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287)
검은 머리 영국 의사-287화(287/505)
287화 군납 [3]
“잘 보게.”
리스턴은 나무토막을 휙 하고 던지더니 그걸 칼로 네 토막을 냈다.
흔들리는 뱃전에서 리스턴의 혈향이 느껴진다, 이 말인데…….
왜 이 지랄인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지랄이고 나발이고 리스턴이 무서워서 그냥 가만히 있었겠지만…….
이젠 아니다.
“대체 이걸 왜 하는 겁니까? 나무토막을 왜 잘라요?”
“하하, 이 친구.”
리스턴은 그런 나를 보며 여유롭게 웃었다.
그러곤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언제 제일 많이 다치겠나? 배 안에서.”
“아무래도…… 풍랑이 일 때겠죠?”
“그래. 흔들릴 때 많이 다친다고. 그럼 그때 수술을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어? 지금 이런 상황에서 나무토막이라도 잘라 봐야 사람 팔다리도 자르지 않겠나.”
“아.”
이상한 말인데 존나 설득력이 있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는지, 작은 나룻배를 몰고 나와서 거인의 칼춤을 보던 노인도 박수를 쳐 댔다.
이런 숭고한 뜻이 있는 줄 알았으면 군말 안 했을 거라는 말도 했다.
기왕이면 안전한 템스강에서 했으면 더 좋았을 거란 말도 했지만…….
안전?
템스강 물에 빠지면 독살당할 거다.
내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뱃놀이 나갔던 귀족이 배 뒤집히는 바람에 다 죽었는데…….
거기 물이 가슴팍까지밖에 안 오는 곳이다.
“그러니까 자, 해 보게.”
“읍!”
“아니, 이걸 왜 못 자르는 건가. 사람 살은 잘도 자르면서!”
“상식적으로 이걸 의사가 왜…… 수술 연습이 낫지 않겠어요?”
그래, 대의는 이해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무토막은 좀 아닌 거 같다.
일단 내가 쓰는 메스는 나무토막 자르는 데 쓰기엔 너무 작고, 너무 비싼 물건이다.
독일제라고, 독일제.
대영제국 야금술도 뭐 상당한 수준인 데다가, 원래도 철광석이 많이 나는 지역이긴 하지만…….
편견이 무섭다고 어쩐지 독일이…….
“수술 연습?”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어느새 리스턴이 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약간 무서운 얼굴을 하고서였다.
하지만 나무토막 자르는 것보다는 대면하는 게 나았기 때문에, 나는 머릿속을 굴려 적당한 단어를 찾아보게 되었다.
“네. 수술을 하는 게 낫죠.”
“으음…… 여기서…… 근데 아무래도 사고가 나지 않겠나?”
“실제 환자를 대상으로 하기는 좀 그렇죠, 아무래도.”
“죄수들을 데려올까?”
“아니, 아니. 그것도 좀…….”
인체 실험도 정도가 있지…….
여기서 수술하면 살겠나?
범선이라도 빌렸으면 훨씬 나을 텐데, 전쟁 준비 중인 상황에서 범선을 그냥 어떻게 빌리나.
돈이 있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걸 깨닫는 중이었다.
아무튼, 나룻배 위에서 수술을 해야 한다 이 말인데…….
말이 나룻배지. 노인 외에 노 젓는 사람이 넷이나 더 있는 꽤 큰 배긴 하지만, 그래도 비좁긴 하다.
엄청 흔들리고.
‘드라마 보면…… 중증외상센터인가? 거기 백강혁은 뭔 수술을 고속 전투정 위에서 해 버리던데…….’
작가 새끼 얼굴 한번 보고 싶다.
병원의 ‘ㅂ’ 자도 모르는 놈이 쓴 게 틀림없다.
수술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어?
메스 쥐고 절개하고 하는 게 얼마나 섬세한 작업인데 그걸 배에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는지는 모르겠는데…….’
지금 상황에서 가능한 수술이라는 게 몇 개 없는 게 사실이다.
싫지만, 절단이 메인이 될 거 같다.
팔다리 재건은 말이 안 되니까.
골절이 심해도 아마 자르게 될 거 같다.
배……?
배가 다쳐?
거의 죽을 거 같지만, 이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자.
“시신으로 연습하죠.”
“아, 시신! 하긴, 그렇네. 죄수 대신 시신을 쓰면 되겠구만.”
하여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는 수술이라는 게 죄 폭력적인 것이다 보니 아무리 죄수들이라고 해도 해 주진 못하겠고…….
해서 시신을 쓰기로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 선장님이라고 해야 할지 그냥 배 주인장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양반의 얼굴은 실시간으로 썩어들어 가고 있었다.
“처, 청소비는 주셔야 합니다…….”
“주죠, 근데 어차피 바닷바람 맞고 하다 보면 소금물에 씻겨 나가지 않으려나?”
“시신 썩은 게 어떻게 씻깁니까?”
“나야 모르죠.”
하마터면 여기서 산 사람 팔다리 자를 뻔했다는 건 꿈에도 모르니까 이런 속 편한 소리를 하고 있는 거다, 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팔다리를 잘랐다.
리스턴이 있으니 나는 할 필요가 없는 거 아닌가 했다가, 군대 규모를 떠올리고는 생각을 고쳐먹어서였다.
뭐…….
아무래도 청이 제대로 싸울 것 같진 않지만.
연습하면서 범선 오가는 걸 좀 봤거든?
연안에서도 저렇게 흔들리면, 먼바다에서는…….
비전투 손실이 상당히 많을 거란 얘기가 된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니지.”
“아, 네.”
그래서 거의 처음으로 내가 리스턴에게 수술을 배우고 있다.
솔직히 절단술 그거 그냥 팔다리 툭툭 자르면 되는 거 아닌가 했다가…….
“병신인가.”
“네?”
“평신이 맞냐고. 이렇게 못하는데.”
“아…….”
이게 생각보다 엄청 어렵다는 걸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다.
일단 사람이 다른 사람 팔이나 다리를 단칼에 자른다는 게 쉬울 리가 없긴 했다.
마취가 있으니 좀 천천히 자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싶긴 했지만…….
우리가 하는 마취가 제대로 된 마취가 아니잖아.
길어도 20, 30분 내에 끝내는 게 좋다.
근데 그러려면 어차피 내가 알고 있는 절단술은 안 돼.
“자, 이 칼이 이렇게 끝이 삐죽하게 돌출되어 있는 이유가 있단 말일세.”
“네에.”
역시 빨리 자르려면 리스턴류가 최강이다.
그래서 보니 리스턴칼이라고 이름 붙은 이 칼들이 괜히 이렇게 생긴 게 아니었다.
뼈에 대고 살을 돌려 깎기 위해서였다.
무게감이 있어야 해서 아래는 두꺼운 것이고…….
문제가 있다면.
“너무 무거운데요?”
“운동, 자네는 안 하나?”
“하는데…….”
“이거 안 되겠군그래.”
내가 다루기엔…….
검이라고 하기엔 너무 크고 거대했다는 점이었다.
해서 리스턴은 자신이 잘 아는 대장장이를 불러다가 맞춤형 검을 제작해 주었다.
대장장이는 의외로 뭐라 하지 않았다.
“하긴 이게 일반인이 휘두를 수는 없는 검이죠.”
자기가 만들면서도 장식품인 줄 알았다는 얘기도 했다.
그래서 날도 안 살려 놨는데, 갈아 달라기에 어이가 없어서 굳이 그래야 하냐고 했다가 리스턴을 마주하고 나서 바로 갈았다고도 했고.
하여간,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출항 날짜에 맞춰서 새로운 검을 얻을 수 있었다.
수술 도구니까 메스라고 하고 싶지만 아무리 봐도 검이다, 검.
허리춤에 차고 있으려니 부모님이 다가와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네가 병자호란의 복수를 하는구나. 내가 얘기했는지 모르겠다만…… 우리 조상님 중에 당시에 죽은 분이 계신다. 임경업 장군을 모셨지.”
특히 아버지가 유난이었다.
근데 뭐 이해는 간다.
임경업 장군님이면 인정이지.
“그래요?”
“그래. 잡졸이셨지만.”
“아…….”
“뭐가 아냐. 아무튼, 청에 가는 김에…… 조선 소식을 들을 수 있으면 좀 알아 와라.”
“아…… 네. 그래야죠.”
“그래. 어차피 되돌아갈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나이가 들수록 고향 산천이 궁금해지는 건 어쩔 도리가 없구나.”
나는 아버지의 눈에서 회한에 잠긴 노인을 보았다.
사실 마흔이면 노인도 아니고 뭣도 아닌 나이지만…….
시대가 시대지 않나.
아마 배 타고 떠나올 때부터 고향은 타향이 되었을 터였다.
왕래가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이니까.
제아무리 대영제국이 세계 경영을 하네 어쩌네 해도, 조선은 세상 끝이다.
괜히 지들 멋대로 극동아시아라고 불렀던 게 아니란 얘기다.
“자, 이거.”
“어머니……?”
아버지와는 별개로 어머니는 그저 자식 걱정뿐인 거 같다.
뭔가 바리바리 싸 주시는데…….
“김치다, 김치. 배 타면 먹잘 것도 없다던데, 이거라도 먹어야지.”
“아…… 김치…….”
이거 냄새나서 좀 민폐가 될 것 같은데…….
“뭘 눈알을 굴려! 어미가 챙기면 감사합니다 하면 될 것이지!”
“그, 그래요.”
“그리고 조지프는 어? 정어리 파이 가져간다더라. 그것보단 이게 훨씬 낫지. 안 그러냐?”
“그것도 그렇네요.”
민폐라.
생각해 보니 그렇지 않을 거 같다.
영국 음식에 비하면 훨씬 낫지.
원래 섬나라면 해산물이 도처에 깔려 있는 만큼 음식이 맛있어야 할 텐데…….
내 생각이지만 식민지 만드는 데 그렇게 열심을 내는 것도 다 맛있는 것 좀 먹고 싶어서일 거다.
청나라도…….
아마 중식이 탐나서일 거야.
프랑스도 그렇게 싫어하지만, 21세기 최고의 프랑스 음식점들이 싹 다 런던에 있잖아.
“걱정 말고 잘 다녀오게나.”
“내가 책임지고 잘 운영하고 있겠네.”
하여간, 나는 등에는 김치를 지고, 허리에는 김태평칼을 찬 채 여러 유력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곤 범선에 올라탔다.
전열함이라는데…….
그 유명한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뛰었던 애들은 아니고, 비슷한 연배의 배라고 들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거대한 배였다.
그래 봐야 생전에 티브이에서 봤던 배들보다는 작았지만.
아무튼, 이 배를 타고 몇 달을 가야 청이 나올 거다.
그전에 인도에 들르겠지만…….
“일단 케이프타운까지 달리는 것이 목적이죠.”
“아.”
“뭐 그전에 여기저기 들르긴 하겠지만, 보급만 하고 뜰 거라 제대로 볼 수 있는 항구는 거기가 처음이 될 겁니다. 여행이나 상행이 목적이 아니니까요.”
배에 오르자 인도가 아니라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이 첫 번째 기항지가 될 거란 얘기를 들었다.
생각해 보니까 수에즈 운하가 없는 시절이다 보니 케이프타운, 그러니까 희망봉이 중요하긴 하겠다 싶었다.
가다가 싹 뒈지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19세기 영국이면 뭐 항해에 있어서만큼은 만렙 아니겠나?
게다가 이리저리 오가는 군인들을 보고 있노라니 든든해진다.
매독 걸린 신병들만 봐 와서 몰랐는데, 과연 대영제국 군대가 정예는 정예다.
제국주의 열강의 위대한 모습을 이렇게나마 체험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네, 알겠습니다.”
“뭐…… 따로 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편히 계시다가 돌발 상황이 생기면 그때 요청하겠습니다.”
“네.”
거기에 더해 선장님도 아는 사람이다.
찰스 엘리엇이나 조지 엘리엇이라는 얘기는 아니고, 그 밑에 있는 사람이다.
어머니가 이탈리아계라고 하길래 좀 얼렁뚱땅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생긴 거부터 해서 인간이 그냥 해군 그 자체였다.
인간적으로 친하게 지내기엔 무리가 있을지언정, 선장으로는 최고의 관상인 거 같았다.
“밥이나 먹죠.”
“아, 네.”
게다가 밥도 같이 먹자고 했다.
자고로 선장님 밥은 좀 다른 법 아니겠나.
해서 왔더니만…….
“이게…… 대체 뭡니까?”
리스턴조차 경악한 채로 물었다.
우리 선장님이 꺼낸 이상한 치즈 때문이었다.
아니, 치즈가 맞기는 한가 싶다.
뭐가 자꾸…… 움직여.
“아, 이게 카수 마르주라는 치즈인데요. 별미입니다, 별미. 어머니가 이탈리아분이다 보니 어릴 때부터 먹을 수 있었는데, 오래 보관해도 되는 음식이거든요. 잔뜩 가져왔습니다.”
음식이 맞나……?
나와 리스턴 그리고 제자들 모두 치즈 겉에서 바글거리는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선장님은 그걸 슬쩍 잘라다가 빵에 발라 야무지게 먹었고.
동시에 주변으로 뭔가가 튀었는데…….
툭.
익숙하다는 듯 엄지손가락으로 꾹 눌러 죽이셨다.
나도 선장님을 꾹 눌러 죽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