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180)
검은 머리 영국 의사-180화(180/505)
180화 대재앙 [2]
“잠시…… 잠시 제 말을 좀 들어 주시오.”
아비규환 그 자체인 곳을 향해 장 피에르가 걸어갔다.
아마 혼자였다면 불가능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지금 리스턴과 함께였다.
“깡패…….”
“청나라 갱까지? 이보게, 장!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그리고 청나라 갱도 함께였다.
아편 전쟁이 있기 전까지 서구 열강에게 청은 그야말로 강대한 나라 그 자체로 인식되지 않았나?
아무래도 다른 인종들에 비해 동양인들에 대한 차별이 덜한 것도 그런 이유가 있지 않나 싶었다.
하여간, 이 자식들이 차랑 도자기 같은 것에 환장하잖아?
그런 나라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이 왔으니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아니…… 아니지. 난 당당한 조선 사람인데.’
잠깐 깡패 역에 몰입해서 그런가 엉뚱한 말을 했는데, 하여간, 저들은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비켜.”
“으읏.”
리스턴 박사님 덕분이었다.
그는 그저 눈빛만으로도 막아서고 있던 이들을 홍해가 갈라지듯 쏴아 밀어내는 힘을 발휘했다.
그렇게 장 피에르와 우리는 무리의 중앙에 당도할 수 있었다.
뒤늦게 따라온 경찰이 그 위엄 넘치는 모습을 보며 한마디 했다.
“역시…… 장난이 아니군요. 소드 마스터의 위력인가…….”
정신이 좀 없어 보였는데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다들 한두 바퀴 돌았으니까.
“자…… 내 말 좀 들어 주시게.”
“그렇지 않아도 들으려고 왔네.”
“바쁜 사람들 붙잡고 이게 대체 무슨 짓이란 말인가.”
“콜레라야, 콜레라! 지금도 인내심이 부족한 환자들이 자꾸 물에 손을 대고 있다는 연락이 온다네!”
하여간, 장 피에르는 그간의 설사와 방금 맞은 탓에 쉬어 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이런저런 대꾸들이 잇따랐다.
마부는 그걸 바로바로 통역을 해 주었다.
“아휴.”
나뿐만 아니라, 여기 있던 모든 일행이 한숨을 쉬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란 점이 중요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혼자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
미아즈마의 개념을 이제 이들도 조금씩 진짜 병원균의 개념과 가깝게 잡아 가고 있으니까.
“일단 들어 보시게들!”
장 피에르는 그런 이들을 향해 다시 한번 외쳤다.
보통 저쯤 되면, 그러니까 지금의 장 피에르처럼 딱 봐도 죽다 살아난 몰골의 사람이 외치고 있으면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일 터였다.
예의까지 갈 것도 없이 그냥 사람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
하지만 이곳 프랑스 파리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우우.”
“우.”
“기요틴!”
“기요틴은 너무 갔네. 그냥 묶어 두세!”
내가 어지간하면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진짜로 지랄이 났다.
무슨 말 하는지 들어 보지도 않고 기요틴이라니?
이 자리에서 통역 없이 알아들은 유일한 단어가 기요틴이라니…….
“이 시발.”
그때 리스턴이 나섰다.
딱 방금 전까지 구두끈을 묶고 있었는지 어쨌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참이다 보니 임팩트가 있었다.
장 피에르보다 머리 하나 더 큰 사람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그리고 동시에 험악한 얼굴을 하고는 좌중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사위가 조용해졌다.
그래도 꽤 위치가 있는 사람이 피 토하는 심정으로 외치고 있을 때는 그렇게 시끄럽더니 리스턴 한 방에 이렇게 돼?
‘프랑스보다는 영국이 나은 거 같기도…….’
마음이 빠게트에서 홍차 놈들 쪽으로 확 기우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리스턴 박사님은 어리둥절한 얼굴의 장 피에르를 향해 말했다.
“이제 내가 말하면 통역해. 이 새끼들 이거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그래.”
“어…….”
장 피에르의 얼굴이 좀 복잡 미묘해졌다.
아마 프랑스인들은 지성인이니 대화가 통할 거란 말을 하고 싶은 거 같은데 그렇게 말하기엔 방금 전까지 보여 준 모습이 너무 엉망이지 않나.
그렇다 보니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떡였다.
“자…… 우리 따라서 물 먹일 놈들 우측. 아닌 놈들 좌측. 좌측에 서는 놈들은 나랑 독대할 각오하고.”
“진짜 이렇게 말하나?”
“말하게.”
“음. 알았네.”
장 피에르의 말에 다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항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몇몇 있기는 했지만, 그냥 없다고 쳐도 될 지경이었다.
나랑 눈이 마주쳤는데도 바로 깔더라고.
청나라 어쩌구 하면서.
하여간, 그렇게 반으로 갈라졌는데 당연하게도 좌측이 훨씬 많았다.
“이 새끼들. 미아즈마의 개념에 대해 알려 주도록 하지. 잘 들어라, 빠게트 놈들.”
“어…….”
“대충 바꿔서 말해.”
“알았네.”
리스턴은 그런 이들을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
영어로는 쌍욕이 많이 섞여 있었는데 프랑스어로 번역될 때는 어떨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 좀 아쉬웠다.
“미아즈마는 공기가 아니라 어떤 생물이야! 살아 있는 생물!”
“우우.”
“시, 신성 모독이다!”
“수백 년간 이어져 내린 가르침을 감히!”
하여간, 리스턴이 하는 말은 구구절절 옳은 말뿐이었다.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 반발이 잇따랐다.
이제 보니 우리 프랑스인들도 나름 강단이 넘치는 모양이었다.
화난 얼굴의 리스턴에게 감히 삿대질을 하는 놈들이 있다니.
물론 숫자가 너무 많기도 하고, 아마 리스턴도 때려눕힐 생각은 없어 보이다 보니 유혈 사태가 벌어지진 않았다.
이따위 새끼들이라 해도 의사는 의사지 않나.
돌아가서 치료를 해야 한다 이 말이었다.
“현미경을 통해 보이는 미생물에 대한 보고는 이미 수 세기 전부터 있었소! 우리가 그것을 무시했을 뿐!”
“그게 병을 일으킨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지 않소!”
“있소. 우리가 실험을 했지. 피에르?”
“아…… 우리가 그 물을 마셨소.”
“무슨 물?”
“센강.”
“아니…… 그냥? 아니면 묵혔다가.”
“그냥.”
“허.”
센강을 마셨다는 말에 드디어 사람들의 고개가 장 피에르 쪽으로도 쏠리기 시작했다.
19세기 파리 사람들에게도 센강의 물을 냅다 마시는 건 용기가 아니라 미친 짓의 일환으로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그의 용기에 찬사를 표하는 얼굴을 한 채, 군중들은 숨을 죽이고 들었다.
“여기 영국에서 온 친구들은 그 물을 끓이고 증류해서 먹었네. 현미경으로 보니 그…… 미생물이라고 해야 하나?”
“미아즈마.”
“아, 그래. 미아즈마가 확실히…… 거의 없었네. 그에 비해 우리가 먹은 물은 미아즈마가 득실거렸지. 그 결과…… 우리는 하나도 빠짐없이 장염에 걸리고 이들은 멀쩡했네.”
리스턴과 장 피에르의 말에 군중들이 다시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몇몇은 슬금슬금 우측으로 옮기기도 했다.
과연 도전 정신이 미쳐 버린 시대이니만큼 직접 마셔 봤다는 데에 대한 리스펙트가 있었다.
아마 내 생각대로 후향적 역학 조사나 했다면 이만큼의 설득력은 결코 얻을 수 없었을 게 뻔했다.
‘진짜 스승.’
나는 다시금 리스턴을 꼭 닮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추이를 살폈다.
하나둘 넘어가나 싶더니 곧 꽤 넘어가게 되었는데, 그때 누군가가 나섰다.
“잠깐.”
그러자 주변에 있던 의사들이 화들짝 놀라는 것이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장 피에르도 놀랐다.
“누군데?”
“코라이라고…… 몽펠리에 대학을 나와서 파리에서 활동 중인 의사일세. 히포크라테스 연구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자야.”
미친.
2천 년도 더 된 사람을 왜 연구한단 말인가.
부족한 지식과 경험에도 굴하지 않고 질병을 탐구했던 정신에 대한 연구라면 얼마든지 응원하겠지만, 지금 이 인간들이 말하고자 하는 건 그게 아닐 게 뻔했다.
“미아즈마가 생물이라니…… 대관절 하나님께서 왜 병을 일으키는 생물을 만든단 말인가.”
“흑사병을 쥐가 일으킨다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쥐는 그 자체로 사악한 존재일세! 그리고 자네의 말에는 어폐가 있어!”
“음!”
내 생각과는 별개로 코라이의 위엄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리스턴마저 입을 다물게 될 줄이야?
“잘 듣게! 마침 흑사병을 논했으니 말이야. 쥐가 옮기는 것처럼 보일 뿐이야. 사실은 그 쥐들이 창궐하는 곳에서 나는 악취가 병을 풍기는 거야! 흑사병 환자들이 쥐에 직접 닿았던가?”
“그건…… 그건 아니오.”
심지어 설득이 되어 가고 있었다.
기세등등하게 외쳐 대던 리스턴이 이렇게 쭈글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답답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 나서는 것도 위험한 일이었다.
프랑스인들이지 않나.
편견일 수도 있는데…….
어쩐지 단두대에 끌려갈 거 같았다.
“그래! 그렇기에 미아즈마는 공기라는 이론이 성립하는 것일세!”
“으으음!”
공기라는 말을 듣자, 리스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곤 주먹으로 옆에 있던 벽을 꽝 하고 쳤다.
그러자 수백 년은 족히 견뎌 왔을 석재로 된 벽 일부가 가루가 되어 날렸다.
“뭐, 뭐 하는 건가.”
“그 자리에서 가루가 다 보이오?”
“아니…… 그…….”
“보이지 않겠지. 하지만 가루는 존재하오.”
나는 그냥 성질부리나 보다 했더랬다.
아니면 성경에 나오는 삼손처럼 이 건물 무너뜨려서 다 죽일 작정인가 싶기도 했고.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나조차 깜짝 놀랄 만한 통찰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아마 우리가 확인하지 못할 만큼 작은 미아즈마가 공기 중에 섞여서 흑사병을 일으킨 것이겠지. 그에 비해 이 콜레라는! 물에 섞여 있는 것이오. 그 차이가 있을 뿐…… 결국, 미아즈마인 것은 같소!”
지금 여기서 리스턴이 하는 말이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또 인류 의학사에 있어 지금 이 장면이 얼마나 역사적인 장면인지 이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갑자기 외로워졌다.
아무리 봐도 나뿐일 거 같아서.
‘호흡기 질환…… 비말 또는 공기 감염과 수인성 질환을 구분해서 말하고 있어…… 이 개념이 실제로 생기게 되는 건 20세기…… 그것도 초중반 이후인데.’
간단한 힌트만을 주었는데 벌써 여기까지 왔다고?
나는 그만 대견한 마음이 들어서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말았다.
역시나 나만 그랬다.
다른 놈들은 멀뚱히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우리 일행인 자들도 그랬다.
괜찮았다.
리스턴이 꺼낸 얘기이니만큼 나중에라도 설명해 주면 될 테니까.
“무슨 개소린가?”
“개소리가 아니라…… 합당한 추론의 결과요!”
“히포크라테스가 관뚜껑 열고 나오겠구만그래.”
이 대단한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코라이를 비롯한 여럿은 고집을 부렸다.
다행인 것은 그 와중에도 몇몇이 더 우측으로 옮겼단 점이었다.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했어도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는 얘기겠지.
생각 같아서는 나머지 새끼들도 다 끌고 오고 싶었지만, 놀랍게도 리스턴은 여기서 됐다는 식으로 돌아왔다.
“교수님?”
“응? 아, 저놈들?”
“네.”
“알아서 실험을 해 보겠다는데 잘됐지 뭔가. 내 이번에 보니 우리 템스강도 만만치 않은 거 같은데…… 곧 런던에서도 이런 일이 없으리란 보장이 없네.”
“그럼 더더욱…….”
“아니, 아니지. 이번 기회에 우리가 옳았고, 저놈들이 틀렸다는 걸 환자 생존율로 입증하게 된다고 생각해 보게. 설득에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될 거야.”
“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