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155)
검은 머리 영국 의사-155화(155/505)
155화 이제 슬슬 소독도 더…… [1]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다.
리스턴…….
이 야만인은 천재 야만인이라는 걸,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잘하셨어요. 진짜.”
“후후. 비슷했나?”
“네. 뭐…… 거의 같았습니다.”
처음 한 번은, 확실히 좀 어설픈 면이 있었다.
그것도 딱히 리스턴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손 크기 차이 때문이었다.
수술보다는 도살에 어울리는 저 손은 평소 내가 째던 수준의 절개창을 통해서는 도저히 복막 안으로 진입이 안 되었다.
-역시 십자가…….
-아니, 아니. 제발 그냥 조금만 더 쨉시다.
이 미개한 놈들이 인치 단위 쓰는 거 또 잠깐 까먹었다가 10센티도 넘게 더 쨀 뻔했지만, 다행히 내 뛰어난 직감이 그걸 막았다.
이미 짼 것도 7센티는 되는데 거기에 10센티를 더 짼다는 건…….
그냥 배를 일도양단한다는 거 아닌가.
물론 뭐…….
제왕절개를 비롯한 여러 수술 중엔 그렇게 냅다 째야 하는 수술도 있긴 했다.
하지만 맹장에는 선 넘어도 한참 넘었지.
-이렇게 하면 되나?
-오…… 네. 찾았네요?
-그래. 이걸 이제 이렇게 묶으라 이거지?
-네, 안에 있는 규…… 미아즈마가 새어 나오면 안 되니까요.
-그래, 그래. 그러지.
아무튼, 그것 말고는 이렇다 할 위기가 없었다.
진짜 의외였는데, 그랬다.
확실히 수술에 재능이 있다.
해부학적인 지식도 부족하거나 왜곡되어 있을 뿐이지, 수정해 주면 바로바로 3D화해서 불러올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작은 절개창을 통해 충수돌기를 꺼내긴 어려웠다.
더욱이 별 경험도 없이 하는 건 진짜 재능의 영역이었다.
‘흐음.’
아무튼, 나는 연구실에 돌아왔다.
제자 놈들에게는 오늘 한 수술을 그림도 그리고 글도 써서 정리하라는 명을 남겼고, 리스턴은 알아서 그러기 위해 사라졌기 때문에 나는 지금 혼자였다.
“후우…….”
오늘 수술한 환자는 무려 셋.
배 연 환자가 셋이다.
그중에 과연 몇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신나서 수술한 주제에 이따위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한심스러웠지만…….
‘소독의 개념이 너무 부족한 것이 제일 문제야.’
소독제를 찾아봐야 하기도 할 터였다.
하지만 그 전에 소독이 왜 필요한가를 설득해야만 했다.
지금도 내 제자들을 제외하면 딱히 수술 기구를 삶거나 닦는 놈들이 거의 없지 않나?
그나마 리스턴 박사님이 빛을 반사시킬 정도의 수술 기구를 쓰는 것이 오히려 멋이란 인식을 심어 줘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진짜 아무도 안 닦고 있을 것이 뻔했다.
‘내가 리스턴이었다면 그냥 닦으라면 좀 닦으라는 식으로 해도 되겠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바란다.
내가 리스턴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으면 두 주먹으로 의사 여럿 뭉개 버렸을 텐데…….
아니면 그 유명한 리스턴 칼로 동강을 내거나…….
아니, 아니지.
난 의산데.
야만인이 아닌데.
잠깐 다른 곳으로 생각이 샜는데, 이제 슬슬 합리적인 설득을 해야겠다.
미아즈마니 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떠들어 대는 것도 지겹다, 이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박테리아를 봐야 해. 현미경이 있어야 하는데…….’
업턴에 있을 때, 그러니까 고향에 있을 때도 현미경이 있기는 있었다.
아저씨는 부자고 오며 가며 신기한 것이 보이면, 그리고 그것이 너무 비싼 것이 아니면 사 오는 편이었거든.
하지만 내가 쓰던 그건 현미경이라고 하기엔 너무 조악했다.
배율이 글쎄, 고작해야 5배가량 되려나?
말 그대로 신기한 장난감이긴 한데, 그 이상의 무엇을 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 말이었다.
“더 좋은 현미경을 만들어야 된다, 이 말인가? 아씨…….”
의사만 했다는 것이 이렇게 한스러울 줄이야.
막말로 화학을 전공했으면 약을 만들고, 어?
현미경은…….
현미경은 뭘 전공해야 만들 수 있을까.
이런 기초적인 것도 모를 정도로 무식한 내가 과연 현미경을 만들 수 있을까.
병리학 공부할 때 써 보기나 했지 정작 현미경의 원리 따위는 1도 몰랐다.
“하아.”
한숨을 쉬다가, 이내 다시 마취 가스를 떠올렸다.
그래, 이 미친놈들은 마취 가스를 발명해 놓고 무려 70년 가까이 파티에만 쓴 놈들이다.
그렇다면 혹시…….
현미경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다행히 나는 지식의 보고라 할 수 있는 대학 교수고, 이 대학에는 나름 이런저런 문헌이 있는 편이었다.
결정을 내린 나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현미경…… 현미경…….’
관련 책을 찾으려 했는데, 아쉽게도 진짜 오래된 책밖에 없었다.
뭐야, 이거.
거의 100년은 됐겠어.
누가 기부라는 명목하에 버리고 간 책인지 살짝 집자마자 매캐한 곰팡내가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책이 모조리 부식되어서, 진짜 조심스레 넘기지 않으면 부스러질 느낌마저 주었다.
‘100년 전에 현미경이…… 이게 현미경일까?’
아저씨가 사 온 것도 배율이 형편없었는데 100년 전이면…….
‘이 새끼들 혹시 망원경 가지고 현미경이라고 하는 거 아냐?’
뭐 이런 마음으로.
그러니까 일말의 기대도 없이 책을 폈다.
그러자 현미경이랍시고 그려 놓은 그림이 하나 떴다.
기껏해야 엄지손가락만 한 물건은 어떻게 봐도 내가 아는 광학 현미경과는 차이가 있었다.
개발 연도를 보니까 무려 1600년대…….
개발자는 네덜란드에서 직물 상인을 했던 안톤 판 레벤후크.
‘덮을까?’
과학자도 아니고 그냥 직물 사고팔고 했던 사람이 거의 200년 전에 만든 물건이 무슨 현미경이겠나…….
“하아.”
실망감을 넘어 일종의 모멸감마저 밀려오는 가운데, 나는 책을 덮지 않았다.
왜냐.
책이라곤 이거 하나밖에 없으니까.
나가서 알아볼 방법도 있긴 하겠지만, 그러기엔 오늘 하루가 너무 길고 힘들었거든.
그런 어려운 일은 내일 하도록 하고 오늘은 그냥 황당한 지식이나마 편하게 집어넣기로 작정했다.
“으응?”
그렇게 결정하고 잔뜩 삭은 책을 읽다 보니 이상한 문구가 있었다.
‘200배가 넘는 배율을 자랑했다고……?’
200배?
내가 쓰던 광학 현미경의 배율이 얼마더라.
최대가 400이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하여간 200배면 충분했다.
바이러스를 볼 생각이야 추호도 없었으니까.
박테리아만 보면 된다고!
‘200배면 충분해. 넉넉하게 볼 수 있어. 박테리아 정도는!’
이게 거짓말일 수도 있긴 했다.
아무리 봐도 그렇게까지 뛰어난 현미경으로 보이진 않으니까.
하지만 이게 정말이라면.
그렇다면…….
사라락.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안고서 책장을 천천히 넘기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쓰레기에 불과해 보였던 책이 천하에 다시 없을 보물처럼 보였다.
한동안은 고생했다, 힘들었다더라, 뭐 이런 얘기만 나왔다.
슬슬 지루해지려는 참에 또 다른 인물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로버트 후크..
‘후크 선장?’
무식한 내 감상을 지엄하게 꾸짖듯, 로버트 후크라는 사람의 업적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단, 이 사람은 코르크 마개를 관찰해 그것이 아주 작은 벌집 모양을 이루고 있다는 걸 알아냈다.
그리고 이 구조를 셀이라 명명했다.
셀(Cell).
즉 세포.
싸하다.
이 새끼들 어쩐지 이미 뭔가 알고 있을 거 같아.
알고 있는데 개무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마구 들어.
“하.”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도서관과 그 주변을 돌아보았다.
모름지기 공부란 책을 통해 하는 것이 제일인 법이었다.
내가 학생이었던 시절에도 도서관은 늘 학생들로 부대꼈다.
교수가 되었을 때조차 나는 물론이거니와 나보다 위 그레이드의 선생님들도 책을 놓진 않았다.
허나…….
이 19세기는 분위기가 살짝 묘했다.
책을 보긴 하는데 그보다는 해부학이니 임상학이니 뭐니 하면서 실제로 뭔가 하면서 배우는 데 훨씬 초점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멍청한 놈들이 이미 알고 있는 지식들을 활용할 줄을 몰랐다.
‘레벤후크라…….’
그렇게 내 주변에 있는 19세기 놈들을 모조리 씹어 대며 책을 읽어 댔다.
그러던 중 또다시 그 사람의 이름이 나타났다.
레벤후크.
진짜 호기심이 대단한 양반이었던 모양이었다.
빗물을 받아 와서 그걸 들여다봤대.
거기서 대체 뭘 봤을까.
전자 현미경도 아닌데.
‘처음 보는 아주 작은 생물을 확인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심드렁하게 보던 나는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을 받았다.
처음 보는 아주 작은 생물.
이전까지는 곤충이 가장 작은 생물일 거라 여겼으나, 그것이 틀렸다는 걸 입증하는 증거였다고 한다.
즉 사람 눈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생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 레벤후크가 단순한 호기심으로 빗물을 쳐다보는 바람에 알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이게 뭘까.
뭐긴 뭐야.
박테리아지!
‘이미 볼 수 있었구나!’
심지어 혼자 보고 조용히 일기장에 쓰고 죽은 것도 아니었다.
이 사람은 무려 왕립 학회에 보고를 했고 거기서 교차 검증을 위해 앞서 말했던 로버트 훅이 재차 현미경으로 뭔가 들여다봐서 확인까지 했다.
이게…… 1600년대.
즉 지금부터 무려 2세기 전에 벌어졌던 일이다.
“이 시발놈들.”
근데 아직도 미아즈마, 미아즈마 이 타령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 아니지. 구라…… 구라일 거 같진 않은데.’
분통을 터뜨리려던 나는, 그 분통의 대상에 리스턴 박사도 들어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신기하게 분노가 후르륵 사라졌다.
그래, 이 책 들고 가서 화나면 뭐 하겠나.
지랄하지 말라고 하면서 책이나 찢겠지.
그보다는 훨씬 더 실증적인 증거가 필요했다.
‘현미경이 있어야 해.’
현미경만 있으면 된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당장 우리 손만 들여다봐도 보일 거거든?
물론 그 미생물과 미아즈마가 실은 같은 것이었고, 이게 병원균이라는 걸 입증하는 건 또 다른 얘기긴 하지만…….
하여간!
드르륵.
결심이 선 나는 결국, 제일 만만한 대상이 되어 버린 리스턴을 찾아갔다.
마침 리스턴은 내가 오늘 시행했던 수술을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 잘 왔네. 이게 이렇게 되었던가?”
“아…… 네. 아니, 여기는 이랬죠.”
“아. 아하. 그래. 흐음…… 여기는 왜 이렇게 생겼을까?”
리스턴이 의문을 표한 곳은 맹장이었다.
애매하게 막혀 있는 곳.
그게 왜 있는지는 21세기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면역 성숙과 연관이 있을 거란 얘기도 있지만, 괜히 있어서 아프기만 하잖아?
“모르겠습니다.”
“자네도 모르는 게 있나, 하하.”
모르는 걸 모른다고 했더니 의외로 되게 좋아했다.
그러더니 비로소 내가 굳이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지긋이 날 바라보았다.
잘됐다.
“형님.”
“응. 뭔가.”
“혹시 현미경을 좀 구해 볼 수 있을까요? 좋은 걸로요. 배율 높은 거 말입니다.”
“배율 높은 거?”
“네.”
“으음.”
리스턴은 턱을 긁었다.
하루 사이에 자라난 털이 부슥부슥 긁히는 소리를 냈다.
어쩜 사람이 저런 것도 무섭게 날까.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리스턴이 알다가도 모르겠단 얼굴로 말했다.
“그 장난감은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