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152)
검은 머리 영국 의사-152화(152/505)
152화 배 [3]
배 검진.
이거야 뭐 아무것도 아니네 싶을 수도 있었다.
노상 병원 가면 눌러 대는 게 배 아닌가.
하지만…….
아주 간단한 검진 과정조차 그 뒷단에 쌓인 지식은 어마어마하다는 걸 늘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파요?”
“아니…… 괜찮습니다.”
환자는 일단 얌전했다.
왜냐.
아까 옆에서 배 뚫린 사람이 있잖아.
실제로 뚫리진 않았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오금이 저릴 정도의 빠르기와 세기였다.
확실히 리스턴은 지금보다 더 전에 태어났어야 했다.
그랬다면 영국 왕실 계보가 바뀌었을 텐데.
“여기는?”
“여기도…….”
“아니, 평. 여길 눌러야지. 환자가 아프다고 하는데.”
리스턴의 말마따나 나는 지금 엄한 곳만 누르고 있었다.
당연한 얘긴데, 21세기 지식을 탑재한 초천재인 내가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눌렀을 때 아플 거라 예상되는 부위는 나중에 눌러 보는 것이 좋아서 그랬다.
여기도 아플 수 있잖아?
근데 먼저 아플 만한 부위를 눌러 버리면, 환자는 그 통증 자체와 통증에 대한 기억 때문에 배에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다른 부위에 대한 검진이 어려워진다 이 말이었다.
이것도 제법 어려운 개념이다 보니 설명하기가 까다로웠지만…….
“아, 어머니가 참 현명한 분이시군그래. 하긴, 보통 사람이 자네 같은 천재를 낳았을 리가 있나.”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엄마 드립으로 밀어붙이기로 작정한 마당이었다.
다행히 리스턴이나 다른 놈들 모두 탈룰라 드립을 치기엔 점잖은 사람들이라 잠자코 있었다.
속으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말 그대로 ‘지금’이었다.
이렇게 얼렁뚱땅 넘기는 게 중요하다, 이 말이지.
“자, 그럼. 여기는?”
“으앗.”
하여간, 나는 명치, 좌 하복부, 좌 상복부, 우 상복부를 다 눌러 보고 나서야 우 하복부를 눌렀다.
그러자 꽤 극적인 반응이 튀어나왔다.
비명과 함께였다.
그렇게 세게 누른 것도 아니었다.
아니, 방금 전과 똑같이 눌렀다.
“차이를 아시겠어요?”
“어, 그래. 확실히…… 흠. 이런 식이로군.”
리스턴이 지식이 부족한 사람이라 이러는 것이지, 멍청한 사람은 아니지 않나.
딱 보자마자 한눈에 알아먹은 눈치였다.
다른 놈들도 그런 듯했다.
하긴, 아까 리스턴이 했던 만행과 내 진찰과의 차이를 알아볼 수 없다면 쓸데없이 대학이나 다니는 대신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게 좋지 않겠나.
“잘 봐요.”
“아직도 남았나?”
“자, 환자분. 손 뗄 때는 어때요?”
“으악.”
아까 눌러서 아픈 건 압통이다.
압통도 물론 해당 부위의 염증을 시사하긴 했다.
하지만 방금 내가 손을 뗄 때 발생하는 통증, 즉 반발 압통이 복부에 있어서는 더더욱 중요한 소견이었다.
눌려 있던 복막이 이완되면서도 염증이 발생한다는 건, 확실히 그 부위에 농양이나 고름 또는 꽤 심한 정도의 염증이 수반되었다는 걸 의미했다.
‘사실 초음파 대는 게 제일 정확하긴 하지…….’
물론 이것만으로 진단이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초음파 대고 들어갔는데도 멀쩡한 충수돌기 떼고 나올 때가 왕왕 있을 정돈데 이것만 믿고 들어갔을 땐 대체 어떻겠나.
‘그래도…… 무작정 여는 것보다는 낫다. 무조건 나아.’
나는 잠시 리스턴을 돌아보았다.
저절로 아까 리스턴이 환자 배에 대고 십자가를 그렸던 일이 떠올랐다.
진짜 미친놈이다.
십자가로 열 생각을 하는 것도 황당한데…….
그걸 아무 생각 없이 아무나 열 생각을 하다니.
“이건 왜 이러지? 뗄 때 왜 아픈 건가?”
리스턴은 전혀 다른 데 꽂혀 있었다.
엉뚱한 방향은 아니었다.
아까부터 계속 자기 배를 눌렀다 뗐다 하고 있었다.
당연히 아무렇지도 않을 터였다.
복막을 자극하는 것이 없다면, 단순 이완되는 것만으로 아플 수가 없거든.
‘이거까지 엄마 핑계 댈 수는 없겠지…….’
제아무리 뻔뻔한 나라지만 이런 걸 어떻게 엄마 핑계를 대겠나.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할 말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구라 마스터 김태평.
빈말이 아니다.
“해부할 때…….”
“어어, 말해 보게.”
“납품업자가 들고 오는 거 말고, 병원에서 생산…… 아니, 병원에서 돌아가시는 분들 해부할 때 말입니다.”
“어어.”
하, 시발.
19세기에 살다 보니까 나도 변하는 모양이었다.
시신 생산이라니.
“그런 분들 중에 배 안쪽을 까 보면, 고름이 막 있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태반이 그렇지.”
내 말에 리스턴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놈들도 다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니다! 원래는 그래선 안 돼!’
복막 안쪽까지 염증이 번졌다는 건, 그야말로 감염이 전신으로 다 번졌다는 얘기 아닌가.
물론 21세기에서도 그렇게 돌아가시는 분들은 있을 터였다.
항생제를 써도 그랬다.
그것도 페니실린 같은 게 아니라 세대에 세대를 거듭해 개발한 항생제를.
그러니 제대로 된 항생제라고는 운빨에 기대야 하는 썩은 빵밖에 없는 이곳이 열악할 수밖에 없기는 했다.
‘근데 태반이 그런 게 말이 되냐.’
이것이야말로 원내 감염의 가장 명확한 증거였다.
왜냐.
다른 데서 납품되는 시신은 안 저러잖어…….
제아무리 이 시기라고 해도 대다수의 사람이 패혈증으로 돌아가시는 건 아니다, 이 말이었다.
“그 고름 같은 것이 접혀 있다가 펴진다고 생각을 해 보면, 그것도 아프지 않을까요?”
“어…… 과연, 그럴 수 있겠네. 고름이 잡히면 아프니까 말이지.”
“그러니까요.”
“거기서 착안한 겁니다.”
“확실히 자네는 천재로구만.”
얼굴에 철판 깐 나지만, 누가 개발한 건지도 모를 반발 압통의 개념을 내가 창시했다고 할 때는 살짝 민망했다.
그래서 아래를 내려다봤는데, 그때 환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있어 보이는 말을 해 놔서 그런가, 아까보다 표정이 한결 나아져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는 못했을 터였다.
허나 리스턴쯤 되는 사람이 천재 운운하고 있으니 안심이 되기도 하겠지.
‘이렇게 된 이상…… 천재 메타가 아닌, 초천재 메타로 가야겠구만.’
절대로 내 사리사욕을 위해서가 아니다.
이게 다 환자를 위해서다.
진짜.
“하여간…… 이렇게 했는데도 아프다는 건 확실히 이쪽에 뭔가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렇군. 그럼 배를 열어야겠군.”
나는 리스턴의 말을 들으며 다시금 환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배를 연다고 하는데도 아까보다는 반응이 좋았다.
역시, 초천재 메타로 가야겠다.
이 시기에 배 연다는데 이런 반응이라니.
미신과 과학이 결합한 요상한 시대라는 걸 감안하면 반쯤 기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가죠.”
“가? 여기서 안 하고?”
“아니…… 여기서요?”
내친김에 하려고 했더니, 리스턴이 의문을 표했다.
아니, 리스턴뿐만 아니라 다들 그랬다.
“아픈 사람 데리고 괜히 어디 갈 필요가 있나. 물품이야 들고 오면 될 일인데.”
“그래, 이게 합리적이야.”
어지간한 이유를 댔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기분이 상하진 않았을 터였다.
근데 합리적이라고?
조지프…….
이 새끼, 은근히 과학자인 척하네…….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가는 유의미한 말이 아니라 욕만 튀어 나갈 거 같아서 잠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별 소용은 없었다.
‘와…….’
어떻게…….
어떻게 병원이 이렇게 더럽지?
고름이나 구더기, 파리야 뭐 이제 상수였다.
병원인데 그런 게 없으면 차라리 섭섭할 거 같어, 아주.
근데 여긴 배 아픈 병동이라서 그런가, 군데군데 똥칠한 곳도 있었다.
저런 걸 보고 있으면 닦고 싶어지지 않나, 보통은?
“제가 의외로 소심하다는 건 알고 계시죠?”
너무한 걸 봐서 그런가, 화가 쑥 내려가고 오히려 두려워졌다.
19세기 야만인들이 너무 무서워.
해서 나는 그럴싸한 핑계를 떠올렸다.
다행히 구라 마스터다 보니, 떠올리려고 하자마자 딱 떠올랐다.
“어, 그렇지. 그럴 이유가 없어 보일 때 그러지.”
“익숙한 곳에서 수술하는 게 좋겠습니다. 실수라도 할까 두렵습니다.”
“아…… 거참. 자네 그 점은 고쳐야 하네. 환자에게도 못 할 짓이야.”
똥칠한 병실에서 수술하는 게 진짜 못 할 짓이라는 걸 대체 이들에게 언제쯤이나 되어야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소심한 게 아니라 그냥 멸균…….
아니지.
멸균이라니?
그런 불가능한 고도의 단계를 꿈꾸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저 육안으로 봤을 때 깨끗한 곳에서 수술하고 싶다는, 아주 작은 소망이 있을 뿐이라는 걸 언제쯤…….
“정신 차리게. 집도해야지. 아니면 내가 해도 되고.”
그렇게 딴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여느 때처럼 리스턴이 충격요법을 썼다.
자신이 한다고?
십자가로 연다고?
가뜩이나 소독도 불완전하고, 음압(Negative Pressure, 오염을 막기 위해 사용하는 압력) 따위는 꿈꿀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크게 열게 되면 사람이 어찌 될까.
‘살인이다. 그건 살인이야.’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긴 했다.
모르긴 해도 리스턴이 죽인 사람이 몇 트럭은 되지 않겠나?
“아, 네. 정신 차렸습니다. 제가 할게요. 해부하면서 몇 가지 생각한 방법이 있어요.”
“그래? 그럼 해 보고. 나도 배는 피차 처음이다 보니 고민이 많네. 일단 잘 보여야 하니까, 이렇게 열어야 될 거 같긴 하네. 해부할 때도 이렇게 여니까 익숙하기도 하고.”
그건 죽은 사람 배니까 그렇죠, 형님.
산 사람 배를 그렇게 열 생각은 보통 사람은 절대로 하지 못합니다요.
하지만 이게 또 똑똑한 사람이다 보니 나름대로 이유가 있기도 했다.
익숙하고, 시야가 좋다.
수술할 때 이것보다 중요한 게 또 있을까?
확실히 핵심을 짚을 때가 있었다.
그러니까 런던 명의로 유명하겠지.
“그, 그렇긴 하죠. 근데 또 어떻게 생각해 보면…… 아픈 덴 여긴데 다 열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요.”
“여는 게 여는 것이지. 대체 어찌 열려고 그러나. 십자가 모양이면 모양도 좋잖어.”
“그…….”
모양도 따졌구나.
주여.
계신다면 지금 당장 벼락을…….
“자, 다 왔습니다.”
안 계시는 건지, 나한테 알아서 맡긴 건진 몰라도 마른하늘에 벼락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아니, 숫제 아무런 일 없이 우리는 곧장 내가 수술방으로 쓰는 작은 강의실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전에 대미언 경을 비롯해 전립선 수술을 했던 곳인데, 나름 내가 꾸준히 관리를 하고 있었더랬다.
그래 봐야 벌레 안 꼬이게 창문 닫고 쓸고 닦고 하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이 병원 내에서 제일 청결한 곳이었다.
“자, 여기로.”
아무튼, 나는 환자를 침대 위로 옮겼다.
보통 단상 위에서 바로 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지금 이 환자는 VIP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는 셈이었다.
“콜린?”
“네, 준비됐습니다. 다음 수술엔…….”
“어, 그땐 네가 보조, 앨프리드 선배가 돌려.”
“네!”
그렇게 눕히자마자, 콜린이 가스통을 들고 왔다.
그러곤 끼릭끼릭 돌려서 환자를 재웠다.
그사이 나는 비누로 손을 닦고, 장갑을 낀 후에는 염화석회로 슥슥 비볐다.
멸균과는 거리가 좀 있겠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인원도 다 손, 장갑 씻기를 마치고 나서 난 메스를 집어 들었다.
‘후.’
이 간단한 수술도 오랜만이라 그런가, 살짝 떨렸다.
아니, 오히려 설렜다는 표현이 옳았다.
그래.
나는 배 수술이 그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