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21)
검은 머리 영국 의사-21화(21/505)
21화 너네는 뭐 했냐? [3]
선배는 돈이 꽤 있었다.
확실히 부잣집 도련님이라 그런가, 적어도 설문 조사를 완수할 수 있게 할 수준의 돈은 있었다.
“아니…….”
“의학 발전에 큰 기여 하시는 겁니다.”
“무슨 기여를…… 나 옷 하나 새로 맞추려고 들고 온 돈인데…….”
“지금 옷도 괜찮은데요?”
“아니…… 이제 곧 파티 시즌이라고……. 아버지는 몰라도 난 연애를…….”
“어허. 의사 될 사람이 연애라니. 말도 안 되지.”
턱턱 내놓지는 못했다.
저 눈을 좀 봐라.
어찌나 아까워하는지.
이 새끼.
내가 자꾸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생명의 은인인데 말이야.
“여기요.”
“오, 좋아요.”
“여기.”
“네네.”
말을 안 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해도 자꾸 말하면, 뭘 되받은 것도 아닌데 가치가 깎여 나가는 법이거든.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
교수님들 밑에서 구르다 보면 다 알게 되는 법이었다.
– 내가 널 가르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것도 못 하냐!
– 네, 못 하는데요.
그럴 정도는 아닌데요.
이걸 내가 정말 얼마나 많이…….
“여기요.”
“아, 네네.”
하여간 닥치고 있으려니, 조산사들이 각기 지난 몇 달간 겪은 현황을 적어 왔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 나가는 종이 뭉치와 함께 내 마음은 푸근해졌다.
왜냐.
대충 봐도 확실히 차이가 났거든.
그것도 뭐 근소하게 나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 블러드본인지 블런델인지 나발인지 하는 교수가 적어 둔 통계치와 이들이 적어 낸 통계치는 적어도 열 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귀하는 손을 닦습니까?
-닦습니다.
답도 이렇게 해 왔다.
적어도 가정 방문을 할 때는 손을 닦는 모양이었다.
그 이유가 단순히 관습에 의해서라는 건 좀 실망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하여간 손을 닦긴 닦았잖아.
그래서 이렇게 극명한 차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좋아. 선배, 조지프. 이리 와 봐.”
모든 설문 조사가 그렇듯,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불과 10여 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다 끝났다.
분석?
분석이야 그보다도 덜 걸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내게는 예상하고 있던 결과가 있었고, 이 결과가 그것과 다르지 않았거든.
“잘 봐요. 선배. 이건 우리…… 산부인과 교수. 이름이 뭐더라?”
“블런델 교수님. 인마 무서운 분이셔.”
“아, 그래. 블런델 교수님.”
이제 와서 하기엔 좀 그런 말이지만.
외국계 이름은 아무리 들어도 딱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단 말이지.
블런델.
이름이 블런델이 뭐냔 말이야.
그에 비하면 조지프랑 앨프리드는 퍽 정직한 이름이다.
아무튼, 지금은 이름 품평하는 시간이 아니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넘겼다.
“여기 봐요. 우리 병원에서 산모가 죽는 비율을 보라고.”
“음…… 열에 한둘은 죽네.”
“그러니까요. 꽤 많네.”
열에 한둘이 죽는다는 말을 하면서 이런 표정을 지을 수도 있구나.
미친놈들이.
니네 엄마 앞에서도 그런 말 할 수 있냐?
러시안룰렛 굴리듯이 해서 애 낳았다고 할 수 있겠어?
‘하긴……. 이 둘은 부잣집이니…… 집에서 낳았겠지. 나도 그렇고. 어머니 감사합니다.’
갑자기 엄마 보고 싶네.
“꽤 많은 게 아니라, 너무 많다는 생각 안 들어요?”
“응? 의학 발전하기 전에는 더 죽었을 텐데?”
“그러니까. 겸자라는 게 나오고 나서 생존율이 더 올라갔다는 말 못 들어 봤어?”
하지만 지금 엄마 보고 싶다고 울 수는 없는 노릇이라 최대한 이성적으로 풀어 보려 했다.
그러자 말도 안 되는 의견이 돌아왔다.
아니, 맞는 말인가?
설마 전에는 이보다 더 죽었단 말인가?
‘아니…… 말이 안 돼…….’
확실히 인간이라는 족속은 머리가 크다 보니, 모성 사망률이 다른 짐승에 비해 높은 건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열에 한둘보다 더 죽어 나간다면 대체 누가 임신을 하겠나.
여자 아니라 남자 입장에서 생각해도 그랬다.
3분지 1의 확률로 아내를 잃는다니?
애를 둘 낳는다고 치면, 아내가 계속 살아 있을 확률이 반도 안 되잖아.
“절대적인 수치로 생각하자고요. 절대적으로.”
하지만 근대 의학 아니, 이들 시점에선 현대 의학에 경도되어 있는 놈들에게 무슨 말이 통하겠나.
나조차도 레지던트 시절에는 내가 제일 잘난 줄 알았더랬다.
어설프게 알다 보니 더더욱 그랬다.
내가 모르는 건 모를 만해서 모른다는 생각도 자주 했고.
그래, 까마득한 선배 입장에서 이해해 줘야지.
“절대적으로는…… 적은 편이 아니지.”
“그러니까. 음.”
“근데 보세요. 조산사들이 집에서 낳는 건 다르잖아요.”
난 충격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서류를 가리켰다.
21세기 수학을 이용해서 평균을 낸 수치가 적혀 있었다.
21% 대 1.8%였다.
이걸 보고도 느끼는 게 없다면 냉혈한이지 않겠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사람 죽이고 다니는 새끼거나.
“아, 난 또 뭐라고.”
“하하. 이건 상식이잖아, 평아.”
헌데 웃었다.
경각심을 갖길 원했는데 웃어?
망치라도 있었으면 진짜 대가리 한두 대씩 후려치고 싶다.
“공기가 달라.”
“그래. 원래 런던은 좀…… 그렇잖아? 밖에 좀 보고 살아, 평아. 어둡잖아.”
부들부들하고 있으려니, 이에 질세라 둘은 말을 이어 나갔다.
“아니면 수맥? 응? 물이 좀 나쁠 수도 있고.”
“아, 저도 그 얘기 들었어요. 평아, 저번 수업 시간에 뭐 한 거야? 왜 공부를 안 해?”
보면 알겠지만 죄다 개소리였다.
공기에 수맥?
흐.
“넌 미아즈마도 모르냐?”
“아휴…….”
그러더니 급기야 못 볼 걸 본다는 얼굴로 날 바라보기 시작했다.
살짝 불안해진 것은, 내가 전혀 모르는 얘기를 꺼냈다는 점이었다.
미아즈마?
그게 대체 뭐야…….
“얘 모르나 본데? 조선 사람이라 그런가?”
“아……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도 공부 안 하는 사람들은 모를걸요.”
“얘는 공부를 안 했네.”
“그러니까요. 의대생이…….”
둘은 계속해서 나를 경멸의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사이, 나는 오랜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생리학 시간에 배웠으려나?
미아즈마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임상 용어는 아닐 터였다.
그랬다면 내가 까맣게 잊었을 리가 없거든.
글 깨우치고 나서 매일 한 게 안 까먹기 위해 책 쓰는 거였으니…….
“난 네가 당연히 알고 있는 줄 알았어. 생각해 보니까 해부실에서…… 이런 물질에 의해 감염이 생길 수 있다는 거 말이야. 거기도 악취가 심하잖아.”
허나 나는 대화가 이어질수록 우리 사이에 뭔가 핀트가 엇나간 부분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악취?
쌔하잖아.
“그런 곳에 있는 공기를 미아즈마라고 하잖아.”
“음.”
“그게 만병의 근원이지. 병원은 어쩔 수가 없다구. 아픈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이곳의 공기는 미아즈마가 판을 치고 있어. 우리는 일종의 희생을 하고 있는 셈이지. 젊은 나이에 가는 선배들이 많은 것도 그런 이유일 거고.”
내 생각과는 별개로, 우리 선배는 정말이지 심취한 얼굴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취한 모양이었다.
의사뽕.
그래, 의뽕이 좀 세긴 하지.
사람 살리고 나서 맡는 밤공기 냄새는 사람 취하게 하는 데 충분하긴 해.
하지만 너한테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냐?
‘이제 기억났네. 미아즈마. 족보에 적혀 있던 것 중 하나였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랜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단어이긴 했다.
시험에 나오는 단어이기도 했다.
주로 언제 나오냐면, 의학의 오류를 짚어 주는 대목에서 나온다.
당연히 그리 중요한 과목은 아니고, 패스 오어 페일(Pass or Fail) 과목에나 나오는 단어였다.
‘내가 머리가 좋긴 좋네.’
이걸 다 기억해 내다니.
19세기 덕분이라고 봐야 할 것 같았다.
“우리의 희생은 또 다른 환자들의 생이 되겠지.”
지랄하지 말라고 하면서 뒤통수 갈기고 싶었다.
희생은 하고 있긴 하지만 생이 되진 않을 테니까.
오히려 죽이고 있잖아, 니들.
다행인 것은 내가 설득해야 할 사람이 이런 애송이들은 아니란 점이었다.
블런델…… 기다려라.
“어, 야. 어디 가?”
더는 말도 섞고 싶지 않았던 나는 부리나케 병실을 빠져나와선 블런델 교수의 연구실로 향했다.
찾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 병원은 연구와 진료의 효율을 위해 모든 곳을 한군데로 때려 박았거든.
이게 감염병 견지에서 보면 진짜 무식한 짓인데…… 이때는 뭐 그런 개념이 아예 없었으니 어쩔 수 없긴 했을 터였다.
똑똑.
하여간 나는 뒤에 두 마리의 혹을 달고서 블런델 교수의 연구실 앞에 섰다.
고풍스럽기 짝이 없는 문짝이었다.
이 안에 있는 건 어쩐지 의사가 아니라 철학자여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일었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저 로버트 리스턴 백정님 아니, 박사님조차 이런 문 뒤에 앉아 있었다.
“야야. 무슨 일을…….”
“뭐 하는 거야! 감히 교수님 연구실에!”
뒤따라온 둘이 뒤에서 말 그대로 호들갑을 떨었다.
허나 나는 결연한 마음이었다.
‘더 이상 사람 죽어 나가는 꼴은 못 보겠다, 이 새끼들아.’
사람이 죽잖아.
의사가 아니라 다른 직업이라도 사람 목숨 앞에서는 어? 결연해져야 하는 법이었다.
“누구지?”
물론 나도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아서 돌아갈까 하는 마음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블런델 교수라면 생김새를 알지 않나.
로버트 리스턴한테야 이런 소리는커녕 입도 뻥끗 못 하겠지만, 블런델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1학년 평이라고 합니다.”
“음. 들어와.”
높은 사람한테 똑 부러지게 말하기 정도는 마스터한 지 오래였다.
해서 난 허락을 구할 수 있었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
그리고 얼어붙었다.
‘로버트 리스턴…….’
그래, 시발 목 구조상 어지간해선 그런 목소리가 나올 수 없지!
왜 댁이 여기 같이 있냐고!
180이 넘는 거구의 사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 주인인 블런델은 앉아 있었는데, 가뜩이나 키 차이가 나는 마당에 앉아 있기까지 해서 백정님, 아니 박사님만 눈에 들어왔다.
박사를 땄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박사라고 하면 칼질은 안 하겠지.
“뭐야, 무슨 일이야.”
“말해 보게, 평.”
하여간 들어선 이상 입을 안 놀릴 수는 없었다.
나는 서류 뭉치를 테이블에 놓고 말했다.
“교수님. 조산사들이 저택에 왕진 가서 아이를 낳는 경우와 병원에서 그냥 낳는 경우 사이의 산욕열 또는 사망을 경험하는 비율 차이가 열 배가 넘게 납니다.”
“응, 그래서?”
“지금까지는 미아즈마 이론에 입각하여 설명했지만……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차이지?”
회심의 일격처럼 날렸지만, 블런델은 시큰둥했다.
지금 대꾸하고 있는 로버트였다.
그 또한 심드렁하긴 했지만, 하여간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기는 했다.
‘그래. 박사님이라도…….’
이 인간이라도 넘어오면 다행이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손 씻기’란 단어를 보여 주었다.
“조산사들은 가정 방문을 할 때 손을 닦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안 닦죠. 이것이 차이의 원인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자네가 부정하는 미아즈마 이론이 뭔지 아나?”
“나쁜 공기 이론이죠.”
“수백 년을 이어 내려온 이론일세. 지금 자네가 부정하는 건 그런 거야. 별다른 단서도 없이.”
“하지만…….”
“하지만 새로운 관점이긴 하군. 흐음…… 어쩔까…….”
결과, 공은 백정에게 넘어갔다.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박사가 될 수도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