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14)
검은 머리 영국 의사-14화(14/505)
14화 아저씨 내 말 좀 들어 봐 [3]
연회란 무엇인가.
인싸들이 모여서 술 먹고 그러는 거 아닌가?
‘아니다.’
아니지.
이곳은 19세기.
업턴에 있던 시절에도 연회 비슷한 것이 있기는 했다.
아저씨가 그냥 아는 사람 불러다 놓고 얘기나 나누던 파티이긴 했지만.
술을 만들어 팔지만 술을 맛보기 위할 때 말고는 아예 입에도 안 대는 퀘이커 교도이기에 술도 안 줬다.
여긴 다르겠지.
정말 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파티가 열리지 않을까?
“그…… 그런 연회는 아닙니다.”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노라니, 집사가 말했다.
“네?”
머릿속이 읽힌 것 같은 느낌에 집사를 바라보니 그가 말을 이었다.
“보통 연회는 교외에서 열리지 않습니까? 지금이 사실 시즌이죠.”
“아…… 네, 그렇죠.”
어쩐지 여기서 모른다고 하면 좀 그럴 것 같아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 문장에서 아는 정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교외에서 열린다는 거.
그리고 지금이 시즌이라는 거.
연회가 무슨 제철 생선도 아니고, 여는 데 시즌이 있단 말인가.
조지프도 촌놈인 건 매한가지니까 나중에 선배가 고통에서 좀 깨어나면 물어봐야겠다.
“사실 주인님도 12월부터 계속 초청장을 받으시긴 하는데…… 아시다시피 무역업이라는 게 어디 한 곳에 매여 있기가 어려운 일 아닙니까. 아무리 도련님들이 이곳저곳에서 일을 대신하고 있다고는 해도, 마지막엔 주인님의 손길이 닿아야 성사되는 거래도 있으니까요.”
하여간 집사는 꽤 열심히 말을 해 주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 선배가 구라를 쳤거든.
내가 조선에서 아주 응? 잘나가는 사람 아들이라고.
거의 뭐 양반도 아니고 그 위에 어?
“프린스 킴.”
“아.”
그래도 이건 아니지.
프린스 킴이라니.
조선은 이씨 왕조라고.
김씨 왕조는…… 어라.
저기 북쪽에……?
“프린스는 아닙니다. 저희 왕은 이씨입니다.”
“아, 제가 실례했군요. 아무튼, 주인님 사정상 커다란 연회에는 가지 못하십니다. 대신 이곳에서 좀 작게 연회를 열죠. 일반적인 사교 모임과는 약간 다릅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폭탄 발언을 할 땐 언제고, 집사는 말을 하다 말고 저택 한쪽을 바라보았다.
둥근 테이블이 보였다.
그 주변으로는, 저걸 뭐라고 하더라.
아, 그래 그 핑거 푸드? 뭐 이런 것들이 잔뜩 있었다.
맛은 없어 보였다.
이건 중요한 게 아니지만, 저걸 뭐라고 해야 할까…….
“사업 모임이죠.”
“도박…… 모임이 아니고요?”
그렇잖아.
재떨이도 미리 놔 뒀고.
카드 팩이 여러 개 있고.
불도 좀 은은하게 켜 둔 게…….
이런 것도 영화에서 본 장면이긴 했다.
좋은 영화 말고, 나쁜 사람들 많이 나오는 영화.
‘무역업이…… 뭐 좀 이상한 거 하시는 그런 일인가……?’
그러고 보니, 이런 집이 런던에 있다는 것부터가 수상했다.
그렇잖아.
합법적인 일만 해 가지고 어떻게 이렇게까지 돈을 버냐고.
“아, 네. 도박 모임이죠. 굉장히 좋아하십니다. 특히 저 카드 게임을 진짜 좋아하세요.”
“아, 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별개로 집사님은 되게 당당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자부심까지 엿보였다.
그래 뭐…….
사실 법과 도덕 같은 건 전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거 아니겠는가?
19세기에는 집에다 하우스 차리고 모임 갖는 것이 좋은 일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뭐야.
샌드위치도 어떤 귀족이 도박하다가 만들었다지 않았나?
부끄러운 일이었으면 그걸 그렇게 자랑스레 떠벌리진 않았겠지.
“그래서…… 프린스 킴이 오기도 좋을 겁니다.”
“프린스 아니라니까요?”
“그럼 노블 킴이라고 부를까요?”
“음.”
노블이라.
내가 알기론,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다 인도양을 건너면서 성이 생긴 걸로 아는데.
“그래요. 그렇게 불러 주면 됩니다.”
“네, 노블 킴.”
그래도 뭐, 어쩌겠나.
그렇게 불러 준다는 데 굳이 구구절절 얘기할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싹 다 구라니까.
“하여간…… 모임은 굉장히 조용할 겁니다. 주로 사업적인 얘기가 오갈 거라…… 지루하실 수도 있는데, 그래도 오셔서 말을 섞어 주시면 다들 즐거워할 겁니다. 모두 무역업을 하는 분들이다 보니 동양인에 대한 편견도 적은 편이에요.”
“아하. 네, 감사합니다. 그럼 언제쯤…… 준비해서 나오면 되죠?”
“저희가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네네.”
그렇게 집사가 물러갔고, 선배는 그 후로도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렇게 아파요?”
물으면서도 좀 미안했다.
아플 테니까.
동시에 궁금했다.
대체 얼마나 아플까?
마취도 없이 칼로 손가락을 후비면.
“개새꺄…….”
욕이 나올 정도구나.
그래, 그럴 수 있지.
나는 겸허한 마음으로 선배의 욕을 수용하기로 했다.
“그래도 욕을 해요?”
조지프는 그렇지 않았는지 따져 물었지만, 내가 말렸다.
“칼질하면 욕해야지. 아무렴.”
나도 누가 나한테 마취도 없이 수술하자고 하면 욕을 할 테니까.
게다가 나는 아주 중요한 얘기를 꺼내야 할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돈을 달라고 해야 했고.
언제고 돈 내는 사람이 갑 아닌가?
때문에 살짝 몸을 낮추고 선배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다리가 벌벌 떨려 오는 것을 보니까 진짜 아프긴 아픈 모양이었다.
“그래도 열은 없네요. 경과는 좋아요.”
“그래……. 그래야지.”
“근데 전에 죽었다는 사람이 가까운 사람이었어요? 왜 이렇게 겁을 내시지?”
“어? 어, 내 친구였어. 그땐 왜 그러나 했지. 근데 지금 보니까…… 그래, 딱 이랬어. 세상에, 시신에 안 좋은 입자가 있었을 줄이야.”
아픈 거랑은 별개로, 시신에 안 좋은 입자가 있을 거라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싶었다.
그냥 딱 봐도 뭔가 그렇지 않나?
본능적으로 무섭잖아.
만지기도 꺼려지고.
이런 게 괜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21세기에 들어 진행된 연구에 의해 명확히 밝혀진 것이긴 한데, 하여간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사실 되게 합리적일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런 얘기를 해 봐야 지금 당장은 별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다른 말로 넘어갔다.
기운이라 했던 걸 이젠 입자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그 입자를 막는 게 좋지 않겠어요?”
“막으면 좋긴 하겠지. 근데 어떻게?”
“그…….”
부엌에서, 그것도 지옥의 솥단지 옆에서 얘기를 이어 나가는 건 좀 그래서, 걸으면서 말을 나눴다.
그러다 보니 부잣집이라 그런가, 복도 옆으로 늘어선 미술품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중에는 중세 기사들이 나오는 그림도 있었다.
“그래, 저거요. 저거. 저 장갑.”
“장갑?”
“저기 철로 된 거. 손에 착용한 거요.”
“아, 장갑. 그래. 장갑…… 음. 근데 저런 걸 끼고 어떻게 해부를 해?”
저걸로는 못 하지 인마.
시신이랑 전쟁할 일이라도 있냐.
그때 옆에서 나란히 걷던, 꽤 좋은 체격으로 인해 사실상 혼자 선배를 부축하고 있던 조지프가 말했다.
“겨울에 끼는 장갑이면……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아, 가죽 장갑! 그거라면 칼에 베여도 안 뚫리니까 입자에 안 닿게 보호할 수 있겠는데?”
어, 그렇지.
보호는 되겠지.
근데 그거 끼고 제대로 해부가 되겠냐…….
사람 몸이라는 게 얼마나 약한데.
예민하게 칼질해도 망가지기 십상인데, 그런 두꺼운 걸 껴?
게다가 우리는 포르말린도 없이 썩어 가는 시신을 해부해야 하잖아.
더 약하다구…….
“보호는 되겠죠. 보호는 되는데…… 안에 있는 구조물을 느끼면서 째야 하지 않습니까?”
“아, 그건 그래. 내가 사실…… 이래 봬도 해부 좀 하거든? 교수님도 내년부터는 바로 보조의로 나서라고 하셨어.”
“아, 그러시구나.”
근데 어쩌다가 자기 손을 베셨나 그래.
나 아니었으면 바로 뒈졌을 텐데.
그래도 내가 을이니까, 나는 참으로 열과 성을 다해 비위를 맞추었다.
자신 있었다.
교수가 되기 전까지 정말 십수 년을 이렇게 살았으니까.
“그런 분이 하시는 말씀이니 틀림없겠죠. 확실히 해부는 섬세한 작업이다 보니 가죽 장갑은 너무 두꺼워요.”
“그래, 맞아. 음…… 그렇지만 또 보호는 해야 되잖아.”
선배는 자기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보다 보니 또 통증이 되살아나는지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와는 별개로 상처를 살폈는데, 확실히 아프게 째고 씻어 낸 보람이 있었다.
‘죽진 않겠다. 적어도.’
이렇게 하면 죽을 리는 없을 것 같았다.
나도 고생이고 선배도 고생이고, 다 같이 쓸데없는 고생 중이긴 하지만.
하여간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품에 넣고 다니던 것을 살며시 꺼냈다.
고무였다.
“응?”
“이거 보면서…… 생각을 좀 해 봤는데요.”
“응.”
“이걸로 장갑을 만드는 건 어떨까요? 가죽과는 달리 물에도 안 젖고. 좋을 것 같은데.”
“이걸로…… 장갑을? 이걸로?”
선배도 살짝 혹한 얼굴이기는 했다.
하지만 많이 혹하진 않았다.
“이렇게 딱딱한데?”
눈앞의 고무는 우리가 생각하는 고무랑 너무 달랐거든.
갑옷으로 쓰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
하지만 나는 고무가 결국에 어떤 형태로까지 발전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수술 장갑만 떠올릴 때보다 더 커다란 확신에 차 있었다.
진짜 튼튼하고 얇게 만들 수 있다니까?
나는 봤어.
어떻게 만드는지는 모르지만.
그건 공돌이들 갈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얇게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실제로 얇은 고무도 있다면서요.”
“근데 그건…… 너무 말랑말랑해서…… 되게 약하던데.”
“어떤 처리를 하면 되지 않을까요?”
“어떤 처리?”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모르죠. 근데 아버님이 아는 공장이나 과학자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음…… 근데 말이야.”
“네.”
갑자기 선배 얼굴이 진중해졌다.
사상 처음으로 똑똑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이쪽이 당연하긴 할 터였다.
뭐가 되었건 간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사람이니까.
“장갑 이건…… 사업성이 없어. 뭐 하나 개발하려면 엄청난 돈이 들어갈 텐데…… 아버지가 단지 해부 실습의 안전을 위해서 그런 돈을 쓸 것 같진 않아서 말이야.”
“아들인데요?”
“나야 조심하면 되지. 그리고 앞으로도 네가 지켜 주면 되잖아.”
소름 끼치는 소리 하지 말고…….
뭘 지켜 줘.
지켜츄냐?
츄 보고 싶다.
아니, 아니지.
미친 소리 하지 말고…….
“아니, 아니. 사업성이 있는 분야가 있을 거 같기도 해요.”
“무슨 사업성? 장갑은 안 돼.”
막말로 사실 빨래하거나 설거지할 때도 끼면 좋겠지만.
그걸 19세기에 기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면 되었다.
맨손으로 수술하는 놈들한테 그런 위생 관념을 기대하는 건 좀 너무하지.
하여간.
“그…… 피임 말입니다.”
“피임?”
아까 물어보니까 역시나 콘돔이 있긴 있더라고?
근데 그걸 동물 내장을 이용해서 만들고 있었다.
진짜…….
참…….
비위도 좋은 새끼들이야.
“얇은 고무로 콘돔을 만들면 어떨 거 같아요? 이건 훨씬 튼튼하기도 하고, 깨끗할 것 같은데.”
“오……? 빨아 써도 안 망가지고?”
아니, 빨아 쓰지는 말고…….
일회용으로 가자,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