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141)
검은 머리 영국 의사-141화(141/505)
141화 아니, 이게 있었어? [2]
혹시 몰라서 발목 말고 다른 곳도 확인했다.
물론 히포크라테스 시절부터 내려온, 유구한 전통을 가진 방혈법에서 정석은 발목이긴 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발목에서 그렇게들 피를 뽑았더라고?
하지만 발목에서만 뽑았을 리는 없었다.
팔뚝이나 목 심지어 코에서도 뽑았더랬다.
내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제멜이라는 새끼가 하는 걸 봤다고.
‘그 새끼 어제 있었지? 아…… 기억이…… 머리가 멍하네.’
있었지?
있었던 거 같았다.
‘와…… 아편팅크…… 이거 한 모금 먹었다고 이러나.’
명확하진 않았다.
숙취랑은 또 다른 몽환적인 느낌이 머리를 메우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약효가 끝났을 것이 분명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내게 달리 갈망이 없다는 점이었다.
부정적인 신체 증상도 없는 거 같고…….
“휴.”
하여간, 급히 살펴보니 딱히 뭐가 없었다.
적어도 어제 내게 칼을 대진 않았다, 이 말이었다.
“후…… 음?”
그제야 몸 상태가 어제보다 한결 낫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확실히…….
열도 안 나고, 몸도 덜 아프다.
아편의 효과라기보다는 그냥 엄청 잘 자서인 듯했다.
게다가, 나는 이 시기 런던 사람들에 비해 영양 상태가 꽤 뛰어나지 않은가?
기껏해야 긴장과 스트레스로 인해 발생한 감기에 어떻게 될 만한 몸 상태는 아니란 뜻이었다.
‘문제는 이걸 또 아편팅크 덕이라고 지랄할 거라, 이건데…….’
안 봐도 뻔했다.
통계고 이론이고 가설이고 입증 실험이고 다 개나 줘 버린 시대잖아?
아니, 내가 알기로 다른 영역에서는 그래도 나름 실험도 하고 하는 거 같은데 이상하게 의료 영역에서만큼은 경험 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있었다.
“으읏.”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이내 두통이 찾아왔다.
스트레스 호르몬, 곧 코티졸(Cortisol)이 대량 분비되는 느낌이랄까?
심장 박동도 좀 빨라지는 거 같고…….
하아.
“음?”
내 신음에 깬 건지 아니면 그냥 깰 때가 되어서 깬 건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리스턴 박사가 눈을 부릅떴다.
“히익.”
저런 거 어디선가 본 거 같았다.
어디서 봤더라…….
그래.
좀비.
뭔 사람 얼굴이 저렇게 무섭냐.
“오, 깼군?”
얼굴 무서운 거에 비하면 꽤 좋은 사람이다 보니, 그는 내가 정신이 든 것을 확인하자마자 가까이 다가왔다.
그와 동시에 똥내가…….
입 안에서부터 쿰쿰한 냄새가 풍겨 왔지만 그걸 내색할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나중에…… 양치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해야지.’
이상하다.
예전에 내가 ‘시저 3’라고 정말 오래된 게임 했었는데, 그 시절에도 치과라는 게 있었거든?
치료라고 해 봐야 썩은 이 뽑는 것이겠지만…….
하여간 신경을 썼다 이건데, 이때 사람들은 대체 왜 양치도 잘 안 하고 산단 말인가.
“네, 덕분에.”
“아편팅크 덕분이군.”
“아니, 그건…… 그냥 잘 자서 그런 거 같은데…….”
“하하. 이 친구. 자네 자면서 한동안 신음 소리도 내고 헛소리도 했네. 아마 조선 말인 거 같은데…… 하여간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말이야.”
제정신이 아니었겠지!
마약을 먹였으니까!
그것도 열 나는 상황에서…… 술이랑 섞어 가지고!
‘와…… 다시 생각해 보니까 진짜 죽을 수도 있었잖아.’
물론 칼 대는 것보다는 살아날 가능성이 크긴 했을 터였다.
리스턴 이 양반…….
전처럼 칼에 덕지덕지 묻히고 다니진 않지만, 그럼에도 소독을 하진 않고 있잖아?
“어? 아, 다행이다.”
“난 또 어떻게 되는 줄 알고.”
“걱정했습니다, 교수님.”
둘의 대화가 나머지도 깨웠는지 조지프, 앨프리드 그리고 콜린 순으로 다가와 말을 건네 왔다.
행동이야 날 죽이려고 했지만, 마음만은 진심이지 않았겠나.
딱 봐도 그게 느껴져서 나도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아닌 게 아니라, 아픈 것도 나아졌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하, 역시 내 덕이구만! 가벼운 감기에는 이제 방혈보다는 그냥 이 아편팅크가 좋다니까.”
그 훈훈한 모습을 보면서, 블런델이 껄껄 웃기 시작했다.
미친놈…….
상식적으로 의사가 아편을 들이미는 게…….
그게 말이 되냐?
이런 생각이 다시금 떠오르면서 또다시 머리가 아파 오려 했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표정을 관리했다.
-어? 어어!
-아파하는데? 한 모금 더!
-아니, 아니지! 이제야말로 칼 가져와라.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우리 19세기의 용맹한 의사들이 나를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이러니까 귀족들이 사람 아프면 일단 집에서 그냥 관찰했지…….
괜히 사람 불렀다가 비참하게 죽어 나갈 수 있으니까 말이야.
“후.”
“몸이 안 좋나?”
“아, 아뇨. 다 좋아진 거 같습니다.”
“하하! 역시 아편팅크!”
그러는 바람에 뭔가 왜곡된 정보를 아니, 확신을 준 거 같긴 한데…….
어쩔 수가 없었다.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지.
이러다 중독이라도 되면 세상은 위대한 의사 하나를 잃게 되는 셈이라구.
광오한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니까, 이게?
“밥이라도 좀 먹을까요?”
“어어, 그래. 그렇지 않아도 내가 아버지에게 부탁해서 보양식 만들어 달라고 했어.”
“보양식……?”
“어! 보양식!”
보양식이라…….
몸보신이라는 개념을 탑재한 음식이다, 이 말이었다.
사실 이게 과학적으로 보면 어느 정도 맞기도 하고 또 틀리기도 한 면이 있었다.
확실히 영양학적으로 무너진 몸이라면 저 음식 중에 도움이 되는 것들도 있긴 했다.
21세기의 풍요로운 세상에서는 오히려 살만 찌게 만들 뿐인 것이 더 많기는 했지만.
‘지금의 나라면…….’
나는 내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이따금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흔한 노동자들의 팔에 비하면 난 썩 괜찮은 편이었다.
적어도 이 몸이 타고난 수준의 근육은 간직하고 있는 거 같아.
하지만 우람하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괜찮을 거 같네.’
그래.
보양식에 설마 아편 같은 거 넣지는 않겠지?
그게 상식적인 일이니까?
‘여기만큼 상식이 안 통하는 곳이 또 있을까?’
상식을 떠올린 나는 좀 불안해져서 앨프리드 선배에게 물었다.
“혹시 거기 뭐…… 아편 같은 게 들어가진 않죠?”
“어? 아니, 안 들어갈 거야. 원해?”
“아, 아뇨. 아닙니다!”
“원하면 넣고.”
“아닙니다, 제발. 그냥 음식은 음식으로 먹을게요.”
“그래. 그럼. 이게 무려 장어가 들어간다고. 어제 사람 시켜서 직접 잡았어.”
“오.”
장어?
그런 게 있었어?
나도 모르게 군침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장어…… 맛있는 생선이지.’
뼈가 좀 많을 수 있지만…….
살 잘 발라다가 그냥 구워도 맛있고, 소금이라도 뿌리면 장난이 아니잖아.
고추장 양념까지는 욕심이겠지만…….
제아무리 영국이라고 해도 장어는 맛있을 것이 분명했다.
“너 장어 좋아하는구나? 이따금씩 해 줄 걸 그랬네. 몸 약한 줄은 몰랐지.”
“아, 평이가 업턴에서도 몸이 좀 약하긴 했는데…… 런던 와서 더 약해지긴 했어요.”
“도시 생활이 시골 사람들에게는 버거울 수 있지.”
“그러니까요. 저는 괜찮은데…… 저 녀석이 좀 유독 촌스럽나 봐요.”
상당히 억울하고 분한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21세기 런던 놈들이면 내가 또 모르겠는데…….
19세기 놈들이 서울 사람인 나에게 촌놈이라니?
내가 여기 와서 약해진 건 어머님이 해 주시는 음식이 없어져서…….
‘그러고 보니 얼굴 뵌 지가 오래됐네. 이번에 시간 나면 한번 다녀와야지.’
어머니.
비록 내 기억 속 어머니와는 다른 분이지만…….
이제 와 어머니가 아니라 할 수 있을까?
유년기부터 좀 이상했을 나를 오직 사랑과 애정으로 키워 주신 분이었다.
‘그건 그렇고 장어는 언제 오냐.’
나는 둘의 몰상식한 대화에도 화를 내는 대신 일단 기다렸다.
장어라면 다 참아 줄 수 있어서 그랬는데…….
마침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왔나 보다.”
“오.”
“이 자식, 진짜 좋아하네. 내가 아버지한테 말씀드려서, 종종 해 달라고 할게. 이거 잡느라 고생하긴 했을 텐데…… 내 은인이자 스승이 이렇게 좋아하면 뭐 감수해야지.”
“감사합니다, 선배.”
“감사? 하하. 지금까지 먹여 주고 재워 줘도 듣기 어려웠던 말을 장어 잡으니까 하네. 들어와요!”
내 반응이 마음에 드는지, 앨프리드도 덩달아 신난 얼굴이 되었다.
아니, 방 안에 있던 모두가 그랬다.
덜커덕.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문이 열리고, 하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릇에 담긴 장어를 들고서였다.
‘음.’
기대했던 고소한…….
그러니까 구운 장어 특유의 냄새는 없었다.
뭐 그럴 수 있었다.
올라오는 동안 식었겠지.
“음.”
“장어 젤리로구만.”
“하하. 이거 맛있지.”
“정말 보양식이지. 건강해지는 맛이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음식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누운 나에 비해 먼저 요리를 영접한 사람들이 이상한 소리를 해 댔다.
‘장어 젤리라니?’
이게 뭔 미친 소리지?
젤리라니……?
장어로 왜 젤리를 만들어?
아니, 그 전에 그게 가능하긴 한 거야?
덜그럭.
인고의 시간 끝에 접시가 놓였다.
그리고 나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뭐야, 이게?’
왜 이렇게 생겼어?
“자 먹어.”
“들게.”
“장어 젤리 마니아가 여기 있었구만그래.”
“먹어 빨리, 평아. 우린 괜찮으니까.”
“네, 교수님, 드시죠.”
고민하는 나의 표정을, 다른 이들을 배려하는 것으로 여겼는지 다들 한마디씩 보탰다.
사실 나는 그 시간 동안 대체 이게 어찌 만든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더랬다.
토막 난 장어가…….
제대로 익은 건지 모르겠는 모양새로 누런 젤리 비슷한 것에 박혀 있었다.
세상에 장어를 이렇게 먹기 싫은 모양새로 내놓을 수 있다니.
역시 영국이다.
이 새끼들은 최선을 다해 음식을 맛없게 만들려고 노력해 온 것이 틀림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집어 던지고 싶었지만, 다들 이렇게 보는데 어쩌겠어.
먹어야지.
“읍.”
“그렇게 좋아?”
“우네. 울어.”
눈물이 나오는 맛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비리고 이상한 맛이 되어 나오다니.
“크흡.”
“그만 울고 먹게. 이거 나라도 장어 잡아야지.”
“그러니까요.”
이상한 응원과 함께 나는 장어 젤리를 한 입 한 입 먹어 치웠다.
그렇게 반 정도 먹어 갈 때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그는 딱히 안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누가 감히 이러나 하고 봤더니 집사였다.
“도련님.”
“응?”
“대미언 경이 언제 볼 수 있냐고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어찌할까요?”
“아…… 쓰러졌는데…….”
앨프리드가 날 보기도 전에, 나는 몸을 일으켰다.
조금 어지러웠지만 이걸 더 먹다간 토할 거 같았다.
“가겠습니다.”
“아니, 아무리 대미언 경이라도 아픈 사람을.”
“아니, 그래도 나는 의사야. 내가 수술한 사람은 봐야지!”
“허…… 그분 감동하시겠는데.”
감동이고 나발이고 내 위장이 죽게 생겼다.
해서 나는 억지로 집사를 따라 밖으로 향했다.
아무리 봐도 아파 보였는지 방 안에 있던 모두가 나와 함께 나와 마차에 올랐다.
‘은인이다, 은인.’
나는 남몰래 씹고 있던 장어 젤리를 창밖에 집어 던지며 대미언 경을 생각했다.
지금 당장은 수술 부위고 뭐고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고마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