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154)
검은 머리 영국 의사-154화(154/505)
154화 배 [5]
맨정신의 리스턴도 무섭다.
그렇다면 웃음 가스에 취한 리스턴은 어떨까?
“하하하하! 주님께서 계시를 주셨다아아아!”
평균 키가 160대 초반에 불과한 시대에 180을 훌쩍 넘는 거구의 사내가 복도를 내달리고 있었다.
주님 운운하면서.
그 모습은…….
‘공포의 군주, 그 자체인데……?’
내가 진짜 19세기 와서 별의별 꼴을 다 봤잖아?
근데 이건…….
이건 차원을 달리하는 공포였다.
그냥 보기만 해도 무섭지만, 나는 저놈이 이제부터 무슨 짓을 할지 다 알겠기에 더더욱 무서웠다.
“기다려!”
“하하하! 아우! 덕분에 나도 배를 열 수 있게 됐네!”
“아니…….”
언젠가는 배를 열긴 할 터였다.
원래 외과는 배를 연다고.
게다가 복강 내에 병이 좀 많나?
더욱이 변변한 약조차 없는 이 시대라면 수술로만 해결 가능할 병이 진짜 많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나는 반지의 제왕에서 아라곤이 했던 말투 그대로 오늘은 아니라고 중얼거리면서 내달렸다.
“응? 왜 그러나?”
“기, 기다리라고요…….”
“왜? 주님은 내게 망설이지 말라고 하셨네.”
“아니…….”
그게 주님이 아니라 환각이라니까?
나는 약에 취해 해롱거리고 있는 리스턴을 보며, 뒷골이 지끈거려 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긴 했다.
왜?
웃음 가스에 관한 연구가 충분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진행하긴 했거든.
생각해 봐라.
지금 이 시점에서는 내가 지닌 유일한 마취 가스인데 그냥 그대로 뒀겠어?
‘생각보다 웃음 가스는 되게 약해…….’
실제로 지속적으로 내쉬지 않으면 약효는 금방 떨어진다.
어떻게 아냐고?
전에 콜린이 마취 가스 천천히 푸는 거 까먹었다가 환자가 고래고래 비명 지르는 모습을 직관했거든.
세상에 칼 댄 상황에서 마취가 풀리다니.
그 대가로 콜린은 리스턴에게 몇 대 쥐어 터지곤 한 일주일간 학교에 나오지 못했더랬다.
‘시간을 끌자…….’
그러니 답은 시간 끌기다.
“박사님!”
“어어.”
“주님의 은혜에 취한 것은 알겠습니다! 근데 이렇게 뛰어갈 필요가 있을까요?”
“일을 시키셨으니 뛰어야지?”
“아니, 아닙니다.”
돌아라, 머리야.
돌아!
“그, 그래. 요한이 광야에서 뛰었습니까, 걸었습니까.”
“걸었겠지. 수십 년을 떠돌았…… 아. 뛰라고 하시진 않았군그래.”
“그렇죠! 그렇습니다! 걸어야 됩니다!”
이게 맞나.
맞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말이 통하고 있지 않나.
피차 제정신이 아니다 보니 가능한 일이었다.
“음.”
그렇게 시간을 끌다 보니 리스턴이 제정신을 차렸다.
적어도 웃음 가스로 인한 망상에서는 벗어났다, 이 말인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아무튼, 오늘 열지.”
지극히 차분한 말투.
진중한 얼굴.
그래, 제정신이다.
제정신으로 자신의 망상을 굳게 믿고 있었다.
원래 망상이라는 게 자신은 망상인지 몰라서 병이 되는 것이기는 한데…….
‘연다…… 연다고? 이 사람 메스는 있나?’
메스가 있을 리가 있나.
백날천날 리스턴 칼이라고 이름 붙인 그 거대한 칼만 들고 다니는데.
내가 아무리 말을 해 줘도 쇠귀에 경 읽기 수준이었다.
집도의라면 무릇 자기 손에 익은 칼을 써야 한다나 뭐라나…….
‘아니, 아냐.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야…….’
암담하다는 말로도 모자랄 만큼 흉악스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긍정킹이다.
보통 의사 같았으면 수술 쇼 벌이는 거 봤을 때 벌써 미쳐 버리거나 죽었어…….
오직 나만이 이 막장 의료 시스템을 견딜 수 있다, 이 말이지.
“제가 보조를 해도 좋을까요?”
“나야 좋지. 자네 보조야 어마어마하지 않나.”
“네네. 그리고 아까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역시 이번에는 작은 칼을 쓰시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응? 아…… 자네처럼 열라고?”
“네.”
아니, 나처럼 열어야지…….
다르게 열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런 내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리스턴은 먼눈을 하고 말했다.
“아까 주님께서 십자가를 보여 주셨네.”
“그…….”
“십자가로 열라는 뜻 아닐까? 그래야 살 수 있다는, 뭐 그런 거 아니겠어?”
“아니…… 아뇨. 방금 확인한 것으로 가시죠.”
“으음. 난 아무래도 찜찜하다네. 계시를 무시하는 거 같아서 말이야.”
그거 계시가 아니라고!
라고 소리치고 싶다.
하지만 그랬다간 큰일이 나겠지?
그러니 어떻게든 설득을 해야만 했다.
“제가 받은 계시는 달랐습니다. 작은 칼을 봤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게 좋아요. 아니, 주님께서 괜히 배에 피부를 그렇게 달아 놓으셨겠습니까? 그걸 다 째 버리는 게 어쩌면 섭리에 어긋나는 일 아닐까요?”
“아…… 하긴 괜히 만들었을 리는 없지. 그걸 내 임의대로 째는 건…… 하지만 십자가 모양인데?”
“십자가에 너무 집착하시는 거 아닙니까? 믿음은 형태로 짐작할 수 없는 법입니다!”
무슨 말일까?
내가 해 놓고도 모르겠다.
“허. 좋은 말일세. 그렇지. 그렇구만.”
근데 리스턴은 알아들은 듯했다.
미친놈에게는 미친 소리를 해야 하는 법인가.
나는 큰 깨달음을 얻은 채 배 아픈 사람들이 모여 있는 병실로 돌아왔다.
문을 딱 열자마자 참 오래된…….
퀘퀘한 똥 냄새와 고름 냄새 그리고 사람의 체취와 같은, 하여간 개같은 냄새가 나를 반겨 주었다.
“음, 그래. 자네 말을 따르지.”
그럼에도 나는 웃을 수 있었다.
비로소 큰 산을 하나 넘은 느낌이 들어서 그랬다.
그래.
이제는 제발 그놈의 칼은 버려라.
절단술 외에는 쓸 일이 없고, 써서는 안 될 일이란 말이다.
“아, 이번 환자는 고르는 거부터 내가 해도 되겠나?”
“아…… 네. 물론이죠.”
“잘못된 것이 있으면 말하게. 그럴 거 같진 않지만.”
“그…… 네.”
잘못된 것만 하는 놈이 이런 말을 하니까 기분이 팍 상했지만…….
어떻게 보면 또 맞는 말이기도 했다.
리스턴.
이 사람은 천재다.
“자, 무릎 굽히시고.”
“네?”
“굽혀.”
“아, 네.”
그리고 깡패다.
그렇다 보니 바로바로 환자들이 지시에 따랐다.
이렇게 저렇게 어르고 달래야 하는 나와는 천양지차였다.
흡사 머리 좋은 여포……랄까?
“배 어디가 제일 아프지?”
“여, 여기.”
“아, 꽝인데.”
“네?”
진짜 여포 맞는 게 우 하복부 아니고 다른 데가 아프다고 하니까 쿨하게 다음 환자로 넘어갔다.
뭐…… 잘된 일이다.
아랫배가 아픈 건, 대개 그냥 장염일 수 있거든.
물론 막상 열어 보면 너무 무서운 병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너무 무서운 병은 리스턴 아니라 나도 무리다, 아직은.
“어디가 아프지?”
“여기.”
“좋아.”
리스턴은 아까 호언장담한 것 그대로 내가 아까 했던 것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딱 배에 대한 진찰을 이어 나갔다.
기억력이 진짜 좋다.
대단해, 정말.
“좋아. 뗄 때도 아프다는군.”
리스턴은 배가 아파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환자를 보며 씩 웃었다.
“여기서 쨀까? 아니면 갈까?”
“가시죠…… 제가 좀 소심해서.”
“아까 보니까 웃으면서 칼질하던데, 뭔 놈의 소심인가.”
“그런 게 있습니다. 제가 봤을 때 여기는 미아즈마가 많아요.”
“강의실은 적고?”
“네.”
“느낌뿐 아닌가. 아직 미아즈마를 측정할 수 있는 기술은 없네.”
“그래도…… 찜찜한 마음으로 수술하는 것보다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수술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요?”
말은 하고 있지만, 미아즈마 운운해야 하는 내 신세가 참으로 처량했다.
대미언 경이든 아저씨든, 누구든 간에 활용해서 현미경을 좀 개발을 해야겠어.
‘아니…… 아니지. 어쩌면, 꽤 배율 좋은 현미경이 이미 있을 수도 있어.’
19세기는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시대다.
웃음 가스를 떡하니 만들어 놓고도 수십 년을 파티에만 써먹었잖아?
그런 놈들이니 현미경도 비슷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뭐, 아무리 그래도 현미경은 파티나 이런 데 쓸 일은 없긴 하겠지만.
“그래, 그러지. 가자고, 그럼.”
“네, 형님.”
리스턴은 우악스러운 사람이지만 또 내게는 따뜻한 사람이다 보니 환자를 데리고 강의실로 향했다.
강의실에 도착하니 아까 그 환자가 침대로 옮겨지고 있었다.
힘 좋은 조지프가 주도적으로 하고 있었는데, 그사이에 콜린과 앨프리드는 딱딱 알아서 새 시트 깔고, 미리 삶아서 소독해 둔 수술 기구를 들고 왔다.
참 저놈들도 대단하다.
왜 하는지 모르면서 시키는 대로는 하고 있지 않나.
“자, 옮길까?”
“네네.”
뭐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나는 새 시트가 깔린 강의실 단상, 내가 미리 침대처럼 뭔가 깔아 둔 곳으로 환자를 옮겼다.
그러자 앨프리드가 마취 가스를 끼릭거리며 다가왔다.
콜린은 후후 웃으며 보조의 자리로 다가왔다.
자기 차례라 이건데, 미안하게 됐다.
이번 집도의는 내가 아니라 리스턴이거든.
‘내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환자는 죽는다.’
반드시 죽는다.
배 수술이라는 게 눈으로 한번 보고 바로 따라 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게 아니거든.
물론 수술에 대한 개념이 딱딱 잡혀 있는 사람이라면야 또 모르겠지만, 리스턴은 그게 아니다 보니 내가 도와야 했다.
보조를 빙자한 가르침을 내려야 한다는 얘기였다.
“나 아직 마음의 준…… 끕.”
그러고 보니 리스턴만 신경 쓰느라 환자를 못 봤다.
방금 뭔가 대단히 중요한 말을 했던 거 같은데…….
우리 앨프리드 선배가 벌써 웃음 가스를 끼릭거리는 바람에 묻지도 못하게 되었다.
‘뭐…… 이따 물어봐야지.’
어차피 나 말고는 아무도 관심도 없는 데다가, 리스턴이 여차하면 환자의 배를 절단할 기세로 몸을 풀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수술에 집중하기로 했다.
“좋아.”
“좋기는 뭐가 좋습니까…… 그 칼로 여길 어떻게 째시려고요.”
“난 할 수 있네.”
“네?”
“난 가능해. 괜히 절단 마스터라고 불리는 게 아닐세.”
“아니…… 그래도…… 아까 보셔서 아시겠지만 그렇게 한 방에 팍팍 째면 안 됩니다. 해부도 많이 해 봤잖아요. 배도 다 레이어가 있습니다.”
“아, 레이어. 근데 그걸 꼭 딱 나눠서 해야 하나?”
어찌 설명을 해야 하려나?
나는 의학적인 이유를 떠올리다가, 이내 19세기 식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주, 주님께서 괜히 나누셨겠습니까.”
“아.”
이에 큰 깨달음을 얻은 리스턴은 곧 회개하고 칼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내가 제작한 메스를 집어 들었다.
만족스러운 얼굴은 아니었다.
“이렇게 째깐한 칼로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마치 애병을 빼앗긴 중세 기사처럼 한숨을 내쉬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비장한 얼굴이 되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실력자는 장비 탓을 하지 않는 법이지. 자네도 이 칼로 했으니, 이번에는 내가 이 핸디캡을 감수하겠네.”
200년 뒤까지 이어지는 시행착오를 통해 만들어진, 아마도 현대적인 수술에 있어서는 완벽한 형태일 메스를 두고 핸디캡 운운하다니.
내가 리스턴이고 네가 나였으면 뒤졌다.
하지만 나는 나고 리스턴은 리스턴이다 보니, 나는 그냥 닥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형님. 그럼. 여기를. 아니, 아니. 어어. 너무 호쾌…… 야, 천! 천 줘! 피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