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26)
검은 머리 영국 의사-26화(26/505)
26화 해부의 신 [1]
수업이 끝났다.
‘아, 오늘도 존나 보람 없었다.’
여느 때처럼, 수업에서는 딱히 건질 만한 것이 없었다.
제대로 된 지식도 없이 와서 떠드는 말이 태반이다 보니 들으면 오히려 방해가 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귀를 막을 수 있나?
그건 안 될 일이었다.
-숙지하도록. 테스트할 거니까.
로버트 리스턴.
거구의 박사는 시험까지 본다고 했다.
시발…….
이 말도 안 되는 걸 외워야 한다니.
이건 아니라는 걸 머리로 너무 잘 알아서 그런지, 아니면 내 의사의 자아가 알아서 거르는 건지는 몰라도 너무 힘들었다.
“평. 그럼 오늘부터는 해부 다시 들어가는 거야?”
내 번뇌를 날려 준 것은 앨프리드였다.
모자란 선배여도 착하긴 하지 않나.
그는 어제 공장에서 받아 온 장갑을 쥔 채 내게 말했다.
얼굴은 이미 해부 실습실을 향하고 있었다.
하여간 열심이었다.
‘멍청하고 성실한 놈들이 제일 사고 많이 치는데…….’
이 시대에는 죄다 이런 놈들뿐이니 어쩔 수 없지 않겠나.
멍청한 부분은 내가 챙기면 될 일이었다.
‘할 수 있을까?’
처음엔 이런 고민도 들었지만.
해부 실습실 안에 들어서자, 고민은 사라지고 설렘이 찾아왔다.
썩은 시신들과 사방에 돌아다니는 파리, 구더기 등을 보면서 설렘이라니.
진짜 이상한 것을 넘어서 좀 변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외과 의사인가 봐.’
오랜만에 칼 쥘 생각을 하니 이게 참…….
후후.
“어…… 새 시신 들어왔다!”
그때 조지프가 들뜬 얼굴로 외쳤다.
시신이 들어왔다는 건 누군가 죽었다는 얘긴데…… 의대생이라는 놈이 저렇게 기뻐할 일인가 싶었지만.
이 시대에서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아직 포르말린이 없는 것 같잖아?
있다고 해도 당장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거 부으면 된다고 하면…… 의심받겠지.
나중에 명성을 떨치고 나서 고려해야 할 일이었다.
“자, 여기 있네. 수고금.”
“네네. 감사합니다.”
하여간 납품업자는 교수가 건넨 돈을 들고 사라져 갔다.
저렇게 준 돈의 일부가 기증자의 가족들에게 간다는 걸 들어서인지 뭔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마음이 예전처럼 불편하지는 않았다.
“세 구나 들어왔군그래.”
로버트 리스턴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좌중을 돌아보다가 내 얼굴을 발견하곤 입을 열었다.
“드디어 결심이 섰나. 계속 빠지면 자를 생각이었는데.”
그러곤 살벌한 소리를 했다.
자르다니.
이 인간아.
내가 이 시대의 희망일 텐데.
나를 자르면 댁은 댁도 모르는 사이에 여럿 죽이게 된다구.
“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이것…… 선물입니다.”
물론 이 얼굴을 맞댄 상황에서 함부로 지껄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머리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냥 본능적으로 혀가 돌아간달까?
대학 병원에서 수련받은 덕도 있기는 한데, 하여간 나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부를 떨고 있었다.
“이게 뭔가?”
“장갑입니다.”
“장갑……? 아직 겨울이 오려면 멀었는데. 그리고 적절한 때도 아닐세.”
로버트 리스턴은 주절주절 말이 많았다.
그런 주제에 몸은 솔직해서 장갑을 일단 받아 들고는 있었다.
자식.
“해부하실 때 쓰시라고 만들어 봤습니다.”
받아 오기 전에, 눈대중으로 사이즈도 맞추었다고.
어차피 정밀하게는 못 만드니 가능한 일이었다.
수술할 것도 아닌데 꽉 낄 필요도 없지 않겠나.
“해부할 때?”
“네. 좀 찝찝하지 않겠습니까? 미아즈마가 손에 묻는다는 게…… 어찌 보면 위험할 수도 있고요.”
하여간 내 혀는 모터 달린 것처럼 붕붕 잘 돌아가고 있었다.
대본을 준비한 것도 아닌데 그랬다.
필사적이어서 그랬을 터였다.
누구나 로버트 리스턴 앞에 서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흐음…… 그런 생각이었다면 좋군. 근데 이거 젖으면 세척하는 게 귀찮지 않겠나?”
“안 젖습니다. 방수입니다.”
“호오.”
다행히 로버트 리스턴 박사는 물건이 퍽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갸웃하고는 바로 손에 착용했다.
당연한 일이긴 했다.
좋아서 맨손으로 시신 만지는 놈이 설마 있겠나.
그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자, 그럼…… 음. 이렇게 나눠서 하지.”
로버트 리스턴 박사님은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투철한 것만큼이나, 받은 게 있으면 돌려주는 것도 철저한 사람이지 않나.
아저씨에게 받은 돈에 기반해 내게 잘해 주었던 것처럼 장갑에 대한 대우도 확실했다.
“집도는…….”
“제가 한번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팀으로 나뉘게 된 것은 총 다섯이었다.
나, 조지프, 앨프리드, 콜린, 그리고 이름 모를 콜린의 똘마니.
콜린은 자기 아니면 앨프리드가 집도에 나서게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는지 이미 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쟤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열심히 하긴 했을 테니까.
‘병신…….’
잘못된 방향으로 열심히 하면 뭐 하냐.
“그래, 그럼 이번엔 평. 자네가 해 보게.”
하여간 박사님은 내게 칼을 쥐여 주었다.
콜린은 놀란 얼굴이 되었지만 감히 반대 의견을 내진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랬다간 뒤질 텐데.
“감사합니다, 교수님.”
하여간 나는 자연스레 칼을 쥐게 되었다.
그러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나이는 기껏해야 서른이나 됐을까?
아니, 그보다 어릴 수도 있었다.
직사광선이 내리쬐고, 환경도 개판인 19세기의 인간들은 21세기보다 훨씬 빨리 늙으니까.
“아니…… 이걸 왜 네가 해? 선배는 기분도 안 나쁩니까?”
그렇게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콜린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박사님이 자리를 뜨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부 실습실 내에 없는 건 아니어서 속삭이듯 말하긴 했지만, 하여간 우리 팀 정도는 다 들을 수 있는 크기의 목소리였다.
그중에서도 콜린이 자존심을 긁은 앨프리드는 정확히 다 들었다.
“응, 별로.”
허나 돌아온 반응은 콜린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네……?”
“넌 모르겠지만…… 평이는 천재야. 조선의 귀족이고.”
“아니…… 그래 봐야 원숭이…….”
“말 함부로 하지 말고. 내게는 생명의 은인이야.”
심드렁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공격적인 반응이었다.
같이 다니는 거야 알았을 테지만, 콜린에게 나는 기껏해야 조선에서 온 원숭이 정도였을 테니 꽤 놀랐을 터였다.
‘저 봐, 저거, 손 떠네.’
근데 어쩌나…….
아직 진짜 손 떨 만한 일은 벌어지지도 않았는데.
‘봐라. 내 위력을.’
어디부터 할까.
어디부터 해야…… 이 새끼들이 놀랄까.
‘원래 내 전공 분야는 배지만…….’
배는 지금 이들에겐 완전 미지의 세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짜 안에 무슨 장기 있는지 정도나 알지, 혈관이 어디로 가고 신경은 어떻게 분포해 있는지는 전혀 몰랐다.
사실 장기를 안다는 것도, 좀 더 들이파면 어떤 구조인지 어떤 일을 하고 무엇을 분비하는지도 몰랐고.
그럴 만한 시대이긴 했다.
배 수술은 아예 안 하니까.
소독도 안 하고 냅다 자르는 걸 수술이라 하는데, 배를 열면 어찌 되겠나.
‘후.’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해서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나도 이제 19세기 의과 대학에 온 지 어언 몇 달이 된 몸 아닌가.
전처럼 풍부한 상상력을 쓸데없이 발휘해 고통 속에 시달리는 일은 없었다.
“그럼…… 팔부터 볼까요? 여긴 많이 배웠으니까요.”
“어, 그래.”
“아니…… 뭘 안다고……!”
“닥쳐, 너는. 뒈질래?”
하여간 이 시대에서 그나마 지식이 있는 쪽은 사지, 팔다리였다.
그래 봐야 뭐…….
뼈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정도고, 깊숙이 들어가면 잘 모르고 있었지만.
그도 그럴 것이 뭘 알고 째는 것도 아닌데 부패 속도 때문에 시간도 많이 주어지지 못했다.
그나마 런던은 이런…… 납품업자들이 있어 망정이지, 다른 곳은 시신 구하기조차 하늘의 별 따기라고 들었다.
지이익.
나는 우선 절개선을 넣었다.
정확한 부위는 위팔.
의학 용어로는 Humerus 뼈가 있는 부위.
너무 깊숙이 푹 찌르면 안의 구조물이 죄다 상할 수 있어서 조심스레 쨌다.
“왜 이렇게 느려. 팍팍해야지!”
콜린은 그런 내가 답답한지 지랄을 해 댔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이 시대의 해부는 레이어를 따지지 못했으니까.
애초에 수술이 호쾌하게 팍팍 잘라 나가는 것인데 이런 걸 고려할 턱이 있겠나.
‘이제부터는 달라야 한다…….’
마취를 못 하는 이상, 사실 고려할 수 없는 건 맞았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럴 수 없다고 의사가 몰라도 되는 건 아니지 않나?
최소한 본인이 절단할 때 뭘 어떻게 절단하는지는 알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자…….”
나는 우선 살가죽까지만 절개선을 넣었다.
안쪽으로는 불그스름한 근육이 보였다.
‘이렇게 보니까…… 진짜 살아 있는 사람 같네.’
사실 나도 이렇게까지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신을 가지고 해부하는 건 처음이었다.
포르말린 처리를 한 시신과는 느낌이 완전 달랐다.
더 생생하다고 해야 할까.
지지직.
동시에 더 그럴싸한 해부가 가능했다.
나는 살가죽과 근육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이게 다 맨손이 아니고 장갑을 끼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지지직.
무언가가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살과 근육이 분리되고 있었다.
“어……?”
“이게 어떻게 된…… 어떻게 된 거지?”
의학 용어로 말하자면 박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더미스(Dermis), 즉 진피 밑에서 피하 지방과 근육을 싸고 있는 근막은 단단히 들러붙어 있지 않기에 손가락으로도 툭툭 밀어서 벗겨 낼 수 있었다.
피도 거의 안 났다.
모세혈관이 이어져 있지 않거든.
대신 좀 두꺼운 애들이 따로 들어가는데, 그건 육안으로 다 확인할 수 있었다.
투두두두둑.
하여간 절개선을 따라 손가락으로 쭉 밀어젖히니까 근육이 더욱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떻게 한 거야?”
이 모습은 꽤 충격적인 것일 터였다.
어느 정도냐.
콜린이야 이미 말을 잃었고, 옆에 있던 놈들도 왔다.
심지어 로버트 리스턴 박사도 와 있었다.
‘원래 같으면…… 조선 드립을 쳤겠지만…….’
너무 신비로워 보이다가 뽀록이라도 나면 죽을 것 같단 말이지.
해서 노선을 정했다.
‘오늘부터 나는 천재 메타로 간다…….’
아주 거짓말도 아니지 않나?
나 진짜 외과 교수할 때 천재 소리 여러 번 들었다구.
뭐, 이 사람들이 이제부터 받아들일 정도의 천재는 아니겠지만.
“뭔가…… 칼로 가르는데 느낌이 달라지는 구간이…… 세 번 있었어요.”
“한 번도 아니고, 세 번?”
다 거짓부렁이었다.
일단 장갑이 두꺼워서 느낌이 거의 없다고.
눈으로 보고 하는 거라고.
하지만 알 게 뭔가.
나 말고는 장갑 끼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고, 그나마도 낀 인간이 나까지 넷밖에 없는데.
“네. 이렇게 얇게 들어갈 때.”
내가 진짜 천재였다면 표피만 가를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진피까지는 갈라야 했다.
“그리고 더 두껍게 가를 때…….”
다음은 피하지방이었다.
아마 보기에도 확연히 다르긴 할 터였다.
피하지방은 노란색 지방 덩이거든.
나이도 젊고 남자인 데다가, 팔이다 보니 거의 없긴 했지만 하여간.
“그리고 이 밑에 근육. 근데 근육은 확실히 달라서 멈췄고요. 위로 당겨 보았더니 이렇게 하얀 실들이 있길래 손가락으로 밀어 봤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허!”
내 능청에 리스턴 박사님이 입을 쩍 하고 벌렸다.
나머지?
나머지는 닥치고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