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25)
검은 머리 영국 의사-25화(25/505)
25화 이걸론…… [2]
“도저히 못 닦겠다!”
고무장갑의 가능성을 보고 온 다음 날에도, 각 병실 앞에서는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염화석회는 진짜 독하거든.
나도 저 안에 손 넣을 때마다 죽을 것 같았지만.
“닦아야 합니다. 아시잖아요? 확 달라진 거.”
“으…….”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불평불만은 꽤 힘을 받았더랬다.
하지만 이젠?
택도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그래요, 닦으세요!”
일단 간호사들의 태도가 제일 많이 바뀌었다.
의사나 의대생은 여기에만 자기 환자가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지 않나.
그렇다 보니, 오히려 환자 자체에 대한 관찰은 간호사들과 비교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에 반해 간호사들은 계속 그 자리에서 환자를 보고 있다 보니, 심지어 이 시기에는 3교대조차 완전히 자리 잡지 않아서 말 그대로 붙박이로 보고 있다 보니, 환자의 변화를 온전히 체감할 수 있었다.
“아, 아이…….”
“닦아 주세요! 그래야 환자가 살아요!”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저번 달과는 달리, 이번 달에는 딱히 통계 작성을 하지 않아도 체감할 수 있을 만큼 사람들의 생존율이 팍팍 올라가고 있었다.
온 병동에서 그렇다 보니 간호사들부터가 더 성화를 부렸다.
그렇게 외치는 이의 손조차 붉다는 건 좀 그랬지만.
“하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밉상 동기인 콜린이 잔뜩 한숨을 쉬며 저 망할 액체에 손을 담그는 장면은 보기 좋았다.
후하하.
남의 고통은 내 즐거움…….
아니지, 이러면 너무 싸패 같고.
그냥 환자를 살리는 데 동참해서 좋다고 하자.
“으으으.”
콜린은 익숙해질 수 없는, 아니 익숙해질 리도 없는 고통과 함께 나를 노려보았다.
그럼 뭐 어쩔 건가.
“자, 다들 모였나.”
손 닦기에 뜨뜻미지근했던 블런델 교수조차 응?
이제는 붉은 손의 사나이가 됐다구?
‘비누를 보급하지 말까.’
손을 닦았는지 안 닦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는 방법이 여기 있었을 줄이야.
21세기에도 사실 손 안 닦는 놈들이 있지 않았던가.
환자들이야 모르겠지만, 병원엔 암행어사처럼 순찰을 도는 이들이 있었다.
이른바 ‘감염 관리실 직원’이란 이름을 지닌 이들인데, 사복을 입고 돌면서 저놈이 손을 닦나 안 닦나를 확인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미 이론이나 경험으로 손 닦기의 유용성이 확인된 마당임에도 불구하고, 손 씻기 비율은 늘 90% 선에서 맴돌았다.
‘어? 거기는 소독제도 있잖아!’
흐르는 물에 비누로 손 닦는 건 회진 전후로만 하고, 나머지는 소독제로만 닦으면 되는 시대잖아.
그런데도 손 안 닦는 새끼들은 시벌.
다 불러와서 여기서 한번 굴려 봐야 해.
그럼 ‘감사합니다’ 하고 닦을 텐데.
‘아…… 돌아가서 삼겹살에 돼지 김치찌개 먹고 싶다…….’
상상이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가는 순간, 블런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누가 나와서 해 볼래.”
아, 왜 그랬나 했더니.
내 본능이 위험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블런델이 날 보고 있었다.
하긴, 이제 내 차례가 될 때도 되기는 했다.
지금껏 한 번도, 정말이지 단 한 번도 나서질 않았거든.
“제가 해 보겠습니다.”
해서 나섰다.
내진 정도야 뭐…… 내가 블런델보다 더 잘할 자신은 있었다.
산부인과에서 직접 해 본 적은 없어도 어깨너머로는 많이 본 데다가, 해부학에 대한 이해는 정말 비교도 안 되기에 그랬다.
“그래.”
나는 블런델의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한 표정과 콜린의 쌤통이라는 표정을 뒤로하고 환자를 살폈다.
조지프와 앨프리드는 내 친우들답게 응원을 보내오고 있었다.
딱히 걱정하는 기미는 느껴지지 않았다.
나머지 놈들이야 우리 무리가 해부도 안 하고 이상한 짓만 하고 다니니 모자란 놈이라고 오인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저 둘은 내 우수성을 아주 잘 알고 있거든.
“흠…… 이제 곧 다 열릴 것 같습니다. 손가락 길이 정도 되는군요.”
하여간 나는 의사가 필수적으로 지녀야 하는 덕목, 부드러움과 정확함을 발휘해 촉진을 진행했다.
모르는 놈들에게는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아는 놈에겐 보일 터였다.
‘오, 뭘 좀 아는 놈인가?’
의외로 블런델이 퍽 감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별 망설임 없이 한 번에 딱 짚어 내곤 정확한 수치까지 말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낭중지추라고 하지.
송곳 정도만 되도 그런 말이 생기는데, 난 이곳에서는 뭐랄까…….
“꽤 하는군그래? 맨날 뒤로 빼길래 자신 없어 보였는데, 이렇게 바로 하고 말이야. 마음에 들어.”
거의 뭐 여의봉 수준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블런델이 손으로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다른 환자에게로 넘어갔다.
별로 기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블런델 정도에게 칭찬을 받아 봐야 기뻐할 이유가 없기도 하거니와, 지금 내 머릿속은 어깨에 있던 균이 손으로 옮아갔구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부검하고 바로 와서 만지는 것에 비하면 훨씬 나을 터였다.
다행히 우리 인체는 어지간한 오염에는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기도 하고.
그래도 역시 환자와 환자 사이에도 손을 씻는 게 좋기는 하겠지만, 지금도 손이 벌건데 그런 말을 했다간 무슨 반발을 듣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비누칠을 한다고 해도 그럴 터였다.
일단 흐르는 물 자체가 희귀한 시대니까.
‘다행이야. 휴.’
하여간 이틀쯤 지나서 다시 확인해 본 결과, 해당 병실엔 딱히 산욕열이 발생한 환자가 없었다.
아니, 산욕열이 아니라 감염이라고 해야 할 터였다.
이 시기에는 그런 개념이 없지만 나까지 휩쓸릴 수는 없잖아?
“아, 평아.”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으려니 앨프리드가 다가왔다.
한집에 살면서 매일 의학에 관한 토의도 하고 콘돔 얘기도 하고, 그러다가 신변잡기에 가까운 얘기까지 해 놔서 그런지 우리는 꽤 많이 친해져 있었다.
괜찮은 애라서 그런 것도 있었다.
첫인상만 그런 게 아니라 진짜 그랬다.
일단 은혜를 안다는 것부터가…… 특별한 일이지 않나.
“어, 네. 선배.”
“아빠가 장갑 만들었다는데, 가 봐야지?”
“아, 정말요? 가야죠. 조지프는 어딨지?”
“걘 이미 마차 쪽으로 갔어. 너만 맨날 도서관에 와 있으니 찾기가 어렵지.”
“아하.”
공부하러 온 건 아니었다.
아니, 공부하러 온 건 맞는데…….
지식을 습득하러 온 게 아니란 말이 더 옳을 거 같았다.
‘차근차근 개선하려면, 대체 이 시대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부터 알아야겠지.’
의학서만 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여러 방면…… 그러니까 의학과 관계있을 것 같아 보이는 건 다 보고 있었다.
문제는 거의 모든 분야가 의학과 연관이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이번에 알지 않았나.
콘돔마저도…….
이놈의 의학은 콘돔하고도 연관이 있었다.
‘시부럴.’
해서, 나는 방금까지는 물리학을 보고 있었다.
뉴턴의 책이었다.
아이작 뉴턴.
그 인간이 17세기 사람이었다는 걸 지금 알았다.
고등학생 때야 알고 있었을 테니 다시 알았다는 말이 맞겠지만, 하여간.
그런 인간이 태어나고 죽은 지 무려 200년 가까이 지났는데 왜 세상은 이 모양인가.
“같이 가죠, 그럼.”
“좋아.”
여러 가지 이유로 머리가 아팠다.
망할.
물리학 나 싫어한다구…….
그리고 니들은 왜 이 모양이냐구…….
“음. 으음?”
투덜대며 마차에 올랐는데 뭔가 달라져 있었다.
마차가…….
업그레이드되었다.
“이거……?”
“아. 아버지가 요새 기분이 아주 좋으셔. 이건 백 프로 될 거 같다고. 아, 한 가지 당부를 하셨는데.”
“네네.”
“이건 비밀로 해 달라고 하셨어. 지금도 고무를 계속 사들이고 있으시다 보니…… 괜히 소문나면 가격 오른다고.”
“아…… 네.”
나는 좀 어이가 없었다.
아저씨는 몰라도 선배는 알지 않나?
나 이 마차 안에 탄 사람들 말고는 친구 아예 없는 거?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내 인사라도 받아 주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그래, 조지프 너도.”
나 때문에 조지프도 덩달아 아싸였다.
물론 조지프는 키도 크고 인물도 좋다 보니 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긴 했지만, 의대생들 사이에서만큼은 나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믿고 싶다.
시부럴.
다그닥-
내 부끄러운 속내가 표정에 드러나기 전, 마차는 매끄럽게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말은 원래 말인데 마차 바퀴가 바뀌어서 그런지 훨씬 나았다.
그런 우리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이들도 있기는 있었다.
콜린.
녀석은 해부 실습실로 가는 중인지, 코에 솜을 쑤셔 박은 채 우리를, 아니, 주로 나를 노려보았다.
-해부도 못 하는 겁쟁이가 무슨 외과 의사를 한다고.
입술만 봐도 무슨 뜻인지 읽힐 만큼 노골적으로 욕도 했다.
새끼.
좀만 기다려라.
내가 해부의 신세계를 보여 주마.
장갑만 있으면 어? 어마어마한 것들을 보여 줄 수 있다고.
물론 너무 잘하면 저 멀리 신비한 동방에서 건너온 마녀가 되어서 불타 죽을 수도 있을 테니 적당히 하긴 해야겠지만.
“자, 다 왔습니다. 익숙해졌을지 몰라도, 무조건 조심하십쇼.”
마부는 저번과 마찬가지로 총을 있는 힘껏 드러낸 채 말했다.
생긴 것만 해도 만만찮은 인상이다 보니 강도질을 당하진 않을 거 같은데, 혹 모르는 일이긴 했다.
당장 우리 의과 대학에 시신을 납품하는 업자…….
‘납품’이라는 단어 외에 다른 단어를 쓰고 싶은데 적당한 단어를 아직도 못 찾았다.
아무튼, 그 치들 생긴 걸 보면 마부도 총 없이는 안 될 것 같긴 했다.
끼이익.
우리는 고무 공장 안으로 들어섰다.
아저씨는 이번에도 거무튀튀한 무언가를 탁자 위에 올려 두고 있었다.
저번과는 확실히 달랐다.
개불 같은 모양새가 아니라 일단 장갑이었다.
꽤 커서 헐렁할 거 같기는 했지만 하여간, 저거 끼면 적어도 칼에 다치는 불상사는 없을 거 같았다.
“자, 보게. 이 정도면 되겠나?”
아저씨는 후후 웃으며 장갑을 건넸다.
나는 그 장갑 안에 손을 집어넣고 아무거나 만져 보았다.
모양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이번엔 그 누구도 팔을 빼거나 하지 않았다.
‘음…… 느낌이 있진 않군. 저번보다 얇아지긴 했지만…… 내가 쓰던 정도는 아니야. 그래도…… 해부는 무리 없이 할 수 있겠는데?’
해부뿐 아니라 수술도 간단한 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연히 환자가 마취되어서 가만히 있어 준다는 전제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하여간 지금 이 시점에서 이 정도 장갑은 최고의 무기라 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이 정도면 해부…… 충분히 할 수 있겠어요.”
“하는 김에 네 개 더 만들었네. 가져가.”
“네 개 더요?”
조지프, 앨프리드까지 해 봐야 세 개면 되는데 왜 다섯 개나 만드셨을까?
아저씨는 내 어리둥절해하는 얼굴을 보곤 한숨을 쉬었다.
“블런델 교수와 로버트 교수 것도 만들었지. 안 쓴다고 해도 하나 주긴 해야 하지 않겠나?”
“아…… 네네. 제가 미처 생각을 못 했습니다.”
내 머릿속에 있는 둘은 교수가 아니라 야만인이라 잊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온통 다른 생각만 하고 있기도 했다.
‘내일부터…… 해부의 귀재가 뭔지 보여 주마.’
다 발라 주겠다, 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