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15)
검은 머리 영국 의사-15화(15/505)
15화 아저씨 내 말 좀 들어 봐 [4]
잠시 욕지기 나오는 얘기가 이어졌지만.
‘장갑……. 장갑이 필요하다.’
장갑을 향한 내 열망은 그따위 이야기로 옅어질 수 없었다.
다행한 것은 선배 또한 엄청난 흥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콘돔……. 나도 뭔지는 알아. 근데 거의 안 쓰더라고. 불편해서. 근데 그걸 제대로 만들 수 있다면…… 으음.”
“어마어마하다니까요? 성병도 예방할 수 있어요.”
“어어, 그렇지. 성병도 예방할 수 있지.”
“피임도 되고요.”
“그렇지, 그렇지. 이건 돼. 돈이 돼. 장갑은 곁다리로 만들면 된다는 거잖아?”
“그렇죠.”
“소재가 겹친다는 게 좀 그렇긴 한데…… 그래도 뭐, 좋지. 일단 가 보자. 아빠랑 얘기를 해 봐야겠어.”
그렇게 우리는 연회장이라 쓰고 하우스라고 읽어야 할 것 같은 곳으로 향했다.
조지프도 얼떨결에 함께 갔다.
“듣다 보니까 좋을 것 같긴 해. 사생아를 줄일 수 있다면…… 주님께서도…….”
퀘이커 교도답게 주를 찾고 있었다.
나쁜 일은 아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주님을 찾을 테니까.
애초에 대영제국이 다른 사람들 피 위에 선 제국임에도 저런 말을 하는 게 좀 이상하긴 했지만, 하여간 그런 시대였다.
“어우.”
도착한 곳은 진짜 그냥 하우스 그 자체였다.
다들 파이프 하나씩 입에 물고 연기를 뻐끔뻐끔 내뿜고 있는데, 보통의 사교 모임과는 달리 여자가 아예 없었다.
‘차라리 이게 낫긴 하지.’
내게는 잘된 일이었다.
가 본 적은 없어도 들어 본 적은 있거든.
이맘때쯤 런던 교외에서 열리는 사교 모임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귀족만 모이지는 않고, 돈 번 일반인들도 참석은 하지만 차별이 말도 못 하게 심하다고 들었다.
거기에 동양인이 가?
진짜 프린스 킴이라고 구라라도 치지 않는 이상 맞아 죽을 수도 있었다.
“까 봐.”
“자네부터.”
“어허. 까 보라니까?”
그쪽은 쓰는 언어로도 차별한다고 들었다.
영어라고 다 같은 영어가 아니라는 건데, 나나 조지프가 쓰는 영어는 당연하게도 평민층이 쓰는 영어였다.
거기서 이런 영어를 구사했다간 그냥 심부름꾼인 줄 알고 뭐라도 시킬 터였다.
허나 이곳에서 오가는 영어는 실로 저렴했다.
“블러핑 아니야?”
“아닌데? 쫄리면 뒈지시든지?”
상류층 집구석이 아니라 어디 뒷골목에서나 있을 법한 대화 아닌가?
덕분에 마음이 점점 편안해졌다.
그래, 이게 좋지.
괜히 몸 졸라매고 모여서 점잔 빼고 그러면 콘돔 같은 건 얘기할 수도 없다고.
“아버지.”
쫄리면 뒈지시든지 어쩌든지 하던 것치고는 완전 블러핑이었다.
그 장본인이었던 선배의 아버지는 돈을 싹 털리고, 파이프를 질겅질겅 씹었다.
그 틈을 노려 선배가 나섰다.
당연하게도 사나운 눈이 돌아왔다.
“인사하러 왔느냐?”
이제 한 대 치나 했는데 다행히 정상적인 말이 튀어나왔다.
배포가 남다른 모양이었다.
하긴, 그러니까 이 시대에 벌써 동서양을 오가는 상인이 됐지.
나에게도 이상하단 눈초리를 보내지 않고 말이야.
그에 비해…….
‘음.’
아니, 이 모임 전체가 비슷한 모양이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건 모두 다섯이었다.
보통 길거리에서였다면, 다섯 모두 날 무슨 동물원 원숭이 보듯 했을 텐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나 자체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여기 있는지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오. 소개 좀 해 주지 그러나? 이 친구는 대체 누구야?”
“청나라 사람인가? 그런데 머리 스타일은 완전 우리 사람인데?”
“아니, 일본인인가? 거기는 간혹 이런 머리를 하고 있는 이들도 있던데?”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아편전쟁도 일어나기 전이니까.
물론 이미 ‘청나라 걔들 알고 보면 좀…… X밥 아닌가?’ 하는 인식이 일부 상인들 중심으로 퍼져 나가고 있긴 했지만.
여전히 청이란 나라가 갖는 이미지는 대국이었다.
일본?
거기도 아직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려면 멀었다.
그런 상황에서 런던 사람들이 동양인을 보는 것이었기에, 이런 반응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아, 조선인이야. 여기서 태…… 아니, 아니지. 귀족인데 이쪽 문물을 배우기 위해 왔다고 들었네.”
선배의 아버지는 내 정체에 대해 밝히려다, 둘러대기로 한 위장 신분을 떠올리곤 달리 말했다.
그러자 다들 이해한다는 얼굴이었다.
“조선. 나 들어 봤네. 청나라 가까이에 있는 나라 아닌가?”
“인삼. 인삼 사 봤네.”
이제 보니 죄다 상인인 모양이었다.
하긴, 선배나 아버지나 귀족처럼 생기지 않긴 했다.
신흥 부자겠지.
그러니 귀족들은 놀아 주지 않을 테고.
“인사만 드리러 온 건 아니고요. 사업적으로 드릴 말씀이…….”
선배는 그렇게 내게 호의적인 시선이 쏟아지는 틈을 타서 운을 띄웠다.
“근데 우리 바쁜데.”
그러자 방금 돈 잃은 도박꾼, 그러니까 아버지가 선배를 밀어냈다.
평소에 얼마나 거지 같은 아이디어만 냈으면 저럴까 싶었다.
아니면 돈을 엄청 잃었거나.
하여간 선배는 뒤로 밀려났다.
내가 나서야 하나 싶었다.
“잠깐, 잠깐. 조선과의 무역이면 어쩌려고.”
“조선? 거긴 안 될 텐데? 프로비던스호 몰라?”
“알기야 알지. 근데 그 후로 벌써 몇십 년이 흘렀다고?”
“그래, 그렇기도 하구만.”
프로비던스호라.
미안하지만 처음 들었다.
존나 가만히 있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가끔 시간 날 때마다 역사 공부 좀 다시 해 볼걸.’
나도 국사 공부를 하긴 했다.
수능에 나오니까.
하지만…….
‘지금 순종일까 헌종일까.’
1830년.
올해 임금이 누군지도 헷갈리는 수준이었다.
그러고도 잘도 의사 됐다 싶을 수도 있겠지만, 이걸 알다가 모르게 되었을 정도로 의학 공부를 했으니까 의사가 된 거다.
그것도 모자라 교수까지 됐으니, 내 머릿속엔 그저 의학 지식과 경험만 가득 차 있다고 보는 편이 좋았다.
내가 그렇게 필사적으로 내 무식함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고 있을 때쯤, 선배가 말을 이었다.
“이 친구가 조선의 귀족이니만큼 그것도 나중엔 논의가 되겠지만…… 그런 얘기는 아닙니다. 물론 이 친구가 낸 아이디어입니다. 한번 들어 보시면…… 아마 다들 앞다투어 투자하겠다고 하실 겁니다.”
해부 실습실에서는 손가락이나 베이더니 여기선 제법 똑 부러지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다른 이들도 똑 부러진다고 여겼는지, 그에게로 이목이 쏠렸다.
돈 잃은 도박꾼도 몸을 모로 돌리곤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콘돔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콘돔?”
“들어 봤지.”
“도축업자들이나 돌리는 거 아닌가? 수익성이 없는데.”
그러다 대번에 차가운 반응이 돌아왔다.
이 시기 콘돔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지 알 수 있었다.
선배도 살짝 당황했다.
그래서 날 봤다.
‘이 새끼…….’
그래.
해부하다가 손이나 베이던 놈이 이 정도로 어그로 끌었으면 잘한 거지.
하여간 의학적인 지식이라면 내가 나서야 맞지 않겠나.
“인사드립니다. 저는 조선에서 온 태평 김이라고 합니다. 평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아아.”
“영어 되게 잘하네.”
“원어민 같아.”
분위기는 반전됐다.
동양인 중에 이렇게 영어 잘하는 사람은 아마 21세기에서도 드물지 않겠나?
교민이 아니고서는 어려울 터였다.
또, 자기네 말을 잘하는 외국인은 늘 호감으로 다가오는 법이었다.
뚜렷한 차이점 하나가 소거되는 시점이니 분위기가 반전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의학도로서 말씀드리면…… 콘돔은 아주 중요합니다. 단지 사생아가 생기지 않는 것만 장점이 아니에요. 성병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선원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텐데…… 아무래도 성병에 걸려 잘못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아니, 상상은 아니었다.
나이 들고 대항해시대를 떠올리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긴 했거든.
아무래도 선원들이 각지의 질환들, 특히 성병의 온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안 들면 그게 의학도라 할 수 있겠나.
“음.”
“확실히…… 매독이나 임질이 창궐하긴 하지.”
“얼마 전에 우리 선장도…… 은퇴했네. 정신이 온전치가 않아졌어.”
왜 그런 생각을 했냐면, 뎅기열이나 말라리아는 일단 모기가 옮기는 병이지 않나.
사람이 사람에게 옮기진 않았다.
또 중요한 건, 그건 당장 사람이 죽을 수 있었다.
허나 성병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병이니만큼 숙주인 인간에게 들러붙어서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는 균들이 태반이었다.
“작게는 그러한 뱃사람들부터 콘돔을 쓰면 예방이 될 겁니다. 또…… 사교 모임을 보죠.”
“귀족들 말이지?”
“네.”
내 상상은 귀족들에게도 뻗쳐 나갔다.
망상은 아니고 근거가 있는 상상이었다.
내가 어디 유튜브에서 봤는데, 현대적 콘돔의 기원이 된 왕이 있더라고?
그것도 여기 영국에.
왜 만들었겠어.
문란하니까 만들었겠지.
“앞에서는 뭐라 안 해도 뒤로는 엄청 살 겁니다.”
“그것도 그렇겠네. 다들 쉬쉬하고 있을 뿐이지…… 응?”
“게다가 이곳 런던에는 매음굴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딱히 왕족, 귀족들만 문란한 건 아니었다.
그냥 그런 의식이 부족한 시대였다.
내가 봤을 땐 이쪽이 더 문제였다.
어차피 치료야 항생제가 없으니 다 안 되겠지만.
증상 조절도 못 할 거거든.
삶이 팍팍하니까.
“그쪽으로도 수요가 어마어마할 겁니다.”
“음.”
“음!”
“좋은데?”
내 말에 다들 화색이 돌았다.
그중에서도 제일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건 선배의 아버지였다.
“좋아, 아주 좋아. 근데 그 콘돔을 뭐로 만들 생각이지?”
그는 이제 숫제 자세까지 고치고서 돌아앉아 있었다.
마음 한쪽엔 여전히 아까 잃은 돈이 아른거리고 있을 테지만.
그보다 더 큰 돈이 보이기 시작하는 느낌이 들었으니 이젠 다 필요 없는 듯했다.
‘내장 얘기라도 하면 너는…….’
물론 불안감은 있었다.
아들 친구고, 또 의학에 대해 조예가 있다고 하니 호감은 있지만.
여기서 태어난 조선인에게 그 이상의 기대를 하는 건 무리였다.
“고무입니다.”
“고무……?”
우선, 답은 예상을 빗나가도 한참을 빗나갔다.
“고무라니……?”
고무.
그래, 말랑말랑하다곤 들었다.
허나 쓸 만하게 처리를 하면 도로 딱딱해졌다.
그래서 거의 안 찾는 원재료였다.
가격?
똥값이었다.
“네. 보시면, 일단 고무는 방수가 되죠? 물에 젖지 않는다는 건데…… 이게 엄청난 장점입니다. 젖으면 이렇게 문지르는 등의 일을 할 때 아무래도 더 벗겨지기 쉬우니까요. 안 젖어야 해요.”
“그런가? 내가 그렇게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그래, 나도 어제까지는 그랬지.
콘돔에 대해 묵상해 본 적은 없다, 이 말이야.
하지만 어제는 거의 밤새 콘돔을 생각했다.
“보십시오. 종이가 젖으면…… 이게 뭐 되겠어요? 그래서 동물 내장으로 만들었던 겁니다.”
“그렇군. 그래, 확실히…… 음. 질기기도 하고…….”
“요는 얇고 부드럽게만 만들면, 이건 대박 날 거라는 겁니다.”
“음…… 그 방법도 아나?”
“모르죠. 화학자한테 돈 주고 시키셔야죠.”
“되게 뻔뻔하네?”
“저는 그냥 아이디어를 내는 거니까요.”
“하지만 마음에 들어. 그럴싸해. 확실히…… 이 정도는…… 음. 괜찮은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