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207)
검은 머리 영국 의사-207화(207/505)
207화 이거…… [4]
“뭐여.”
리스턴이 압박해 오자, 머릿속은 더 하얗게 변해만 갔다.
이제 와서 날 때리거나 하진 않을 터였다.
때려도 뭐 장난식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이수근이 강호동을 무서워하지 않을 순 없잖아?
심지어 눈앞의 이 중세 기사는 늘 칼도 차고 있는 사람이었다.
똑똑.
그렇게 공포에 질려 가고 있으려니,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방금 나간 영업직인가 했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사님, 계십니까?”
“경찰?”
리스턴은 늘 범죄를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거나 또는 이미 저지른 사람이기라도 한 건지 유독 경찰을 잘 기억하는 편이었다.
내 기억에서도 어렴풋이 경찰 같긴 하니 틀림없이 경찰일 터였다.
대한민국에서도 대개 그렇지만 이 시대에 경찰을 기다리게 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야만과 문명 사이 어디엔가 위치하는 시민 의식은 경찰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으니까.
감히 리스턴에게는 못 하겠지만, 가진 거 없고, 힘없는 이에게 경찰은 깡패보다 무서웠다.
우리도 뭐 굳이 척질 이유는 없는 데다가, 난 할 말도 딱히 없던 와중이었기 때문에 잘됐다 싶어서 바로 문을 열었다.
“오, 닥터 피영. 마침 잘됐군.”
그냥 경찰도 아니고 꽤 높은 사람이었다.
내가 경찰 계급을 잘은 모르는데, 서장하고 가까운 사이다.
아마…… 경찰서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거야.
“음, 잘 왔소.”
저 봐.
리스턴이 몸을 일으켜서 악수까지 청하잖아.
보통의 기마경찰 정도는 턱으로 부리는 사람인 것을 감안하면, 지금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경찰의 위세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래. 내 두 박사님에게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왔소.”
상대는 자연스레 의자에 앉았다.
그러곤 아직도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샘플 벽지를 내려다보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박사님도 이게 좋소?”
“뭐…… 마음에 들던데.”
“흠, 역시 아닌가?”
그러더니 뭔가 의미심장해 보이는 말을 했다.
리스턴이야 별생각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내내 비소를 걱정하고 있던 몸이었기 때문에 경찰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읽어 낼 수 있었다.
‘어쩌면…….’
이 사람.
이 벽지가 위험할 수도 있다고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이 벽지 때문에 오셨습니까?”
해서 냅다 물었더니, 상대가 무척 반가워했다.
“아, 그렇소. 얼마 전에 요 앞에 해리슨 호텔이 내부 공사를 마치고 다시 영업 시작한 건 알고 있겠지?”
“아…….”
“몰라요.”
“호텔은 안 가시는 모양이군그래. 거기 음식이 썩 괜찮소. 아무튼, 제이미 경이 운영하는 호텔이다 보니 지체 높은 사람들이 꽤 모인단 말이오.”
“제이미 경이라.”
“으음.”
그렇게 돈 있고 잘나가는 사람이면…….
어?
불알을 자르지 말았어야지.
왜 못 배운 사람처럼 그런단 말인가…….
그래서 결국, 해리도 사형당했잖아.
뭐 이런 생각이 일단 들었다.
물론 얼굴은 멀쩡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은 그저 하고자 했던 말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중에서 최근에 프랑스에서 초빙해 왔다는 화가가 하나 있었소. 그 사람이야 뭐…… 지체 높은 사람은 아니지. 하지만 제이미 경이 직접 부른 만큼 이름이 있던 사람이었나 본데…….”
“그 사람이 왜?”
“방 안에서 죽었소.”
“죽어? 나이가 많나?”
“아니, 이제 스물 좀 넘은 사람인데 갑자기 죽었소.”
경찰은 그렇게 말하다 목이 마른지 방 안에 놓여 있던 물을 마셨다.
리스턴이 ‘그날’ 이후 위생 특성을 탑재했기 때문에 무려 증류수였다.
“음? 물맛이 깔끔하군?”
“오래 살고 싶으면 증류수로 마시는 게 좋소.”
“그건 왜 그렇지? 귀찮지 않소.”
“그…… 아니, 아무튼. 사람이 왜 죽었지?”
리스턴은 그 물의 연원을 말해 주려다, 상대가 평범한 19세기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화제를 돌렸다.
가까운 사람이라면 때려서라도 고치겠지만 경찰을 패면 죄가 되지 않나?
보통은 그냥 사람을 때리면 죄가 되긴 하는데…….
리스턴처럼 때리면 상대에 따라 대부분 무죄가 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경찰도 물에 대해 딱히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곧 화제는 되돌아갈 수 있었다.
“그게…… 오리무중인데. 일단 내부적으로는 자연사로 보고 있소.”
“자연사라. 뭐…… 그럴 수 있지.”
스물 갓 넘은 사람이 죽었는데 자연사라.
너무 19세기스러운 말이라 가슴이 웅장해진다.
이 정도 배포는 있어야 19세기 사람이지, 암.
“근데 내가 보기엔 좀 이상해서 말이오.”
“이상해?”
“죽기 전에 구토를 한 거 같은 흔적이 있는데…….”
“구토라?”
“일반적인 자연사에서 구토를 하진 않지 않나?”
“이건 가서 봐야겠는데.”
“안 그래도 그걸 부탁하러 왔소.”
“그래, 뭐. 우리가 한두 구 얻어 쓰는 것도 아닌데 이럴 때 도와야지.”
“역시 리스턴 박사야.”
우리는 일단 몸을 일으켰다.
말마따나 한두 구가 뭔가, 해부 실습실에 있는 시신 거의 전부가 경찰한테 받은 거다.
사형수만 오는 게 아니라 피해자들도 왔다.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건, 빈민의 시신이었고.
이건 뭐 이유를 막론하고 수사도 안 하는 경우가 많았고, 원래는 갖다 버린다고 했으니 사실 우리가 처리해 주는 것이 경찰로서도 이득일 수도 있었다.
‘시신을 버린다니…… 그것도 그냥.’
나머지는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보여 준다고 해서 가서 본 일이 아직도 후회가 된다.
그냥 구덩이 파 놓고 거기다 버리더라고.
하필이면 템스강 변에다가 그러고 있길래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땅이 물렁해서 잘 파져서 그렇단다.
미친놈들.
그럼 결국, 템스강에는 시신 썩은 물까지 섞이고 있다는 말이 되지 않나.
‘증류하니까 괜찮다……. 괜찮아…….’
나는 자기 암시를 세게 걸고, 마차에 올랐다.
아무래도 앞에 기마경찰들까지 있다 보니 그 누구도 방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주 쾌적한 길을 달리면서, 경찰이 말을 이었다.
“이상한 건 누구도 침범한 흔적이 없다는 거야.”
“독살일 수도 있지 않나?”
“독살…… 가능성이 있지. 하지만 증언에 따르면 저녁도 제이미 경과 다 같이 먹었다더군.”
“그쪽은 멀쩡하고?”
“멀쩡하네.”
“흐으음…….”
“너무 부담 갖지는 말고. 어차피 뭐, 제이미 경 때문에 이러는 거고. 제이미 경도 다른 화가를 구하는 순간 관심 끊을 거야.”
“그렇긴 하겠지.”
이게 사람이 죽었는데 경찰과 의사가 나누는 대화다.
후후.
문제가 하나 있다면, 나도 어느샌가 ‘그렇겠지’ 하게 되었단 점이었다.
아마 실제로 그럴 거다.
프랑스 놈 하나 죽은 게 뭐 대수라고.
그림 잘 그리는 놈이라면 좀 아깝긴 하겠지만…….
대체할 사람이야 이곳 영국에도 쌔고 쌨을…….
에구머니나.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프랑스 사람도 사람은 사람이거늘!
“이쪽이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호텔이었다.
새로 열었다더니 내부 장식이 완전 새것은 아니었다.
다만 요금표는 완전 새것이 붙어 있었는데 그중 내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린룸.
뭐…….
힐링을 뜻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혹시 화가가 이 그린룸에 묵었습니까?”
“오. 어떻게 알았지?”
“그냥 느낌이.”
“역시…… 조선의 샤먼이로군.”
“아니, 저 기독교입니다.”
“하하, 그래. 그렇게 말하는 편이 안전하겠지. 걱정 말게. 자네의 신통력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으니.”
불길해서 물었더니 이상한 답이 튀어나왔다.
해명을 바라는 눈으로 리스턴을 돌아봤더니, 이 새끼…….
눈을 피한다.
생긴 것보다 입이 싼 모양인데…….
이걸로 퉁치지 않을래?
아까 무례하게 굴었던 것을 용서해 줘.
“자, 여길세.”
경찰은 샤먼 어쩌구 하더니 그린룸의 문을 열었다.
“최근에 리모델링했다더니 아주 이쁘지 않나?”
안쪽은 온통 녹색이었다.
제이미 경의 집에서 봤던 것과 비슷했는데, 차이가 있다면 이 방은 사방이 녹색인 데다가 좁다는 점이었다.
말이 호텔이지, 그냥 단칸방이다.
나름 수세식 화장실이 딸려 있으니 고급이겠고, 안쪽을 채우고 있는 장식품도 범상치는 않았지만 그래 봤자 크기는 단칸방이었다.
“시신은?”
“아, 저깄네.”
그 안에, 화가가 누워 있었다.
창백해진 얼굴로, 무척 괴로워하는 표정을 한 채였다.
경찰이 말했던 대로 옆으로 구토한 흔적이 있었다.
시간도 좀 지났고…….
구토를 했다.
바지가 불룩한 것을 보면 실금도 했다.
그럼 저 냄새가 독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냄새가 안 난다는 게 아니라, 다른 냄새가 난다는 얘기였다.
“이…… 퀘퀘한 냄새는 뭐죠?”
“나도 모르겠네. 벽지를 새로 발랐다는데 곰팡내가 난다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군. 뭐가 썩었나?”
말은 퀘퀘한 냄새라고 뭉뚱그려 말했지만…….
어디서 분명 맡아 본 냄새였다.
‘머리야, 돌아라…… 아…… 이거!’
그리고 내 좋은 머리는 기어코 기억해 냈다.
“벽지!”
“아니, 벽지는 최근에 발랐다니까.”
“한번 맡아 보세요! 아니, 너무 많이는 말고! 위험합니다!”
“뭔 소리지? 아, 설마, 신통력인가……?”
경찰은 뭔가 다른 이유로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리스턴은 아까부터 내 눈치를 보느라 강하게 나오지 못했고.
잘됐다.
나는 이 기세를 몰아 말을 이어 나갔다.
“맡아 보셨어요?”
“아, 정말…… 퀘퀘한 냄새가 나는군. 이상한데? 분명 이번에 새로 발랐다고 했는데.”
“저도 원인을 정확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벽지…… 이거 비소 벽지입니다.”
“비소 벽지?”
“네. 비소를 바른 거예요! 비소는 독이지 않습니까? 그 독에 중독된 겁니다, 화가는.”
“으음.”
완벽한 추리를 해냈다.
비소를 바른 벽지에 둘러싸여 있으면 죽지.
이거 뭐 손으로 문대거나 할 때마다 비소가 나오는 거 아냐.
헌데 반응이 어째 뜨뜻미지근했다.
“그렇게 따지면, 그림 걸어 둔 부자들은 다 죽었을 텐데?”
“네?”
“이 물감이 대체 얼마나 오래되었다고 생각하는 겐가.”
“아니…… 이걸 오래 썼다고?”
“그래, 그렇다네.”
“이상한데. 그럴 리가 없는데.”
“신통력도 빗나갈 때가 있군그래. 역시 주님만 의지해야 하네. 교회도 다니고 그러게.”
“나 기독교라고!”
그 이유를 알았다.
그림…….
그래, 중세 시대부터 꾸준히 그림을 그려 왔지…….
특히 유럽은 지체 높은 사람들이라면 초상화를 그려 남기는 것을 선호했고, 그 그림을 집 안 곳곳에 걸어 두어 유서 깊은 집안임을 드러냈다.
거기에 비소가 들어 있다면…….
확실히 논리적으로 이제 와서 벽에 붙은 벽지가 문제가 된다는 건 좀 이상하다.
물론 양이 좀 많긴 하지만…….
생각보다 비소가 안정적인 물질일 수도 있지 않겠나?
교과서에서나 배웠지, 실제로 어떻게 되는지 본 적이 없으니 더 강하게 말하기가 좀 그랬다.
“잠깐.”
그때 리스턴이 나섰다.
그는 여전히 시신을 보고 있었다.
“독살을 왜 의심하지 않는다고 했지?”
“다른 사람과 같은 걸 먹었다고 했네.”
“그거야 살아 있는 사람들의 증언 아닌가.”
“그렇지. 그렇다고 죽은 사람에게 물을 수는…… 뭐 하나?”
“물어볼 수는 없지만,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네.”
리스턴은 칼을 빼 들고, 시신의 옷을 벗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