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281)
검은 머리 영국 의사-281화(281/505)
281화 효도 중입니다 [3]
운동을 열심히 해서 그런가, 강제로 씻기고 나서 침대에 뉘어 드렸더니 시발시발의 마지막 발은 제대로 발음도 하지 못한 채 잠드셨다.
어머니?
어머니는 상태가 그것보단 나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래 버틴 건 아니었다.
맨몸 운동이라고 해서 만만한 것은 아니거든.
게다가 업턴에서 여기까지 오는 게 뭐, 가까운 것도 아니다.
비포장도로를 그리 좋지도 못한 마차 타고 오는 게 어디 편하겠나.
“후…….”
나는 그렇게 화려하진 않아도 잘 정돈된 방에 잠이 든 두 분을 보다가 이내 내 방으로 돌아왔다.
하얀 벽에 이런저런 그림들이 걸리고, 고풍스러운 인도산 나무로 만들어진 책장엔 책들도 꽤나 들어가 있었다.
역시나 화려하진 않아도 잘 정돈된 방이다.
심지어 우리 앨프리드 도련님의 집이 꽤 높은 곳에 있다 보니 내 방 창문을 통해서 런던 일부를 내려다볼 수 있다.
“고생 많았다, 진짜.”
처음 업턴에서 환생했을 때만 해도 진짜…….
하필 19세기라니.
딱 나 태어났을 때쯤의 한국이면 좀 좋나?
공부도 공분데, 주식에 코인에 어?
떡상할 거 줍줍하기만 해도 얼마나 살기가 좋냐고.
그러나 내가 두 발을 딛고 선 이곳은 19세기 영국이었다.
처음엔 희망을 품었더랬다.
대영제국이니까.
허나 19세기는…… 내가 생각했던 것에 비해 너무 낙후되었다.
이런 놈들이 뭐 조선 와서 거리에 똥이 있어 더러웠다느니 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니까?
“시발…….”
시발놈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꼴이 이것보단 나을 것 같다.
진짜 사람이 사람한테 할 수 있는 짓 중에 가장 최악일 짓들만 하고 있는 놈들 아닌가.
그래도…….
어찌 보면 그런 시대인 덕에 여기까지 온 거다.
아직 스무 살도 아닌데 부모님 남부럽지 않게 봉양할 수 있고, 런던 어딜 가도 무시 받지 않을 수 있다.
‘상태창만 있었다면…… 훨씬 수월할 텐데.’
타임 리프물이나 이세계물 보면 꼭 나오지 않나?
상태창이라는 거?
근데 왜…….
“스, 스테이터스!”
한국이 아니라 영어로 해야 되나 싶어서 외쳐 봤지만 별일이 없었다.
성량 부족이라 그런가 싶어서 더 크게 상태창과 스테이터스를 외쳐 봤지만 역시 별일 없었다.
뭐…….
그래도 애써 생각해 보면 상황이 나쁘진 않지 않나?
해서 나는 얼마 전 리스턴이 선물로 준 와인을 깠다.
와인 냉장고가 있는 시절도 아니고 여름이다 보니 상했을까 봐 걱정이 되었는데, 일단 냄새는 괜찮다.
업턴에서도 식초 된 와인을 몇 번 먹어 본 적이 있는데, 그게…….
애초에 식초를 목적으로 만든 게 아니다 보니 진짜 이상했다.
꼴꼴꼴.
하여간, 나는 유리잔에 와인을 따랐다.
소믈리에들이 쓰는 거랑 정확히 같은 물건이다 보니 기분이 좀 묘했다.
아무래도 화이트와인은 영영 못 먹지 않을까 싶다.
자동으로 소믈리에가 떠올라…….
“음.”
잔에 따르고 나니 진한 와인 내음이 방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난 좀 보디감이 있는 걸 좋아했는데…….’
내파밸리 와인은 품종이나 이런 게 다 쓰여 있는데 바게트 놈들은 사용자 편의 따위는 개나 줘 버렸는지 그냥 지네 지명만 쓰여 있다.
미친놈들.
아직도 프랑스가 세계의 중심인 줄 아는 모양이다.
우리 대영제국이 있는데 말이야.
막말로 우리가 니네 지역 이름을 대체 어떻게 아냐고.
더 나아가 그 지역에서 나오는 와인 품종이 뭔지는 더더욱 알 길이 없다.
“음.”
맛을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입 맛을 보았다.
탄닌 특유의 씁쓸한 맛도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달다.
스위트 와인인가?
왜 달지?
-와인에 납을 넣으면 오래 보관할 수 있다네.
그때 리스턴 형님의 말이 퍼뜩 떠올랐다.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말인데…….
요새 하도 일이 많아서 그런가 잠시 잊고 있었다.
땅그랑.
동시에 와인 병 안에서 땅그랑 소리가 났다.
불안한 마음에 와인을 전부 쏟아 내고 보니, 과연 금속이 있었다.
내가 뭐 금속 전문가는 아니라지만…….
딱 봐도 납이다, 이거.
왜 납이 들어가면 보관이 잘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없는데…….
굳이 이해를 해야 하나?
이미 벌어진 현상인데.
‘납 와인이라…… 어이구.’
전에 한번 들었는데도 손이 달달 떨렸다.
그래서일까?
간신히 들고 있던 잔을 떨어뜨렸다.
바닥이 돌이거든.
그러니까 당연히 깨져야 하는데…….
탱.
이상한 소리와 함께 옆으로 구른다.
살짝 금은 갔는데, 실금에 불과하다.
이대로 몇 번 더 후려쳐도 안 깨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유리 세공술이 21세기에 더 후져졌을 리는 없잖아?
그런 생각을 하면서 보니까, 잔이 약간 불투명해 보인다.
불순물이 끼어 있긴 할 텐데, 그렇다면 붉거나 파래야 할 텐데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살짝 응, 좀…….
‘설마 납인가?’
납을 왜 이렇게 많이 쓰나 싶을 텐데.
내 벽도 납이다, 저거.
근데 왜 들어와 살고 있냐고?
저거 강제로 벗기다가 가루 날리면 그때가 더 크리티컬하다.
나중에 내 집 새로 만들게 되면, 그때는 납을 쓰지 않아야 할 텐데…….
아예 안 쓰기에는 또 무리가 있다.
페인트 바르는 게 단순히 이쁘게 만들어 주는 게 아니라 방수와 부패 방지 등 여러 목표가 있는데, 아직 납 없이 그런 게 가능한 페인트가 없을 거다.
‘앞으로는 위스키만 마셔야겠구만.’
와인은 먹지 말아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내일 일이 없으니 좀 늦게 자도 되겠지만, 부모님들에게 런던 구경을 좀 시켜 드리려면 서둘러야 해서 그랬다.
‘미래의 트래펄가, 의회도 나 가면 보여 준다고 했고. 궁전은 앞에만 살짝 보는 건 된다고 했고. 빈민가도 신기할 테니까 거기도 가고…… 음식은…… 음식은 어지간하면 집에서 먹자.’
여행이라고 하면 사실 맛집 탐방이 절반인데, 아쉽게도 이 시기 영국 음식은 맛있는 게 없다.
아니, 괴랄한 게 대부분이다.
그나마 피시앤칩스는 맛이 있는데, 이건 제대로 하는 집에 가야 한다.
안 그러면 템스강 인근에서 잡힌 물고기로 튀긴 걸 먹게 되는데…….
강 자체의 물고기는 이미 멸종했을 정도로 오염이 심각한 상황인데 그 근처라고 뭐 괜찮겠나?
물고기가 아니라 물고기 형태를 한 독극물이다, 그건.
“마차에 타시죠.”
“와……. 이거 엄청 좋네.”
아침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어머님이 나섰기에 그랬다.
실로 오랜만에 김치찌개에 계란프라이를 먹었더니 아주 그냥 배가 든든하다.
조지프도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그를 제외한 놈들은 표정이 좋지가 않았다.
김치 냄새난다고 코를 싸쥐는 놈들도 있었다.
한번 잡숴 보면 그런 말이 안 나올 텐데…….
그거야 뭐 안 먹으면 지들 손해니 그대로 두기로 했다.
“먼저 광장으로 가죠.”
“아, 그…… 해전에서 이긴 기념으로 지었다는 광장 아니니?”
“알고 계셔요?”
“알지. 사장님이 마당발이잖아.”
“아, 하긴. 그렇긴 해요.”
우리 사장님…….
납 넣은 와인으로 돈 많이 벌고 계시지.
이게 꽤나 달다 보니 진짜로 돈이 되나 본데…….
현실을 알게 된 이상 더는 응원은 못 할 거 같다.
아니, 그보다 우리 부모님 어쩌냐.
납 중독일 거 같은데.
‘뭐 이제부터라도 위스키나 맥이자.’
이미 중독된 납을 뭐 어쩌겠냐.
게다가 고혈압 말고는 어디 아픈 데도 없어 보인다.
뭐 별다른 검사 장비가 없으니 아픈 데가 있어도 알 수가 없기는 한데…….
그렇다고 해도 진짜 아픈 데가 없어 보인단 말이지.
어쩌면 현대 의학이 발전하면서 오히려 인류가 약해진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앞으로 몇 세대만 더 납 먹고 견디면 훨씬 강한 신인류가 탄생할 수 있었는데 눈치 없는 의사 놈들과 과학자들이 쓸데없이 노력해서 뭔가 바꾼 거 같기도 하고.
“으응. 그래.”
“여기가 광장이에요.”
“으응…… 그래.”
“여기가 궁전이고.”
“으응…….”
“의회예요.”
“으응, 그래.”
그것과는 별개로 지금 막 다니고 있는데 우리 부모님 얼굴이 그리 좋지가 않다.
내가 뭐 진짜 십 대면 섭섭하겠는데, 전생까지 합치면 사실 부모님이랑 동년배 아닌가.
아니, 아니지.
동생이야.
얼굴을 보고 있으면 아빠 아니라 할아버지 소리가 나올 거 같은데…….
‘뭐지? 힘든가? 아직 여독이 안 풀렸나?’
오히려 걱정이 들었다.
마흔이라고 해도 같은 마흔이 아니잖아.
납 중독도 있고, 워낙 고생도 한 데다가 아무래도 영양 상태도 현대인과는 다를 수밖에 없으니…….
“힘드세요? 좀 쉴까요?”
“어…… 아니, 그보다 궁금한 게 있구나.”
해서 물어보니 다행히 힘든 건 아닌가 보다.
거짓말은 아닌 거 같은 게, 눈이 그래 보인다.
“어떤 거요?”
해서 다시 물어보니 아버지가 내가 아니라 허공을 주시했다.
그제야 깨달았는데, 어머니는 애초부터 그러고 있었다.
나도 그 시선들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냥 평범한 런던 하늘만 있었다.
주의 집중하지 않으면 해가 어디 있는지 찾기 힘든 뿌연 하늘.
오늘이라고 해서 유난히 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슬슬 여름도 지나가고 있는 마당이긴 하지만 아직 춥진 않잖아.
겨울에 비하면 뭐…… 이 정도면 맑은 하늘이다.
“저…… 하늘이 왜 저러는 거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물어 온 것은 놀랍게도 하늘이었다.
“하늘이요?”
“그래. 저게 이상해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뭐가요?”
영문을 모르겠다.
오늘 맑은데.
비도 안 오고.
해서 뚱한 얼굴로 아버지를 보고 있자니, 어머니가 옆에서 갑자기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 태평이 시력을 회복하게 하옵시고 어쩌고 하시는데…….
이해가 안 갔다.
사실 백내장이 올 거면 우리 어르신들이 오지 난 아니지 않나?
“저 뿌연 게…… 저거.”
“아, 저거요? 런던이 늘 그렇죠, 하하. 여기 공장도 많고 하니까요. 그래도 오늘은 스모그…… 그러니까 뭐, 아주 심한 날은 아닌데요?”
런던 스모그라고 하면 20세기에만 있었을 거 같지만…….
사실은 13세기부터 있었다.
1200년대부터 있었다고.
왜 그런고 하니, 영국 동북부 해안으로 가면 그냥 석탄이 발에 챈다더라고.
지금이야 다 캤으니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철도 엄청 많고, 석탄도 많다 보니 중세 초기부터 난방에도 나무 땔감이 아니라 석탄을 썼다는 말이 있다.
13세기에 법으로 석탄 좀 그만 쓰라고 했을 정도니 말 다 한 셈이지.
“그냥 뿌옇기만 한 게 아니라…… 주변으로 저 노란 띠는 뭐냔 말이다.”
“아, 아아아. 하하.”
하여간, 나는 아버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지역을 보고 나서야 뭘 말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서쪽인데, 저기에 항구가 있다 보니 공장도 많고 그렇지 않나.
“저도 잘은 모르겠는데…… 우리 런던 사람들은 완두콩 수프라고 불러요.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아…… 괜찮은 거야?”
“그럴 거 같진 않아요.”
말하면서 깨달았다.
내가 이제 진짜 훌륭한 19세기 런던 사람이 되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