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204)
검은 머리 영국 의사-204화(204/505)
204화 이거…… [1]
“아, 왔나!”
제이미 경은 일부러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좀 기분이 그랬다.
애처롭다고 해야 하나?
목소리가 가늘어…….
그리고 잘 보잖아?
덥수룩하게 난 수염 저거…….
붙인 거다.
“각하. 오랜만입니다! 소문은 역시 믿을 게 못 되는군요. 여전히 헌앙하십니다!”
가까이에서 보니 한눈에 보였다.
하필 내가 또 관찰력이 좋은 사람이잖아?
게다가 고환이 사라졌을 때, 그러니까 남성 호르몬이 사라졌을 때 생길 수 있는 변화에 대해 아주 잘 안다.
‘어깨가 좁아졌군…… 근육이 빠지고 있어. 그에 비해 지방은 늘었고…….’
목소리가 얇아진다거나, 수염이 빠진다거나 하는 건 어찌 보면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사는 데 지장 없잖아.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가뜩이나 근육 빠지는 와중에 그게 가속화되는 건 어떻게 봐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소불알에서라도 빼서 놔줄까.’
잠깐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안 될 거다, 아마.
아니, 되려나?
나중에 한번 실험을 해 보긴 해야겠다.
이런 지체 높은 귀족한테 한 번에 하기는 좀 그러니까…….
그래, 전에 여기 데려온 바 있던 휴인지 나발인지 했던 노인을 꼬셔 봐야겠다.
“하하, 역시 소문난 명의는 다르군그래!”
속마음과는 전혀 다른 내 아부에 제이미 경은 기분이 진짜로 좋은지 진심으로 웃었다.
그러느라 굵게 내던 것을 잊었는지 새된 목소리가 잠깐 튀어나왔다.
하마터면 표정이 변할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리스턴조차 입술 꽉 깨물고 참고 있는데 내가 이상한 짓을 해서야 되겠나 하는 일념 하나로였다.
“이건 근데 다 뭔가?”
물론 참는 것 외에 다른 행위를 할 만큼의 심적 여유가 없다 보니 나도 리스턴도 그저 닥치고만 있었다.
자연히 지금 입을 연 것은 대미언 경이었다.
그는 그냥 기분이 좋아 보였다.
사실 똑같이 전립선 비대증으로 고생하던 몸 아닌가.
헌데 하나는 좋지 못한 의사를 만난 탓에 불알을 잘랐고, 자신은 구멍만 뚫고 말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긴 했다.
“아, 이거.”
그에 비해 제이미 경은 허세라고 해야 할까.
자신의 우울함을 감추기 위해 미친듯이 애를 쓰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유행 중이라는구만.”
“엄청 비싸겠는데, 그럼?”
이런 말도 있지 않나.
갑자기 예정에 없던 과소비를 했다면 자기감정부터 점검해 보라는 말.
이때야 뭐 우울증이란 단어조차 없을 때이니 제이미 경이 뭘 알겠나?
그나마 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 그런가 해소 차원에서 돈을 엄청 쓴 모양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프랑스제는 뭐가 되었건 다 비쌌다.
영어 쓰는 게 당연했던 시절에서 돌아온 내게는 놀라운 일인데, 아직 유럽 공용어가 프랑스일 정도로 세계의 중심은 여전히 프랑스였다.
“비싸지…… 하지만 보게. 이 묘한 색감을.”
“보고 있으니 과연 묘하긴 하군그래. 프랑스 놈들이…… 다른 건 몰라도 이런 물건은 참 잘 만든단 말이지.”
특히 문화적으로는 중심이라는 말도 좀 진부할 지경이었다.
국력보다 소프트파워에서 영국은 프랑스에 상대가 안 되었다.
그래서 그럴까?
견원지간을 넘어 철천지원수 수준인 주제에 속으로는 프랑스제라고 하면 환장했다.
지금 이 두 귀족의 대화만 해도 그렇지 않나?
아니, 둘만이 아니다.
주변에 있던 모두가 프랑스에서 유행하는 물건이라는 말에 다들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뭐…… 멋있긴 한데…….’
녹색 카페트는, 그중에서도 이렇게 고급스러운 녹색 카페트는 21세기에서 살다 온 나조차 처음 본다.
사실…….
녹색이라는 게 자연에서는 정말 많이 관찰되는 색인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패션에서는 덜 쓰이는 색이지 않나?
약간 불길한 느낌도 주긴 했다.
고블린도 오크도 다 녹색 피부잖아.
그것만 그런가?
독도 녹색이다, 보통은.
‘독……?’
독이 왜 녹색일까?
잠깐 궁금증이 들었지만, 이내 잦아들었다.
사실 나도 비싸고 멋진 물품에 대한 동경이 있긴 해서 그랬다.
물론 단지 그거 때문에 고민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좀 부산스럽게 하지 말고 가만히 있게.”
“형?”
“나 부자잖나. 이제 슬슬 결혼도 해야지. 마음에 드는 여인에게 저런 녹색 카페트를 선물한다면 어떻겠나? 누구라도 넘어오지 않겠어? 다른 사람도 아닌 리스턴의 청혼인데.”
“아…… 그렇긴 하죠.”
리스턴이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
그래, 뭐…….
리스턴이 청혼하면 거절하기가 참 그렇긴 할 터였다.
온 가족이 다 뒈질 수도 있잖아.
아니, 죽기만 하면 다행이다.
팔다리부터 잘렸다가, 죽고 나서는 해부 실습실에 올 수도 있었다.
‘그……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지. 사실.’
잠깐 생각이 잘못 돌아갔는데, 아무튼.
우리는 조용히 두 귀족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잘 보게. 이 색을. 이걸 셀레그린이라고 한다네.”
“셀레그린이라……?”
“지금까지의 녹색하고는 좀 다르지? 오묘한 아름다움이 있는데…… 여기 내 아내의 드레스를 좀 보게.”
“반가워요, 공작님.”
“하하, 아름다우십니다. 드레스가 참 잘 어울리네요.”
이제 카페트에서 넘어가 드레스 얘기가 한창이었다.
드레스도 묘한 녹색이었다.
카페트랑은 또 다른 고급스러움이 있었다.
제이미 경의 사모님은 안 됐지만 빈말로도 아름답다고 하긴 어려운 얼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얼핏 보면 참으로 우아한 느낌을 주었다.
“이건 에메랄드그린일세.”
“에메랄드? 설마 보석을 빻았나?”
“하하하! 아무리 부자라도 그런 짓을 할 수야 있나. 잘은 모르지만 특이한 재료들을 섞어서 만들었다는군그래.”
“아하…… 그렇군. 근데 정말 에메랄드같이 묘하군. 색조가 다양하기도 하고…….”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대미언 경도 조만간 하나 장만할 것이라는 거.
아니, 그뿐만 아니라, 오늘을 기점으로 해서 이 런던 사교계에서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은 전부 저 녹색 드레스와 카펫을 살 것이 뻔했다.
한국 살 때는 우리나라만 그렇게 유행에 민감한 건 줄 알았는데 와 보니까 다 똑같더라고.
특히 여긴 상류층일수록 더하다.
남들이 뭐라도 하면 자신도 무조건 해야 해.
안 그러면 뒤처지는 기분이 든다나, 뭐라나.
“드레스도 사야겠군.”
아, 상류층만 그런 건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상류층이란 질시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대개 동경의 대상이 되지 않나.
그들이 뭔가 하고 있으면 그게 뭐가 되었건 더 있어 보이는 법이었다.
리스턴이 따라 해 보고 싶어진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정점은 이 벽지에 있지.”
“그렇지 않아도 내 물어보려 했네. 이것도…… 그럼 프랑스에서 건너온 건가?”
“하하. 프랑스 화가에게 직접 의뢰했네. 그자가 이 꽃 그림을 그리고, 그걸 다 인쇄한 거야. 지금이야 여기 한 군데지만, 두고 보게. 곧 우리 집안 전체가 이 화사한 녹색으로 가득하게 될 거야.”
“그건 정말 부럽군. 그 화가 소개시켜 줄 수 있나?”
화가가 누굴까.
꽃 그림이 꽤나 유려했다.
‘이건 나도 혹하네…….’
녹색은 자연색이잖아.
보고 있으면 정신 건강에 좋다는 건 이미 이론적으로 입증도 된 사실이다.
요새 그렇지 않아도 좀 힘들고 지치는데…….
벽을 저런 색으로 꾸미고 나면 어떨까 싶었다.
“얼만가?”
“비싸네.”
“얼마?”
“이 정도……?”
“아니, 자네…….”
“하하. 돈 좀 썼지. 뭐, 처음이라 이렇고 나중에 할 생각이면 더 싸지긴 할거야.”
“나중이라니. 체면이 있지 그럴 수야 있나.”
나중에.
나중에 해야겠다.
무리하면 못 할 것도 아닌데…….
벽지에 무리할 만큼 멍청한 사람은 아니다.
세상에 돈 쓸 일이 천진데 뭔 벽지에 저만한 돈을 바르겠나.
“즐거웠나?”
“좋았어요. 뭐…… 녹색만큼 기억에 남는 사람은 없긴 한데.”
“그렇지? 참 보기 좋더군그래. 내 내일 날 밝는 대로 바로 나가 봐야겠어. 구할 수 있는지 봐야지.”
“저도 구경만 가도 돼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자네는 내 동생인데. 당연히 좋지!”
“오.”
지금의 대화를 보면 알겠지만…….
슬프게도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이어졌던 연회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녹색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도 녹색이 꽤 인상이 깊긴 했겠지만…….
마음에 드는 이성, 혹은 적어도 그냥 이성과 춤이라도 출 기회가 있는 이들이었다면 몇 가지 더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을 텐데.
나나 리스턴이나 뭇 여성들에게 어필하기엔 좀 무리가 있었다.
아니, 리스턴은 사실 인기가 꽤 많은 편인데 귀부인들에게는 예외였다.
속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예의 바르고 신사적인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표명했다.
그런 사람들이 보기에 리스턴은 뭐라고 해야 할까?
야만 전사 같은 느낌일 터였다.
“어땠어?”
리스턴과는 내일 만나기로 하고 돌아와 보니 앨프리드와 조지프가 나를 반겨 주었다.
“그냥 뭐…… 높으신 분들 파티라 밥도 잘 안 넘어가더라. 밥 좀 줘.”
“남의 집에서 먹는 공짜 밥은 잘 넘어가고?”
“나중에 이자까지 쳐서 다 갚아 줄게.”
“그런 건 됐으니까…… 이제 내 고추에 소변 줄만 좀 넣지 마…….”
미안한 소리를 해 대길래 일단 사과도 했다.
물론 밥은 먹으면서였다.
생각해 보니까 우리 앨프리드 선배…….
약간 호구 같다.
“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밥을 먹고 있자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색종이 크기의 종이였는데, 녹색이었다.
“왜?”
“이거…… 비슷한 게 거기 있었는데.”
“아…… 아버지가 들고 왔더라. 상업성이 있는지 보신다고. 프랑스에서는 아주 난리래.”
“와…… 역시 아저씨가 감각이 장난이 아니시네. 더 있으시대? 아마 없어서 못 팔 거 같은데?”
“그래?”
“어, 오늘 파티에서 내내 화제였어. 다들 내일 날 밝으면 벽지부터 사러 갈 기세야.”
“오. 그럼 나 아빠한테 말해 주고 와야겠다.”
앨프리드는 신이 나서 뛰어갔다.
조지프는 그때까지 별 관심도 없더니 파티에서 화제였다니까 뒤늦게 벽지 샘플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헌데 좀 이상했다.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왜 그래?”
“냄새가…….”
“냄새?”
거기선 못 맡았다.
사실 음식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보니 음식 냄새만 나긴 했다.
게다가 음식이 뭐 보통 음식인가.
영국 음식이다.
눈으로 봐도 별로고, 코로 맡아도 별로고, 먹어 보면?
역시 맛대가리도 없다.
“줘 봐.”
“어, 아…… 이상한 냄새나.”
“으음. 읍.”
아무튼, 벽지를 달라고 해서 맡아 보니 과연 꿉꿉한 냄새라고 해야 할까?
곰팡내라고 해야 할까?
별 이상한 냄새가 났다.
“야, 이거 썩었네. 가서 빨리 손 닦아.”
“어? 벽지 썩은 것에도 미아즈마가 있나?”
“당연하겠지, 인마. 이런 냄새 풍기는 게 보통 미아즈마겠어?”
“아이, 씨.”
조지프는 그 냄새가 미아즈마가 원인일 수도 있단 생각이 들자마자 역시나 튀어 나갔다.
그렇게 나는 녹색 벽지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퀴퀴한 냄새가 지속적으로 풍겨왔다.
뭔가…….
불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