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165)
검은 머리 영국 의사-165화(165/505)
165화 업턴 [1]
파리.
파리라…….
아마 21세기 한국 같았으면, 이렇게 결정이 되면 바로 비행기표부터 예매를 해야 했을 터였다.
그리고 뭐 거의 바로 떠날 수 있었겠지?
별다른 걱정도 안 했을 테고.
“피영. 조지프. 둘 다 업턴에 다녀오게. 부모님께 인사는 하고 와야지.”
하지만 이 시대에는 얘기가 좀 달랐다.
비록 중세에 비하면 여행길이 많이 안전해진 상황이라고 하지만.
또 런던과 프랑스를 오가는 뱃길엔 해적이 있을래야 있을 수 없는 해역이라곤 하지만.
그냥 멀리 왔다 갔다 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죽을 수 있는 시대였다.
‘아니…… 아니지. 사실 사람은 언제든지 죽을 수 있지.’
운 나쁘면 내일 당장에라도 죽을 수 있었다.
이게 21세기에서도 해당하는 말이긴 한데 그 말의 무게가 달랐다.
여기는 정말 나이가 어리건 젊건 상관없이 그냥 막 죽어 나가니까.
“네, 감사합니다. 아저씨.”
“감사는 무얼. 마차 준비해 놨으니까 그거 타고 가.”
“아이고.”
“아이고는 무슨. 그거 입에 착착 감겨서 요새 나도 모르게 하는 거 아나? 아무튼, 콘돔도 그렇고, 장갑도 의외로 많이 팔려. 해부하는 사람들이나 무덤 관련한 일 하는 사람들이 꽤 사더라고. 덕분에 돈 좀 만지고 있지.”
“그래도…… 아무튼, 잘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파리 가는 건 걱정 말고. 어디 가는 건 내 전문이니까, 빈틈없이 준비해 두겠네. 리스턴 박사랑 블런델 교수도 내가 준비하기로 했으니까, 자네들은 그냥 다녀와.”
“네.”
다행인 것은 내가 이 시대에 떨어진 것은 말할 것 없이 불행이되,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는 점이었다.
아니, 진짜 주변에 한 사람이라도 나쁜 놈이었으면 어쩔 뻔했어, 이거.
아저씨도 솔직히 입 싹 닫고 돈 한 푼 안 줘도 되는데 주고 있잖아?
심지어 이런저런 배려까지 해 주고 있다 보니 엄청 편안해졌다.
리스턴?
그 사람이 적이라면…….
‘와…….’
상상조차 하기 싫다.
무슨 일을 해도 별 소용이 없지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그 칼에 맞아 뒤졌을 수도 있다.
“야, 뭔 생각을 그렇게 해? 뭐 안 좋은 생각하는 거 같은데.”
상념에 잠겨 있으려니 조지프가 말을 걸어왔다.
원래도 친했지만, 여기 와서는 정말 가족처럼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보니 척 보면 아는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저런 예측을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긴 했다.
내가 여기 와서 혼자 있을 때 하는 생각이 막 밝고 희망차면 그것도 그것대로 이상한 일이지 않나.
“아니, 뭐. 파리 가는 게 좀 걱정이 돼서.”
“걱정? 뭐…… 프랑스 놈들이 나쁜 놈들이라고는 들었지.”
프랑스 놈들이 나쁜 놈들인 것도 걱정거리 안에 넣어야 할까?
글쎄, 잘 모르겠다.
나폴레옹도 돌아가셨잖아.
혁명도 벌어졌고.
음…….
그게 문제인가?
아니, 뭐 그때 영국이랑 전쟁도 했었고…….
‘감정이 좋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긴 하지.’
내가 잘은 몰라도 전 세계적으로도 식민지 두고 싸우는 상황이지 않겠나?
그렇다면 진짜 다 나쁜 놈들은 아닐 거란 얘기가 되었다.
원래 감정이 안 좋으면 그렇게 부르긴 하거든.
게다가 나는 리스턴 박사랑 정말이지 딱 붙어 지낼 예정이었다.
그렇게 하면 원한도 많이 쌓이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해결 못 할 원한들뿐일 테니.
누가 감히 리스턴에게 덤빌까.
“그래도 괜찮아. 학회 가는 건데 뭐 별일 있겠어?”
이제 보니 조지프가 좀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손발을 바들바들 떨고 있어, 아주.
‘하긴, 그럴 수 있지.’
나야 외국에 꽤 나가 본 몸 아닌가.
관광만 해도 동남아랑 일본, 홍콩 쪽으로 여러 번 나갔고…….
학회 차 나간 것까지 다 하면 어?
미국만 몇 번이냐.
그런 나에 비해 우리 조지프는 업턴 촌놈이잖아.
외국 나간다는 게 떨릴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는 배가 걱정이야.”
“배?”
어…….
그러고 보니까 나 배 타고 어디 가 본 적은 없는데.
약간 불안해지려고 한다.
조지프는 그런 나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아일랜드 다녀왔을 때 얘기를 해 주신 적이 있거든?”
“아, 나도 알긴 알아. 우리 아빠가 대신 이것저것 고치고 있었잖아.”
“그치. 덕분에 마음 놓고 다녀오신 건데…… 하여간, 배가 지옥이래.”
“지옥?”
21세기 한국에서는 지옥이라는 말이 꽤 많이 쓰였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 다들 믿는 사람들인데 지옥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겠나?
불경스러운 단어이기도 하고 두려운 단어이기도 했다.
헌데 갑자기?
“어어. 과한 비교가 아니래…… 아버지…… 아직도 가끔 자다가 깨서 나 배 아니지! 배에서 내렸지! 이런다니까. 사실 아일라 위스키 들여와서 장사했으면 더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었을 텐데 못 하시는 거야. 배 타는 게 너무 힘들어서.”
“허어.”
아저씨…….
그러니까 조지프의 아버지는 억척스러움을 형상화했다고 해도 좋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퀘이커 교도인 사람이 런던 근처에 자리 잡으려면 여간내기여서야 되겠나?
심지어 금주를 원칙으로 하는 퀘이커 교도인데도 불구하고 술을 팔았다.
그래서 퀘이커 교도들 사이에서도 경원시되는 사람이었다.
‘거의 작은 리스턴급이었군.’
이제 보니 그랬네.
대단한 사람이었어.
하긴, 그랬으니 우리 가족도 받아들여서 잘 보살폈겠지.
근데 그런 아저씨조차 배에 대한 공포가 생겼다니…….
‘아니, 근데 이제 증기선 아닌가? 증기선은 더 낫지 않나?’
생전에 배를 타 봤어야지, 이거.
타 본 배라고 해 봐야 유람선이 다다.
아, 선셋 요트도.
교수님이 보고 싶다고 해서 그걸 교수님이랑 봤네…….
별로 좋지 못했던 기억이라 바로 지우고, 친구들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야, 해군이 최악이다.
-야…… 배 타 봤냐?
-나 아덴만에 있다.
그래, 그랬지.
배 탄 애들이 다 그랬어.
그때는 쓸데없는 군부심이라고 생각해서 제대로 들을 생각도 안 했었는데, 좀 들을 걸 싶기도 했다.
“여어…… 다 왔습니다. 저도 여기 묵고 내일 같이 가려고 합니다. 뭐 어디 술 마실 곳 없습니까?”
배 얘기가 나오자마자 나와 조지프는 귀신같이 조용해졌다.
그렇게 침묵을 지키고 있으려니 어느새 업턴이었다.
한 세 시간 왔나?
이렇게 보면 엄청 가까운 거린데도 불구하고 몇 달 만에 왔다.
‘그래, 내가 진짜 엄청 바빴지.’
대개 바쁘단 말을 하면 핑계인데, 이번만큼은 아니다.
진짜로 바빴어.
“아, 저희 집이 양조장을 합니다. 술 마시고 싶으시면 그냥 드릴게요.”
“오? 아, 맞다. 그랬었지! 하하하!”
배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우거지 죽상인 우리와는 달리 마부 아저씨는 술 얘기로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잠잘 만한 데가 있을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어차피 술 취해서 잘 거라 아무 데서나 자도 괜찮다고 했다.
참으로 상남자의 시대다웠다.
우리는 그렇게 상남자를 뒤로하고 집으로 향했다.
엄밀히 말하면 각자의 집으로 향한 것이었지만 담장도 없는 데다가 노상 밥도 같이 먹어 버릇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한 테이블에 앉았다.
“태평아! 잘 지낸 거지? 종종 얘기는 들었어. 너 아주 대단하던데?”
일단 아버지가 기분 좋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수녀가 되려 했던 어머니를 배 안에서 부리나케 꼬실 수 있던 사람인 만큼, 여전히 미소가 매력적이었다.
몇 달 사이에 폭삭 늙었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다.
“김치 먹어라, 김치. 살이 왜 이렇게 빠졌어!”
어머니는 일단 김치를 내 입 안에 쑤셔 박았다.
전생이었다면 질색팔색을 했을 텐데…….
“너무 맛있습니다…….”
영국 음식, 그중에서도 런던 음식으로 혹사당했던 내 입에 김치는 거의 황홀함 그 자체였다.
“여기, 불고기도 있다.”
“불고기!”
조지프 너는 왜 난리냐 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런던에서는…….
이 새끼들 아무리 봐도 일부러 그러는 거 같은데, 소고기조차 맛없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명색이 셰프란 것들이 내놓는 거 보면…….
“어머니, 아버지…… 저희가 진짜 먹은 음식들이 뭐냐면요.”
조지프는 한국인이 빙의한 것처럼 김치와 불고기 그리고 김치전에 각종 나물을 흡입하면서 한탄을 시작했다.
아마 여기 오기 전에 원장님이 사 주셨던 만찬을 떠들 작정일 것이 뻔했다.
그래, 그거 충격이었지.
“오이…… 오이 생선…….”
“그게 무슨 말이냐.”
이어지는 황당한 말에 아저씨도 당황했다.
영국 사람이지만 오래전부터 어머니의 한국 음식에 길들어져 버린 그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조합이 튀어나와서 그랬다.
“그걸로 젤리를…….”
“너네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했던 모양이로구나.”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버지! 그들은…… 그들은 그걸 맛있다고 먹어요!”
“말이 되니.”
아저씨는 하하하 웃더니, 얘가 런던에 갔다 와서 그런가 농담이 늘었다고 했다.
조지프는 그 말에 가슴 언저리를 세게 후드려 쳤다.
그래 봐야 소용없었다.
그때 그 자리에 있던 나조차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괴악한 음식들의 향연이었으니까.
“하하, 농담을.”
“이놈아, 이제 지겨워.”
조지프는 이런 반응에 지친 나머지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체념의 뜻을 담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튼, 니들도 이제 어른인데 술이나 먹지.”
아저씨는 그런 우리를 바라보다가 웃차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어어! 조심해! 그러다 또 배 아플라!”
응?
이건 또 뭔 소리지?”
뭘 드는데 왜 배가 아파?
내 의문 어린 얼굴을 확인한 아버지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형님, 형님. 제가 들게요.”
“에헤이. 아직 힘은 내가 제일 좋아.”
“배가 아프잖아요. 그거 막 불뚝 튀어나오는 게 제가 봐도 이상하던데.”
튀어나와?
“어…… 평아, 너는 왜. 너는 약골이잖니. 들어가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일어나 있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숫제 아버지랑 아저씨 사이에 들어가 있었다.
나도 나름 많이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아저씨 옆에 서니까 여전히 좀 작았다.
과연 리틀 리스턴…….
“아니, 아니. 배를 좀 보려고요.”
“네가 보면 뭘…… 아, 의사지. 교수 됐지?”
리스턴은 아니, 아저씨는 고개를 저어 대려다 말고 배부터 깠다.
“근데 하필 배라서. 여길 건드리면 죽잖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19세기에서는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그래, 여기서는 배 아니라 그냥 아무 데도 안 건드리는 게 맞지.
하지만 난 예외다.
“전 아니에요.”
“하하. 이 녀석. 나도 너만 할 때가 있었지. 내가 만든 술이 제일 맛있다고 자부했었는데…… 그 망할 놈의 프랑스 와인을 먹고 보니 좀 다르긴 하더구나.”
아저씨는 내 말을 치기 어린 젊은이의 만용이라 여기고 있었다.
리스턴을 데려올 걸 그랬나.
하고 있으려니, 의외의 구원군이 있었다.
“아버지! 평이 말이 맞아요. 얘 진짜 명의예요.”
“이놈들이 쌍으로…….”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교수가 되었겠어요. 게다가 앨프리드라고 알죠?”
“알지. 너네 선배라며.”
“그 선배 배 아파 죽을 뻔했을 때 살린 것도 평이에요. 지금 리스턴 박사님하고도 배 수술 연구 중이고요.”
“허어…… 그래? 그럼 어디 한번 볼래?”
그렇게 나는 아저씨의 배를 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