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311)
검은 머리 영국 의사-311화(311/505)
311화 시범 [1]
원장님의 말에 나는 잠시 정신을 잃었던 거 같다.
확실하지는 않은데, 기억이 안 나는 구간이 있다.
‘꿈인가?’
꿈일 거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디 우리 원장님이 갑자기 내게 포경수술을 권할 리가 없지 않겠어?
그냥 하는 거면 또 모르겠는데 남들 앞에서, 공개 석상에서 수술받으라고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심지어 그 수술이 포경수술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평.”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리스턴이 입을 열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들어도 무시하기 어려운 목소리였다.
낮고 굵고, 무엇보다 아주 위협적인 목소리.
완전히 잊고 있던, 원시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본능을 일깨우는 소리.
“응?”
당연하게도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사실 꿈도 아니었던 거 같긴 한데.
하여간, 제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렇게 눈을 번쩍 뜬 내 어깨를 리스턴이 툭툭 두드렸다.
“자네 걱정은 내 잘 알지.”
“아, 그래요?”
역시 형은 형이다.
형님이야.
어?
내가 아무리 19세기 런던 상놈 새끼들의 도시에 떨어졌다고 해도 유교 사상이 뼛속 깊이 있는데 어디 내 소중한 부위를 남들 앞에서 훌렁훌렁 깔 수 있단 말인가.
“작다고 생각해서 그렇지?”
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려니 이 인간이 미친 소리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걱정 말게. 내가 너무 커서 그렇지, 자네는 평균이지 않나.”
아니…….
나는 딱히 내가 작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21세기에 너튜버 중에 비뇨기과 전문의분이 계셨는데…….
그분 말씀 중에 평균에 대한 얘기도 있었거든?
근데 난 평균보단 살짝 크더라고.
전생에도, 지금도.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면 대체 뭘 망설이는 겐가.”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는 게 이상해서 소리쳤더니 리스턴이 나를 보며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내면에 담긴 당당함에 나는 그만 말문이 턱 막혀서 눈만 동그랗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그러자 리스턴은 속사포처럼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나도 자네가 의학의 진보에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우리 원장 말 듣고 생각해 보니까 진짜 온몸을 바친 적은 없지 않나.”
뭔 소리야, 이게.
인생 갈아 넣고 있는데.
하고픈 말은 많은데 이상하게 입이 잘 열리지가 않아서 잠자코 있었다.
“막말로 오줌을 마셔 봤나, 똥물을 마셔 봤나. 아니면 하다못해 소변 줄을 꽂았나. 이거 다 확실히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지 아닐지 모른 상태에서 자네가 주도적으로 진행한 실험인데…… 막상 실행에 옮긴 건 우리 콜린이나 앨프리드였지 않나.”
“맞습니다.”
“그 말이 옳습니다.”
언제 왔는지 모르겠는데 콜린과 앨프리드가 리스턴의 양어깨 뒤에 까치발을 하고 서서 외쳐 대기 시작했다.
“그래, 나도 들었어. 자네는 정말…….”
원장님도 끼어들었다.
“선택하게. 콜린은 이도 뽑고, 똥물도 마셨지. 앨프리드는 소변 줄도 꽂히고 소변을 마셨고. 자, 자네는 어쩔 텐가. 앞서 말한 네 가지 중 둘? 아니면 포경.”
“아니…….”
“남들은 선택할 자유도 없었어. 자네는 선택할 기회도 주지 않나. 이게 다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이게 어떻게…….”
“자네는 작위도 받지 않았나. 돈이야 말할 것도 없고. 헌데 정작 실험은 다른 사람들로만 했네. 여기 있는 둘이야 입이 무겁지만 다른 놈들은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어. 그때 할 말이 있어야지.”
“아니…….”
이게 맞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맞긴 한 거 같다.
하긴 앞으로도 실험을 시켜야 하는 몸이지 않나?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스모그도 있고…….
‘백신…….’
천연두에 대한 백신은 그나마 어느 정도 확립이 되어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다른 질환에 대한 백신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실험을 해야 한다.
동물 실험도 실험이지만…….
이것도 인수 공통 감염병에나 해 볼 수 있는 거다.
다른 병에는 아직까지는 인체 실험이 유일한 방법이다.
“자네 인간 백정이라는 소문까지 도네. 주로 죄수들 사이에서지만…….”
“네?”
“자네가 교도소에 오면 누군가 반드시 죽어 나가는 거야.”
“아.”
이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참…….
세상의 인식이 참새만 하니 대붕의 뜻을 몰라준다 싶었다.
하지만 나 또한 비겁한 사람은 아니지 않나.
전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똥, 소변, 소변 줄, 발치……에 비하면 포경수술은 아무것도 아니야.’
따지고 보면 전생의 나도 포경수술을 받긴 했다.
어릴 때 받아서 별 느낌은 없었지만…….
“알겠습니다. 하죠.”
“오.”
“역시, 자네야. 이렇게 되면 우리 병원이 확실히 런던 포피는 다 자를 수 있겠어.”
리스턴이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원장님도 껄껄 웃었다.
런던 포피 운운하지만 않았으면 더 뿌듯했을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뭐 하기로 했는데 뭐 어쩌겠나.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하는 건 해야 한다.
하지만 그냥 할 수는 없다.
“조건? 남자답게 그냥 하지 왜.”
“아니, 들어 보지. 평이잖아.”
“아, 그럴까.”
“은근슬쩍 말 막 하지 말고.”
다행히 이 둘은 내 은혜를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나.
들어 줄 준비가 되어 있다 이 말이다.
“광장에서는 안 됩니다.”
“아……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나도 없었네.”
“그래. 공연 음란죄에 걸려. 수술방에서 해야지.”
더구나 생각보다 19세기인들이 상식도 있었다.
“뭔가 판타지가 있었나?”
“광장에서 하고 싶으면 해도 되네.”
약간 열받게 하는 상식이긴 한데, 아무튼.
“수술방에서 하되 참관인은 열 명 이내로 하죠.”
“열 명? 그건 너무 적은데…….”
“그래, 그걸 누구 코에 붙이나. 생각해 보게. 조선 주술사 피영시인의 포경수술이라고 하면 모르긴 해도 신문에도 날 거야.”
“그냥 나기만 하겠어요? 그날 헤드라인이지.”
“그래, 어쩌면 국왕 폐하께서도 올 수도 있네.”
차라리 열받는 게 나은 거 같다.
국왕 폐하의…… 수술 참관은 좀 무섭기까지 하잖아?
“그건 좀.”
“올 거야, 아마.”
“나는 확신하네. 우리 국왕 폐하께서도 노는 것으로만 따지면 누구 못지않으시지 않나.”
“하…….”
“어쩌겠나. 자네가 너무 유명한 사람인데.”
“대신이라고 하면 뭣하지만, 아무튼, 열 명 이내로 부르겠네. 생각해 보니까…… 자네는 그냥 일반인이 아니니 마케팅도 프리미엄으로 가는 게 맞을 거 같아.”
하지만…….
막지는 못할 거 같다.
이 사람들이 내게 21세기 의학과 그 개념만 받아 가는 게 아니라 21세기의 다른 조각들도 배워 가고 있어서 그렇다.
그래 봐야 나도 다른 분야는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어설프게 가르쳐 주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자본주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마케팅 전술의 위력은…….
그게 어설프건 말건, 편린이건 말건 어마어마하긴 했다.
일단 콘돔에서도 봤잖아?
그리고…….
‘왕이랑 고추 트는 사이 되면 나쁘진 않을 거 같기도 하고.’
너무 일방적으로 나만 보여 주는 거 같긴 한데.
뭐가 되었건 간에 나한테 혹 기분 나쁜 일이 생겨도 한 번은 참아 주지 않겠어?
심지어 자기 목숨줄이 된 마당이잖아.
약간…… 주술적인 믿음도 갖게 된 거 같아 그렇지만…….
그렇다면 오히려 좀 겸허한 모습을 보이는 게 좋을 거란 생각도 든다.
“그래요. 뭐…… 그렇게 하죠.”
“좋아.”
“하하. 그럼 내 연락을 돌리겠네.”
하여간, 내 허락에 원장님은 희희낙락 웃으며 헐레벌떡 밖으로 나갔다.
어차피 밥도 맛이 없었기 때문에 나와 리스턴은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마치고 그의 뒤를 따랐다.
포경수술이라는 게 말이 수술이지, 그렇게 어렵거나 위험한 수술이 아닌 데다가 나는 이 병원에 있어서만큼은 VVIP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보니 날짜가 금세 잡혔다.
“내일이요?”
“그래.”
“아니…….”
문제는 이게 나만 시간이 된다고 할 수 있는 수술이 아니란 데 있다.
대영제국의 고관대작들 중에서도 엄선한 열 명이 올 텐데 이렇게 금방 잡힌다고?
의문을 품고 있으려니 원장님도 리스턴도 내 얼굴에 담긴 의문을 읽어 냈는지 조금은 민망한 표정으로 웃었다.
입을 연 것은 원장님이었다.
이런 말 하면 좀 미안하긴 한데, 리스턴은 아무래도 수술이나 싸움 외에는 젬병이라 그렇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말을 들어도 나라 돌아가는 정황 파악이 덜 되더라고.
“이게 어디 보통 사안은 아니지 않나.”
“제 포경이요?”
“아니, 포경수술 자체가 말이야. 저 유태인 놈들이 이 귀한 수술을 꼭꼭 숨겨 놓고 지들끼리만 했다는 것을 떠나서…… 인류의 위대한 진보가 눈앞에 있다네. 항간에서는 수명 연장의 비밀이라는 말도 나와.”
“그…….”
포피 좀 자르고 수명 연장하겠다는 심보는 도대체 뭐지.
그게 그렇게 쉬웠으면 21세기 인류는 수명 200년은 되겠다.
“높으신 분들일수록 관심이 지대하다네. 문제가 있다면…… 제이미 경 알지?”
“알다마다요. 친하죠.”
“그래. 그 양반 고환 자른 거…… 그거 이제 다 퍼졌네.”
“네? 아는 사람 목은 다 날린 거 아니에요? 우리 빼고는 거의 그런 걸로 아는데?”
“대미안…… 그 사람이 술 먹고 실수했어.”
“어, 어디서요?”
“버킹엄.”
“미친. 그래서요?”
원장님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다들 조심스러워졌다, 이 말이지.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나? 고환 자르고 가짜 수염 덕지덕지 붙이고 다니는 거 다 아는데.”
“하긴…….”
이건 좋은 일이긴 하다.
뭐가 되었건 간에 19세기 사람들은 더 조심하는 게 좋지 않겠나.
“근데 그러던 차에 자네가 수술을 받는다고 하니 안심이 되는 거지. 물론 일부는 진짜 받는 게 맞는지 의심하는 사람도 있어. 신청인이 오십 명도 넘네. 슈퍼스타야, 자네는.”
“하아.”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걸까.
런던의 고관대작분들이 내…… 은밀한 곳을 보기 위해 저렇게나 안달이라는 것에…….
“심지어 오십 명 정도인 게, 이 사실을 알린 게 70명 정도밖에 안 돼서 그래. 다들 이름만 댔다 하면 런던 아니라 유럽에서도 알아줄 만한 고귀한 자들이라네.”
“아…….”
“그때 그 공작님도 아마 소식만 제때 들었으면 왔을걸?”
“아, 그…… 그분은 결과가 잘 나오긴 했어요.”
없다가 있게 된 그분은 자신의 멋져진 외양을 자랑하러 급히 하노버 공국으로 향했더랬다.
혹여라도 새로 심은 거 빠질까 봐 홍삼까지 잔뜩 싣고 갔다.
그걸 본 리스턴은 하루라도 빨리 심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아무래도 그것보단 포경이 더 급한지 이러고 있다.
홍삼은 우적거리고 있는데…….
‘저게 실은 구라였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안 하는 게 나을 거 같다.
너무 절박한 사람들 대상으로 거짓말 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옳은 일이 아니니까.
이게 다 애국하기 위해 하는 짓이라는 걸 영국 놈들이 알아주진 않을 거 아냐.
“자, 기분이 어떤가.”
진정한 애국자인 나는 이제 수술대 위에 누운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