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172)
검은 머리 영국 의사-172화(172/505)
172화 파리 [2]
“흐음…… 확실히 교수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렇지? 저 단면을 보라고. 한 번에 돌려 자르지 못했어.”
“네. 맞습니다.”
“그리고 저기 찌른 곳을 봐도…… 이렇게 보면 깊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막상 더 가까이에서 보면 아마 얕을 거야.”
리스턴 교수는 참으로 당당한 태도로 말을 이어 나갔다.
보통 이런 모습을 볼 때면 참담함을 느꼈었는데 오늘은 좀 달랐다.
정말이지 전문가적인 포스가 유유히 넘쳐흐르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사람에게 칼을 제일 많이 대 본 사람일 테니까.
이렇게 말하니까 좀 으스스하게 느껴지는데, 이건 비단 19세기뿐 아니라 21세기를 대입해 봐도 그럴 터였다.
막말로 의사 말고 사람 몸에 그렇게 자주, 또 오래도록 칼을 대 본 사람이 있겠나?
아마 전설 속의 영웅들이라 해도 평생 직접 칼로 베어 넘긴 사람이 많아야 기백일 텐데…….
리스턴은 거의 매달 수백은 처리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우리가 아니, 나는 빼고 나머지가 난상 토론을 시작하자 사람들이 주변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흩어지는 사람들 중에 가족 단위의 관람객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 나를 놀라게 했다.
심지어 옷차림이나 몸에서 풍기는 냄새 등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다들 상류층이었다.
하긴, 남의 시신 구경하러 올 만큼 한가하고 돈 많은 사람들이 상류층들이겠지…….
아.
지금 외친 것은 경찰인지 경비인지 하는 사람이었다.
미성년자도 아니고 기껏해야 유치원이나 다녀야 될 거 같은 나이의 애들이 시신 보고 있을 땐 가만히 있다가 이제사 나타난 것이 좀 충격이긴 한데…….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하지 않던가?
나는 짐짓 죄를 뉘우친다는 표정으로 그의 앞에 섰다.
“아, 이거 죄송합니다.”
영어로 씨불이고 나서야 여기가 프랑스고 프랑스 사람들은 영국인이 프랑스 사람들을 미워하는 만큼이나 영국인을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뭐야…… 이건?”
아, 그리고 내가 동양인이라는 사실도.
그러고 보니까 리스턴 박사님하고 다닐 때는 그 누구도 감히 나를 이런 눈으로 쳐다보지 못하고 또 항상 다니는 곳만 다니다 보니까 자각도 못 하고 있었네.
“아. 하하. 이거. 런던에서 오신 의사분들입니다. 이번 학회 참석차…….”
“여긴 왜?”
분위기가 요상하게 돌아가는 듯하자, 마부가 급히 나섰다.
영국인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파리에 자리 잡은 사람답게 넉살 좋은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여간, 의사라는 직업은 시대를 막론하고 수상해 보이진 않는 법이었다.
놀랍게도 19세기에도 그랬다.
뻔질나게 사람들을 죽이는 직업임에도…….
덕분에 경비도 조금은 누그러진 얼굴로 물었다.
“모르그 같은 곳이 런던에는 없거든요.”
“아하. 하긴 런던에 뭐 이런 선진 문물이 있겠나. 영국 놈들은 예술적인 흥취가 전혀 없지.”
“그러니까요! 하하. 아무튼…… 이분들 중 저기 저분 보이십니까?”
“경호원인가? 범상치 않아 보이는데.”
“아, 아뇨. 닥터 리스턴이라고…….”
“아!”
“아십니까?”
“소드 마스터 리스턴이라면 알지. 영국인이지만 존경할 만한 무인이라고 들었네.”
“그…….”
프랑스어까지 익히진 못했다 보니 뭔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뭔가 분위기가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는 건 알겠다.
마부의 표정이 오히려 묘하고 경비는 되게 밝아졌어.
“그렇죠. 무인이죠.”
그러다 갑자기 납득하는 얼굴이 되었는데, 나 이 표정 얼마 전에 본 적이 있다.
언제냐면…….
그래, 도적들한테 습격당하고 났을 때.
-으아아아! 가진 거 다 드릴 테니 제발 목숨만!
엄청 비명을 지르더라고.
그에 비해 우리 의사 일행은 덤덤했다.
딱 봐도 다섯밖에 안 되는데, 리스턴은 거칠기로 소문난 뱃사람 무리조차 열 놈도 넘게 맨손으로 두들겨 팼거든.
아니, 칼집으로?
아무튼, 그때 아무렇지도 않게 제일 먼저 달려들던 놈 팔을 단칼에 끊었는데 그때부터 저 표정을 지었더랬다.
얼빠진 표정이라고 보면 될 거 같다.
“근데 그 훌륭하신 분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건가?”
“아…… 범인을 유추하고 있습니다.”
“응? 탐정이신가?”
“아, 아뇨. 그…….”
마부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간신히 토론에 끼지 않고 그의 주변에 맴돌고 있던 나를 발견하고 SOS를 쳤다.
나도 슬슬 뭔 대화를 하고 있는지 궁금했던 참이다 보니 자연스레 끼어들었다.
“뭐래요?”
“할 얘기가 많지만…… 요약하면 왜 범인이 누군지 추리하고 있냐고 합니다.”
“아하. 통역 좀 해 주시겠어요?”
“네네.”
그래, 누구라도 품을 것 같은 질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여기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질문을 하면 안 된다.
내가 비록 프랑스 말을 못 하지만, 그럼에도 여기 있는 인간들이 저 시신 보면서 뭔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겠거든.
다 코난 놀이하고 있잖아?
“저와 리스턴 박사님은 런던에서도 종종 경찰들을 도와 범인을 잡곤 합니다.”
“오.…… 그게 정말입니까? 어떻게……?”
“숙련된 외과 의사만큼 상처를 잘 살필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 외과 의사로군요. 무인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무인도 맞는데, 외과 의사로 더 유명…… 아니, 아닌가. 아무튼, 그렇습니다. 얘기 들어 보시겠어요?”
“그러죠.”
얘기를 하다가 깨달았는데 경비가 아니라 경찰인 것 같았다.
알아 둬서 나쁠 게 전혀 없는 사람이란 얘기다.
특히 지금처럼 파리 분위기가 뒤숭숭할 때는 더더욱 그럴 거 같았다.
7월 혁명…….
내가 이과라 세계사를 겉핥기식으로만 배우긴 했는데, 딱히 혁명 이후로도 뭔가 달라지는 게 없거나 더 안 좋아져서 흉악한 분위기가 지속되었다고 알고 있거든?
‘아니, 꼭 그렇지 않다고 해도…….’
런던만 봐도 경찰은 도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실제로 도움을 좀 받고 있지 않던가.
우리가 인마, 너네 서장 어머니 다리도 잘랐어! 이러면 다들 혼비백산해 아주.
“뭐지?”
“파리 경찰인 거 같은데…… 추리에 도움을 받고 싶다고 합니다.”
해서 나는 리스턴 박사에게 경찰을 끌고 갔다.
경찰은 눈앞에서 리스턴 박사를 마주하게 되자 살짝 오금이 저리는지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도 그를 비난하진 않았다.
저건 현명한 거지 겁이 많은 게 아니니까.
“아하. 그래, 안 그래도 몇 가지 알아낸 것이 있어. 이놈의 유리창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면 더 좋을 거 같은데.”
“아,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 잘됐네. 들어가지.”
“네.”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파리의 시신 안치소 뒤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주변에 있던 구경꾼들은 다들 우리를 아주 부럽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21세기에는 검시관이 기피 과가 된다는 것을 이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아니, 사실 인류 역사에서 시신을 다루는 직업이 환영받았던 적은 딱히 없었다는 걸…….
“여기 있습니다.”
“아후, 냄새.”
“밀폐된 공간이라서요.”
“아니, 대체 왜 이런 걸 전시하는 건가?”
리스턴의 말에 경찰의 입술이 잠시 씰룩거렸다.
무언가 그들의 프라이드를 건드린 모양인데, 별 상관없었다.
총부리라도 겨누고 있는 게 아닌 이상 리스턴은 상대의 무엇이 되었건 간에 건드려도 되는 사람이었다.
“그, 일단 추리를…….”
“아, 그래. 뭐 프랑스인들의 악취미를 지금 뭐라 할 시간은 아니지.”
리스턴은 악취미에 대해 뭐라고 하면서, 시신을 향해 다가갔다.
냄새가 좀 나긴 했는데 그래 봐야 해부 실습실에 비하면 별거 아니었다.
일단 시신이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닌지, 썩은 내가 나진 않아서 그랬다.
마부야 통역만 가능할 정도로 떨어져 있었지만 혹독하게 단련 받은 우리는 망설임 없이 다가갈 수 있었다.
이번에는 나도 그랬다.
어차피 얼레벌레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뭔가 도움이 되긴 해야 할 거 같은 강박관념이 생겨서 그랬다.
‘이걸 또 구경하고 있군그래…….’
한 가지 신경이 쓰이는 것이 있다면 유리창 너머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째 아까보다 사람이 더 늘었는데, 수십 명 단위가 아니라 수백 명 단위도 넘어 보였다.
“여기 보게, 평.”
“네.”
“보면…… 칼이 그렇게 깊이 들어가지 못했어.”
리스턴은 능숙하게 장갑을 낀 손으로 상처 안으로 쑥 집어넣었다.
그러곤 절개 틈을 벌렸는데 여전히 복강은 보이지 않았다.
그 말은 이걸로는 살가죽만 베었다는 얘기였다.
“그렇네요?”
“그에 비해 여기. 네 번을 찌르는 중에 딱 한 번만 안에 닿았는데…… 이게 하필이면…….”
“대동맥을 건드렸군요.”
“그래, 이래서 죽은 거야.”
“가만…… 근데 이거…….”
상처를 보다 보니 좀 이상했다.
너무 수직이야.
이 사람도 서 있고, 다른 사람도 서 있었다면…….
보통 이렇게 될 수가 있나?
법의학 지식이라고 해 봐야 학생 때 들은 게 다지만, 그럼에도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단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러나?”
“누운 상태에서 찌른 거 같은데요?”
“누운 상태에서?”
“네. 네 번 모두 방향이…….”
“아, 그렇네. 저항을 하지 못했나? 아니면 죽이고 찔러……? 이상한데. 멀쩡한 사람 팔다리를 이렇게 자를 수는 없지. 죽이고 잘랐을 거야.”
그래, 리스턴의 말이 사리에 맞다.
하지만 누가 자신을 네 번이나 찌르는데 가만히 누워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마취라도 하지 않은 이상…….
마취?
“이거 혹시 마취를 하고 찌른 건 아닐까요?”
“마취? 아…… 그래. 그렇군. 그랬을 거 같은데.”
“근데 가스로 어떻게 사람을 동의 없이…….”
“아니, 파리에서는 에테르로 마취를 한다고 들었네.”
“아…….”
“이놈들은 우리가 뭐 하면 무조건 반대로 하거든.”
아.
그건 안다.
자동차도 영국이 프랑스보다 좀 늦게 성행하게 됐는데, 프랑스가 먼저 우측통행을 법제화해서 영국이 좌측통행을 시작했다는 거 어디서 들었어.
아…… 이건 영국이 거꾸로 간 거긴 한데.
뭐…….
양쪽이 비슷하지 않겠어?
“아무튼, 그거라면…… 손수건에 적셔서 마취를 한다거나 혹은 어딘가에 섞어서 먹이거나 할 수 있었겠지.”
“아…… 그럼 범인은 에테르를 다루는 놈이거나 최소한 최근에 에테르를 산 놈이겠군요?”
둘의 추리를 듣고 있던 경찰이 눈을 크게 떴다.
그들도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기는 했지만, 이 시기 수사법이라는 게…….
그냥 주변 돌아다니면서 목격자 찾는 게 다이지 않던가.
범인 검거율이라는 게 진짜 형편없었다.
괜히 사람들이 셜록 홈즈와 같은 명탐정을 고대했던 게 아니란 얘기다.
“이건 너무 커다란 힌트로군요. 감사…… 감사합니다.”
“그래, 잡아 보게. 잡아 오면 알려 주고.”
“왜, 왜요?”
“그냥 얼굴이나 보게. 왜. 안 되나?”
“아니…… 아닙니다. 제일 먼저 보여 드리겠습니다.”
하여간, 경찰은 이제야말로 딱 잡을 수 있겠다는 얼굴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제야 마부는 참고 있던 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발 가시죠. 제가 여기 잘못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