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334)
검은 머리 영국 의사-334화(334/505)
334화 미국…… [1]
미국.
21세기의 미국은 자타공인 세계 최강대국이었다.
천조국이라는 말도 안 되는 별명도 가지고 있고…….
내가 실제로 미국은 학회 때문에라도 몇 번 가 봤는데, 진짜 좋긴 좋다.
일단 날씨랑 기후가 좋다 보니 하늘이 이쁜데 그게 도시 경관을 이뻐 보이게 하는 데 아주 결정적이었다.
지금? 지금도 뭐…… 하늘 자체는 이쁘다.
“이게…….”
“미개하구만 역시 식민지인들은.”
우리는 그렇게 하늘과 비교적 높은 건물들을 구경하다가 사우스 스트리트 항구 근처에 있는 펍에 들어왔다.
그냥 펍이다.
사실 나나 리스턴이 들어올 만한 곳은 아니긴 했다.
이렇게 말하면 좀 재수 없을 수도 있을 텐데…….
실제로 그렇다.
우린 귀족이다.
그것도 개털도 없는 귀족이 아니라 돈이 되게 많은 귀족.
“괜히 들어오자고 했나.”
“제가 후회할 수 있으실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뭐…… 자유로워서 좋은데요.”
내 말에 밀러 커티스가 껄껄 웃었고, 뱃사람은 피식 웃으면서 담배를 꺼내 씹기 시작했다.
그래, 말 그대로 꺼내 씹고 있다.
씹는 담배라 이건데…….
솔직히 말해서 영국에서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보통 사람이라는 것이 처음 보는 광경은 신기하게 보게 되기 마련인데…….
뭐 고백하건대 나도 아주 잠깐 동안은 그랬다.
처음엔 이게 태우는 담배보다는 나을 거 같다고 생각했고.
“카아악 퉤!”
“퉤!”
연기가 안 나잖아, 일단은.
그럼 내 소중한 기관지와 폐가 안전해질 수 있을 거란…….
상당히 초보적인 생각을 했었다는 건데, 사실 담뱃잎처럼 독한 것을 씹게 되면 필연적으로 침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삼킬 수 있는 침이냐면 그건 아니다.
아무리 식민지인들이…… 19세기 사람들이 기초 상식이 없다고 해도 딱 봐도 위험해지는 짓을 할 정도는 아니지 않겠나?
인간의 지능 자체는 사실상 19세기나 21세기나 차이가 없으니까.
그렇다 보니 뱉는다.
“퉤이!”
“퉤퉤퉤!”
뱉어야 하는 침이니까 뱉는 거까지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이거까지 뭐라고 해야 할 만큼 예민한 사람이면 사실 런던에서 살 수가 없다.
거기 빈민가 가면 침이 아니라 대소변도 아무 데나 싸는 사람들이 많거든.
“저 미친놈들.”
리스턴도 그에 대해서는 참을성이 대단한 편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다.
그가 유독 식민지인들을 싫어해서는 아닐 거다.
“아, 시발.”
나도 욕에 동참하게 될 정도였으니까.
“아니, 이 사람들은 왜 바닥에…… 벽에 저렇게 뱉는 겁니까?”
“씹는 담배를 씹다 보면 침이 고이니까요.”
나와 리스턴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나는 마냥 욕만 하는 대신 이성적으로 또 합리적으로 해결할 생각을 한다는 점일 거다.
그 전에 이해할 수 있다면 그러려고도 노력한다.
이 사람들도 나름 자신들이 19세기 런던의 지성인이요 신사들이라 여기고 있겠지만 그렇게 치면 이 김태평이야말로 21세기 지성인이니까.
“우문현답이로군.”
해서 물었더니 심드렁한 답이 날아왔다.
리스턴의 추임새도 더해졌다.
우문현답이라니.
새로운 사자성어의 등장이다.
여기 오는 동안에도 가끔 책 붙들고 있더니만 공부를 한 건가 싶었다.
이제 점점 리스턴을 속일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슬퍼지는데…….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바닥과 벽, 심지어 유리창에까지 만연해 있는 침이었다.
“아니, 왜 침 뱉을 수 있는 접시나 통을 안 두고 저렇게 뱉냐 이 말입니다.”
“아, 아아. 불편하잖아요. 효율적이지 않죠.”
“청소를…….”
“청소요? 어차피 더러워질 텐데요? 그리고 바닥인데요, 뭐. 신발로 밟을 건데 무슨 상관입니까.”
뱃사람은 영국보다 여기가 더 체질에 맞는지 호탕하게 웃고는 또다시 퉤 하고 침을 뱉었다.
그러곤 미 대륙에 넘쳐나는 밀로 만든 라거를 꿀꺽 삼켰다.
나도 한 모금 먹어 보려 했지만, 바닥에…….
‘아니, 이 미친놈들은…… 그럴 거면 카펫을 대체 왜 깔아 둔 거야?’
침으로 범벅이 된 모양새를 봐서 입맛이 뚝 떨어지기도 했고, 또 내가 영국에서 주로 마시던 에일에 비하면 아무래도 맛이 좀 약하다고 해야 하나……?
뭐 여러 가지로 마음에 안 들어서 말았다.
“뭘 봐.”
그때 담배를 질겅이던 노동자 하나가 우리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뭐 처음 우리가 들어올 때부터 시비 걸고 싶어서 안달 나긴 했을 거다.
일단 인종 구성부터가 남다르잖아.
백인 둘에 동양인 하나, 인디언 하나.
심지어 백인 하나와 동양인 하나는 복장이 되게 화려하다.
아니, 인디언도 복장이 적어도 이 펍에 있는 일반 노동자들에 비하면 깔끔하고 고급이다.
“담배 씹는 게 신기해서 봤지.”
“이 새끼……?”
“영국 놈인데?”
게다가 리스턴이 깔끔한 영국식 영어, 즉 런던 영어로 대꾸한 게 화근이었다.
아, 우리한테 화근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아, 아아.”
의자 들고 왔던 놈은 그대로 팔이 꺾인 채 침 범벅인 바닥을 나뒹굴고 있고.
“으아아악!”
다른 놈 하나는 문짝을 부수며 날아가 밖을 나뒹굴고 있다.
“히익.”
“이보게들. 이 사람이 누군지 알고 이러나.”
다행히 더 나뒹굴게 된 사람은 없었다.
이 중에서는 가장 미국인들과 친숙한 복장과 행색을 하고 있던 뱃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리스턴을 소개한 덕이다.
“누, 누군데!”
“리스턴 경일세. 검성 리스턴.”
나는 뭐 유명한 의사고 신사니까 그러지 말라는 말을 할 줄 알았지만, 튀어나온 말은 검성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알았지만, 거긴 지척 아닌가.
여긴…….
그 쾌속선을 타고서도 2주가량 온 미국이다.
여기까지 그 소문이 퍼질 수가 있나 싶은데…….
“앗. 아아.”
“5, 50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독립 전쟁은 없었을 거라는 그……?”
다 알고 있다.
심지어 두려워하고 있다.
“저 칼이…… 그 배 가르는 칼이구만…….”
“그럼 설마 저 옆에?”
“피, 피영시인!”
“모, 몰라뵀습니다. 살려 주십쇼!”
더 놀라운 건 나를 더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냐면 멀쩡히 앉아서 술 먹고 침 뱉던 놈들이 다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까 문짝 부서진 것 때문에 씩씩대면서 오던 주인도 그대로 엎어져서 손을 싹싹 비비고 있다.
“설마…… 지배하러 오신 겁니까?”
이 지랄까지 하면서…….
“처, 청도 넘어갔다고 하던데.”
“그 큰 나라가…… 저주 한 방에…….”
“프랑스에서도 수십만이 죽었다던데.”
“그래서 이민을 그렇게 오는 거 아닌가.”
“어이구…….”
“살려 줍쇼!”
차분히 듣다 보니까 뭐 지랄까진 아닌 것 같다.
원래 소문이라는 건 퍼지다 보면 이리저리 와전되기 마련이잖아?
그냥 런던에서의 행적만 퍼졌다면 또 모르겠는데…….
청나라 간 것까지 퍼졌으면 주술사니 뭐니 하는 얘기가 퍼졌어도 할 말이 없긴 하다.
그간의 내 행보를 스스로 반추해 봐도 평범한 의사의 그것은 결코 아니긴 하잖아.
“꺼져.”
물론 납득할 수 있다고 해서 납득해 준다는 건 아니었다.
내 싸늘한 말에 다들 쫄아서 튀었다.
여기도 호텔을 겸하는 곳이긴 하지만…….
아까부터 말했듯 우리에게 어울리는 곳은 아니지 않나.
당연하게도 미리 예약해 놓은 곳이 있었다.
해서 우리는 일단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세인트 레지스 호텔을 향해 마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으려니 뱃사람이 뒤를 힐끔거리다가 말고 웃었다.
“덕분에 공짜로 술 먹었네요.”
“아.”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러고 보니 무전취식을 해 버렸다.
뭐 리스턴이 진심으로 했으면 다 죽었을 테니 이쯤 되면 괜찮은 결말이긴 하지만…….
“거긴 좀 낫겠지?”
“어디요? 아…… 뭐 펍은 똑같을 겁니다.”
“똑같다고?”
“훨씬 고급스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침을 안 뱉지는 않을 겁니다.”
“아…….”
어릴 때 <먼나라 이웃나라>라는 만화책을 봤었다.
비록 내 성씨는 아니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가문이라 할 수 있는 한산 이씨 문중의 이원복 교수가 그린 만화책이다.
거기 보면 약간…….
유럽인들이 미국 사람들 예의 없다고 무시하는 장면이 나오거든?
세계 최강대국에 그게 뭔 망발인가 했었는데 이런 역사가 있었다면 무리는 아니겠다 싶다.
미친…….
“퉤.”
“카아악 퉤!”
진짜 똑같다.
차이가 있다면 펍에 있던 사람들에 비해 엄청 고급 옷을 입고 있고, 그나마 맨바닥이 아니라 나무로 된 통에 뱉고 있다는 점 정도다.
문제는 그 나무통이 오래되어서 그런가…….
바닥에 흐르는 침이 적지 않다는 거다.
그나마 바닥이 아까처럼 목재가 아닌 대리석이라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죄 썩었을 거다.
“여기서는 진짜 사업만 하고 돌아가야겠네요.”
“그러니까 말이야. 어휴.”
리스턴과 모처럼 생각이 통했다.
그뿐 아니라 같이 온 놈들 모두 그랬다.
다들 긴 항해 때문에 지치기도 했고, 땅에 내린 이후 오히려 발생한 땅 멀미 때문에라도 술을 좀 마시고 싶었지만…….
도저히 이런 데서 뭘 먹긴 그렇다 보니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서도 침 뱉는 놈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술집보다는 그 빈도가 훨씬 낮았다.
무엇보다 바닥에 놓인 나무통이 아니라 식탁 위에 있는 접시에 뱉고 있어서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그보다 내 눈에 띈 것은 종업원들이었다.
직접 접객하는 사람들은 백인이 많은데…….
뒤에서 뭐 나르거나 하는 사람들은 다 흑인이었다.
‘영국은 노예제가 폐지되었을 텐데?’
사실 19세기 떨어졌을 때 제일 걱정했던 것은 어디 잡혀가서 노예 되는 거였는데 그렇진 않았다.
의외로 영국 주도로 노예제가 폐지된 덕이었다.
헌데 여기 와서 보니 버젓이 있는 듯했다.
“노예인가요?”
“사람한테 노예라니, 이 무슨 실례란 말인가.”
해서 물어보니 역시 열린 마음의 대명사인 리스턴은 나를 나무랐다.
의외로 뱃사람도 그랬다.
“노예…… 여긴 없습니다. 뉴욕은 노예가 없어요.”
“근데 왜 힘든 일은 흑인만 하죠?”
“응?”
“그건 당연한 일 아닌가? 머리 쓰는 일을 흑인이 어떻게 하나.”
하지만 한 번 더 물어보니 19세기 제국주의 열강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긴 답이 튀어나왔다.
뭐…….
그런 인식까지 기대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않나.
그저 여기는 벌써 노예제가 폐지되었다는 게 위안이었다.
‘하긴 남북 전쟁까지 벌어질 정도면…… 뉴욕은 대표적인 산업 도시니까 지금쯤이면 벌써 철폐되는 게 맞긴 하지.’
역사를 잘 알았으면 그냥 당연하게 여겼을 테지만…….
그건 아니었다 보니 하나하나가 놀랍다.
다행한 것은 미국이 아무래도 땅이 좋다 보니, 그리고 이민자들이 많다 보니 영국 본토에 비해 식재료도 좋고 음식의 맛이 훨씬 훌륭하다는 점이었다.
“맛있네.”
“와…… 좋네요.”
“진짜로.”
간간이 우리의 미식 활동을 방해하는 객담배출이 있긴 했지만, 가래 뱉는 거 보면서 먹는 미국 음식이 담배 연기 자욱한 곳에서 먹는 영국 음식보단 100배 나았다.
그렇다고 해서 19세기 미국에 대한 내 인식이 확 좋아졌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나빠질 일만 있었다.
콜로라도는 서쪽에 있었고, 이 시기 미국은 동부에 비해 서쪽이 지나치다 싶을 만큼 낙후되어 있었으니까.
아, 낙후되었다는 것이 꼭 도시가 없다는 것만 의미하는 건 아니다.
사람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