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288)
검은 머리 영국 의사-288화(288/505)
288화 전쟁 [1]
나중에 알고 보니 썩은 치즈였다.
아, 그렇다고 해서 못 먹는 것을 우리 앞에서 늘어놓은 것은 아니긴 했다.
놀랍게도 이탈리아에서는…….
치즈를 썩혀서 구더기랑 같이 먹는 그런…… 아주 흉악한 풍습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아니지.
‘정말…… 여긴 이세계인 것일까?’
내가…….
전생에 그리 풍족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우연찮게 유럽을 한번 가 본 적이 있다.
유럽이라기엔 이탈리아만 학회차 따라간 것이지만, 아무튼.
원래 한국 살 때도 파스타 좋아했던 만큼 이탈리아 로마에서도 나름 식도락을 즐겼는데, 그때는 썩은 치즈는커녕 구더기도 못 봤다.
‘확실히…….’
리스턴도 그렇고, 뭔가 상식과 살짝 빗겨 난 거 같은 상황이 많다.
내가 더 유식한 사람이었다면, 그러니까 19세기 유럽에 대해 해박한 사람이었다면 훨씬 판단이 쉽고 빠를 수 있었을 거 같은데…….
아쉽게도 의학 공부하는 것만 해도 벅찼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고민을 하고 있으려니, 리스턴이 다가왔다.
우리가 탄 배는 스페인 리스본에서 잠시 보급만 한 후 그대로 남쪽으로 내달리고 있는데, 그래서 그런가 날씨가 무척 더웠다.
무엇보다 갑판에 나와 있으면 저 쨍쨍한 햇볕을 막아 줄 수 있는 게 단 하나도 없는 만큼 진짜 더럽게 더웠다.
그럼 들어가 있지 뭐 하러 나와 있냐고?
증기선…….
아니, 아니지.
모터로 가는 배만 타 본 사람들은 모른다.
알 수가 없지, 범선 특유의 이…… 개같은 흔들림을.
“멀미가 나서…… 근데 형님.”
“응.”
“웃통은 왜…… 벗었어요?”
“더워서. 자네도 벗게나. 훨씬 나아. 그리고 이럴 때 아니면 햇볕을 대체 언제 이렇게 맞아 보겠나.”
내가 원래 뱃멀미 같은 거 안 했었는데…….
그건 그냥 제대로 된 배를 안 타 봐서 그렇게 알았던 거 같다.
프랑스 가던 도중에 만났던 풍랑도 위험하고 개같았지만 노상 흔들리는 배를 타고 있는 것도 고역이다.
해서 나와 있는데…….
인간 리스턴이라고 해서 멀미를 어찌 아예 피할 수 있겠나.
그도 주로 갑판에 나와 있거나, 아예 선수에 위치한 선장실에 가 있곤 했다.
그리고 갑판에 나와 있을 땐 언제부터인가 옷을 벗기 시작했는데, 원래도 흉악했던 그의 몸이 해에 그을리기 시작하니 정말이지…….
“저는 안 됩니다.”
“하긴 안 되겠더군.”
“그렇게 말하니까 또 기분이 살짝 상하는데요?”
“그럼 덤벼 볼 텐가?”
“아뇨. 병사들하고나 싸워 보세요.”
“아쉽게도 이젠 덤비는 놈들이 없어.”
그런데도 우리 로열 네이비 여러분은…….
아니, 오히려 그래서 전의를 불태웠더랬다.
감히 리스턴한테 막 덤비더라니까?
-하하, 좋은 일이죠. 뱃일이라는 게 무료할 때가 많아요. 특히 지금처럼 바람이 좋아서 그냥 달리고 있을 때는…….
선장이라는 사람은 그걸 말리기는커녕 그저 두고 보고만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
어떻게 되기는.
우리 일이 늘었다.
“하긴…… 꽤 다쳤죠.”
“부러뜨리진 않았네.”
“힘 조절을 한 거죠?”
“응? 당연하지. 내가 진심으로 하면 배 침몰해.”
“그…… 그럴 거 같긴 합니다.”
머리 깨지고, 여기 삐고, 저기 삐고…….
그 와중에 어디 부러진 사람이 없는 게 진짜 다행이었다.
이제 보니 다행이라기보다는 리스턴이 의도했던 거 같긴 한데.
아무튼, 그 덕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병사들이 훨씬, 훨씬 더 친절해졌다.
-오, 피영시인!
-청나라 놈들에게 저주를!
-혹시 저 죽으면 심장에서 피 빼 드시건 뭘 해도 좋으니까…… 살려 주십쇼.
뭐 원래도 그리 불친절하진 않긴 했다.
내가 생각해 봐도 그럴 수밖에 없긴 하다.
세상에 소문이 이따위로 도는 사람한테 어떻게 감히 함부로 굴겠어.
나 같아도 무서워서 몸 사리지.
“이거 드셔 보십쇼.”
“이건……?”
“리스본에서 기항할 때 낚은 겁니다. 사람들이…… 해군이라고 하면 생선 실컷 먹는 줄 알 텐데, 이렇게 달리고 있을 땐 낚시 절대 못 하거든요. 오히려 저희에게 귀합니다, 이런 싱싱한 생선은.”
“아, 그렇구나. 고마워요.”
싱싱…….
이미 뒈진 지 하루는 넘은 거 같은데, 이 생선.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생으로 들이밀지는 않았다는 건데, 그렇다고 해서 잘 구웠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나무로 된 배 타고 가면서 불을 피운다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라서 그랬다.
필요한 일이거나 허가된 일이라면 모를까…….
군함에서 선장의 허락 없이 들여온 음식은 사실 불법이다.
뭐 생선 낚아 먹는 것 정도는 알아도 넘어가 주긴 하는 모양인데, 아무튼, 그 결과 내 앞에 놓인 생선은 바닷물과 햇볕만으로 조리한 기이한 음식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에 막상 먹어 보면 맛있는 경우가 있지.’
그게 클리셰지만 이 경우는 예외다.
조리한 놈이 영국 놈이니까.
하지만 그 거칠다는 뱃사람, 그중에서도 해군이 이렇게 순진무구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데 안 먹겠다고 하는 건 좀 쫄리는 일이지 않나.
해서 먹었고, 역시나 개같았다.
맛만 따지면 썩은 치즈가 나았던 거 같기도 하다.
하지만…….
“고마워요.”
“네, 맛있죠?”
“네…….”
아무리 선장님이 배려해 줘서 가끔 밥도 같이 먹고 있다지만…….
암만 그래 봐야 내가 런던에서 먹던 음식에 비할 바는 아니지 않겠나.
게다가 최근엔 부모님이 오시게 되면서 한식을 심심치 않게 먹게 되었단 말이다.
그러던 차에 이 망할 병사용 음식을 먹게 되었으니 이 어찌 한스럽지 않으랴.
그냥 병사도 아니고 영국군 음식이다.
괜히 2차 세계 대전 때 이탈리아 포로들이 제발 밥은 우리 손으로 지어 먹게 해 달라고 떼를 쓴 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
‘딴 게 고문이냐? 이게 고문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놈들…….
진짜로 음식 때문에 제국주의 된 게 틀림이 없다.
모함이 아니라 합리적인 추론이다.
“아, 목말라…….”
그렇게 맛대가리 없는 생선을 먹고 있자니 콜린이 다 죽어 가는 얼굴로 나타났다.
불쌍한 놈.
원래 상행하는 귀족 집안사람인데, 몸 약해서 의대 보냈다고 들었는데…….
나 때문에 그 힘들다는 배에 탔다.
그것도 심지어 지중해도 아닌 대서양을 달리고 있다.
아메리카로 가는 건 아니고, 아프리카 해안선을 따라 달리고 있는 거긴 하지만…….
오히려 이게 전체 거리로 따지면 훨씬 길잖아?
“물 먹지 왜.”
“물이 물이 아니라…… 뭔가…… 이상합니다, 교수님.”
“아, 그렇지. 술이지, 사실상.”
“네. 알딸딸합니다.”
“너 원래 나보다 술 훨씬 세지 않아?”
“멀미…… 때문에.”
“아.”
원래 멀미 같은 컨디션 저하에 의한 병이 생기면 수분 보충이 필수다.
근데 배에는 순수한 물은 없다.
대신 약한 술이 있다.
물은 썩는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인데…….
맨날 여름 되면 캐리어 선생님 찾았잖아?
아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냉장고 발명한 사람을 발굴해서 새로 숭배해야 한다.
아무리 봐도 그 사람이 한참 윗줄이다.
‘왜 난로는 잘만 만들면서 냉장고는 못 만들까.’
19세기 과학자 새끼들…….
다 빠져 가지고.
약 만들랬더니 코카인이나 만들고 말이야…….
“희망봉이다!”
그렇게 또 얼마를 달렸을까.
콜린은 이제 그냥 술 먹고 취하는 게 낫겠다고 하더니, 선장님이나 장교들이 먹으려고 꼬불쳐 둔 것으로 보이는 술을 런던 아버지 재산으로 가불해서 사 먹고 있었다.
육지에서의 가격보다 거의 10배 이상 비싼 가격을 주고 사 먹고 있다, 이 말이다.
다시 말하면 제정신이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조지프와 앨프리드라고 해서 상황이 더 나은 것은 아니었는데, 그 둘은 의외로 더위에 아주 취약했다.
“으아…….”
“살려 줘…….”
하긴 영국이 위도가 높긴 높지.
그중에서도 런던은 음습하기도 하고.
그에 비해 여긴…….
이 망망대해는 하필이면 구름도 없어서 해가 미친 듯이 내리쬔다.
“나도 죽겠네, 이거.”
그 와중에 제일 강건해 보이는 리스턴까지 엄살을 부리기 시작했다.
강해 보이지만 어른이라는 책임감 때문에 지금까지 괜찮은 척했던 건가 싶긴 했다.
허나 돌아오는 답은 실로 가관이었다.
“너무 심심하네…… 누구 하나 다치는 일도 없고. 내가 생각했던 전쟁은 이런 게 아니란 말일세.”
“아니…… 형님. 의사가 되어 가지고 그게 할 말입니까?”
“다치는 사람 있으면 바로 치료하겠다는데, 훌륭한 마음가짐 아닌가?”
“다치기를 바라는 게 무슨…….”
“그나저나 이제 드디어 희망봉이야. 배에서 내릴 수 있단 말이지.”
“그래 봐야 하루, 이틀일 걸요……? 길면 그것도 좋은 일은 아닐 거고요.”
몰랐는데 배라는 게 그냥 항해만 해도 망가지는 물건이란다.
생각해 보면 차도 그러긴 하니까 배도 그러긴 할 텐데…….
진짜 지루한 시간이긴 했어도, 절대적인 시간은 그렇게 오래 지난 게 아닌데 벌써 보수가 필요할 정도라니.
그나마 진짜 망가진 게 아니라면 하루 이틀이면 일이 끝난다고 했으니 다행이다.
“뭐가 아닌가. 내가 사실 조선에도 여차하면 가 보고 싶었는데, 이제 배라면 진절머리가 나네.”
“그…….”
사실 지금까지 온 거보다 한 몇 배는 가야 청나라가 나오는 거 아닌가?
게다가 우리는 청나라에서 살 게 아니라 다시 돌아올 거니 대단히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런 말을 리스턴 앞에서 해서 복장 터지게 하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지 않나.
“그렇죠.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요.”
“그래, 그렇지…….”
그에게는 불행하게도, 배는 굉장히 튼튼했다.
우리는 케이프타운에 기항한 지 만 하루가 채 지나기 전에 다시 출항했다.
-하하. 대영제국의 홍복입니다! 청나라를 쳐부수라고 주님께서 배에 축복을 내려 주신 모양입니다.
출항 얘기를 들었을 때, 리스턴의 얼굴이 말 그대로 흉신악살처럼 변했지만…….
주님 운운하는 데다가 대영제국 운운하는데 명색이 애국자요 참된 신앙인임을 자처하는 리스턴이 거기서 또 화를 내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보니 간신히 참는 걸 볼 수 있었다.
“청나라…… 이게 다 청나라 때문이야.”
혼자 방 안에 틀어박혀서 이상한 말을 하고 있긴 했더랬다.
그냥 어지간한 사람이 그러고 있어도 무서울 텐데, 리스턴은 그간 살이 탄 데다가 자외선 때문에 비타민 D가 합성되면서 근육이 더 잘 생기는 건지 뭔지 영락없는 괴물이 되었다 보니 더더욱 무서웠다.
-저 사람이 비밀 무기로군요?
상황을 잘 모르는 케이프타운의 영국인들이 이런 말을 했을 정도였다.
선장도 딱히 저 사람이 사실은 의사라는, 아무도 안 믿을 거 같은 소리를 하고 싶진 않았는지 그냥 ‘네’ 하고 넘어가는 것을 나는 두 눈 똑똑히 봤다.
‘진짜 청나라 군함에 뛰어드는 건 아니겠지.’
그 생각을 나만 한 건 아니었는지, 싱가포르에서 합류하게 된 조지 엘리엇은 광저우 해안에 모여든 청나라 군함을 노려보고 있는 리스턴의 어깨를 잡았다.
“다친 사람들 치료 부탁드립니다.”
의사로 왔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뜻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헌데…….
이번에도 돌아오는 답은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어 있었다.
“다친 사람이 있으면 우리나라 군인뿐 아니라 청나라 사람들도 일단은 치료할 작정입니다.”
“네?”
“의사가 응당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먼 뱃길을 건너오는 동안 인격 수양까지 된 건가?
잠시 그를 이상하게 본 것에 대한 반성을 시작하게 되었을 즘, 리스턴이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아픈 치료 없나? 아픈 치료.’
난 악마가 현신한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