어가서 의자에 털썩 앉고는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 위에는 개발새발 그린 그림이 있었다.
대장장이 얼굴에 의문이 뜬 것도 이상할 거 없는 일이었다.
“이게 뭐…….”
“아. 이런 건데요.”
해서 내가 나섰다.
우선 교수님의 물품을 보여 주었다.
그랬더니 대장장이가 반가워했다.
“아, 이거. 제가 만든 건데.”
“그렇습니까? 자, 이걸 이제 좀 개량하려고 합니다.”
“왜요?”
“수술 더 잘하려고요.”
“듣자니 해리라는 사람이 전립선 비대증 수술 기깔나게 한다던데.”
“그거…… 대체 어디서 들었……습니까?”
“뭐…….”
대장장이는 눈치를 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털면 말할 거 같긴 한데, 그러면 기구를 못 만들 것 같았다.
무엇보다 리스턴이 손사래를 쳤다.
“우리 쪽이 아니라, 제이미 경 쪽에서 새어 나갔을 가능성이 더 커. 뭐가 되었건 빨리 만들어야겠구만.”
“네, 그래서 이렇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나는 말을 하면서 약간 공학도에게 꿈과 환상이 가득한 기구 설계도 집어 던지는 문과생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말이 되냔 말이 나와도 한 번쯤 참아야지 했는데, 의외로 대장장이는 껄껄 웃었다.
“이거야 뭐 어려운 일은 아니죠. 여기를 좀 조정하면…… 뭐,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다만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은데…….”
“얼마나요?”
“한 2주? 몇 번 시행착오는 있긴 할 겁니다.”
“아.”
2주라…….
남성 호르몬 뚝 끊긴 채 흘러가는 2주라면…….
아니 일주일만 지나도 효과가 있긴 할 것 같았다.
나는 위기감에 리스턴을 돌아보았다.
“교수님.”
“어, 자경단이라도 꾸리지.”
“자경단이요?”
“뭔가 지키기 위한 모임 아닌가.”
“아.”
“고환 자경대라고 할까.”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