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339)
검은 머리 영국 의사-339화(339/505)
339화 캔자스 [2]
마차는 이게 길다운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진짜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길은 아니다.
그냥 잡초가 없는, 흙길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뜻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 정도뿐임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아까보단 승차감이 나아졌다.
“어이구.”
“입 다물어, 인마. 혀 깨물으. 으아!”
그래 봐야 함부로 나불거리다가는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혀 깨물기 십상이다.
이보다는 차라리 등자 달린 말을 타는 게 혀 건강에는 더 좋을 거 같다.
나처럼 조심스러운 사람조차 이번 여행에서만 벌써 한 세 번은 물었으니 과장은 아니다.
다행히 밀러 커티스가 경고를 해 주었기에 망정이지, 조심하지 않았으면 혀가 잘릴 수도 있었을 거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실제 사례가 있다고 들었다.
밀러가 약간 입을 좀 터는 스타일 같아 보이긴 하지만 현지인 말을 무시하는 건 언제나 어리석은 일이지 않나?
오히려 외국 나가서 제일 위험한 사람은 영국인이다.
동향 사람이니 동포니 어쩌니 하면서 벗겨 먹을 생각만 할 테니.
“으음…….”
마차 여행 초기였다면 지금과 같은 덜컹거림만으로도 멀미가 생겼겠지만…….
지금은 여유롭게 주변을 돌아보면서 하품까지 할 수 있었다.
보통은 좋은 일일 텐데…….
이번엔 아니었던 거 같다.
“저건…….”
“제가 말씀드렸죠.”
이제 정말 대농장 입구 어귀인지 뭔지 길도 훨씬 평탄해졌다.
그렇다 보니 보다 적극적으로 밖도 볼 수 있고 대화도 나눌 수 있었는데…….
사실 오면서 하고 싶었던 얘기가 꽤 있었다.
풍경도 그렇고, 지나친 늑대 무리도 그렇고.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는 생각나는 게 딱 하나뿐이었다.
‘불탄 시신이라니…….’
내가 농담조로 마녀사냥이니 뭐니 했지만 사실 19세기 영국에서는 마녀사냥이 없어졌다.
애초에 그 마녀사냥이라는 게…….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이라는 정신 나간 수도승이 쓴 <마녀를 심판하는 망치>라는 책에서 기원하지 않았나?
책에 공신력을 더하기 위해 교황청에 칙령을 앞에 붙였다고 하는데, 실제로 교황청에서는 그 책 내용을 보고 이거 우리가 공식적으로 한 거 아니라고 발표했다는 얘기도 있다.
물론 우리의 환장 돌아가시는 중세 시대에는 그런 거 모르겠고 마녀사냥에 열을 올렸지만…….
태생부터 그러한 한계를 지니고 있던 만큼 사라지긴 했다.
그러한 고로 이러한 광경을 보는 건 진짜 생전 처음이었다.
“어으…….”
“이 사람이 뭐 사람이라도 죽였나?”
아까 들었던 바에 따르면 아무래도 도망 노예일 거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노예긴 할 거다.
다시 말해 흑인일 거란 얘긴데…….
다 태워 놓고 보니 그냥 사람 시신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아닐 겁니다. 그랬다면 더 끔찍하게 죽였을 거예요.”
“이보다 끔찍한 사형이…… 있긴 하지.”
“네?”
“아, 아니, 아닐세.”
대체 왜 리스턴이 날 보면서 윙크를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나도 이보다 더 끔찍할 수 있는 사형 방법을 꽤 여러 개 안다.
세상에는 비소도 있고, 납도 있고, 수은도 있고, 심지어 콜레라나 장티푸스도 있거든.
물론 화형 시키는 것이 가장 고통스럽다곤 하지만, 아무리 오래 가 봐야 분 단위일 거다.
그에 비해 내가 말한 건 일 단위의 고통이 수반될 수 있다.
‘이걸 내가 왜 뿌듯해하고 있냐…….’
하도 이상한 걸 봐서 그런가 이상한 생각이 든다.
“뭐…… 별거 아닐 겁니다. 도망쳤겠죠. 아니면…….”
“아니면?”
“아이 낳는 걸 거부했거나요.”
“그건 또 무슨 소린가.”
리스턴은 저도 모르게 칼자루를 쥐었다 풀었다.
이 중세 기사는…… 아니, 대협께서는…….
생긴 것이나 힘은 진짜 무림 고수 그 자체지만 나름 19세기 신사이지 않은가.
아무리 화가 난다 해도 상황에 맞춰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란 말이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제 노예 무역은 금지되었어요. 물론 여전히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 가면 노예를 팔려는 상인들을 만날 수는 있지만, 걸리면 사형입니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알고 있네.”
리스턴은 그렇게 말하다가 저도 모르게 밀러를 돌아보았다.
밀러는 오히려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지만 리스턴은 몇 번 헛기침을 하고 나서야 원래의 얼굴로 돌아올 수 있었다.
둘 다 이해는 갔다.
대영제국이 지금은 스탠스를 바꾸어서 노예 무역을 금하고 있지만 한때는 제일 신나서 팔아 재꼈거든.
따지고 보면 여기 사는 식민지인들, 아니, 독립했으니까 미국인들이라고 할까?
그래, 미국인들 다 영국인들의 후손이다.
그러니 민망해하는 건 당연하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노예로 사용하지 못했지…….’
밀러도 이해는 간다.
원주민들, 그러니까 신대륙인들은 천연두와 같은 질환을 아예 앓아 본 적이 없다 보니 일 시키기도 전에 다 죽어 나갔거든.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텐데 우선적으로 하나만 뽑아 보면 신대륙에는 소, 돼지, 양과 같은 대형 가축이 없어서 생겼다고 봐도 무방할 거다.
구대륙인들은 이미 오래전에 가축화된 대형 포유류들과 밀접 접촉하면서 적응해 버린 인수공통감염병엔 신대륙인들은 너무나도 취약했다는 거다.
‘휴, 딴 생각하니까 좀 낫네. 가만 딴…… 탄…… 탄 생각. 안 돼, 시발.’
별짓을 다 해도 아까 봤던 시신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러니 신규 수급이 어려워졌죠.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럼.”
“어쩌긴. 차차 노예를 줄여야지.”
“하하…….”
패트릭 아저씨네 직원이 씁쓸한 얼굴로 웃더니 말을 이었다.
사실 영국에서 봤을 땐 좀 야만적인 면이 있는 아저씨라고 생각했었는데, 미국 와서 보니까 문명인 그 자체로 보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렇긴 했다.
여긴 무슨 중세 장원 같잖아.
“여기서 얼마나 막대한 부를 쌓고 있는지 아십니까.”
“알 수가 있나?”
“돈만 따져 보면 두 분조차 비교가 안 될 겁니다.”
“아…… 그렇군.”
“우리 상단도 안 되죠.”
“허…… 포기할 리가 없겠군그래.”
“네, 그래서 여기서 노예를 생산하게 합니다.”
“생산?”
사람을 어떻게 생산하나?
인조인간 같은 게 등장하려면 아직 멀었잖아?
뭐 이런 나이브한 생각이 팔랑팔랑 떠오르기 시작할 때쯤, 직원이 입을 열었다.
“아이를 많이 낳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아. 아…….”
“근데 막말로 아이를 낳고 싶겠습니까. 어차피 낳아 봐야 자기랑 똑같이 비참하게 살게 될 텐데요.”
“그렇지. 나라도…….”
“근데 그걸 다 거부하게 되면 농장이 돌아가지 않을 테니 이렇게 본보기를 보이는 것이죠.”
“허어.”
리스턴이 한 번 더 칼자루를 쥐었다 놓았다.
사실 이번에는 그대로 뽑고 돌진해도 이해해 주려고 했는데, 그래도 우리 형님이 많이 사회화가 된 거 같다.
다행이다.
나도 좀 화가 나기는 하는데…….
‘우린 여기 노예 해방을 위해 온 게 아니라 사업하러 온 거잖아.’
정 마음이 불편하면 남북 전쟁할 때 북부를 지원하면 되지 않겠나?
너무 싸가지 없어 보일 수도 있는데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이 어마어마한 세상 앞에서 나는 일개 개인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게 없고, 그걸 알고 있어야 사고가 안 난다는 말이다.
“이보게 평.”
“네?”
“몰래 저주라도 걸어 주겠나?”
“아…… 뭐, 그건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좋아. 그래야 마음이 좀 편할 거 같아서.”
리스턴 같은 사람조차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보니 마음이 좀 놓였다.
“아, 하하. 잘 왔네!”
그렇게 보다 더 달리다 보니 어느새 거대한 건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작물이야 뭐 사방에 다 자라고 있었다 보니 건물 뒤로도 펼쳐진 밭이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대단해 보이진 않았다.
그보다 더 눈에 띈 것은 사람이었다.
덩치가 대단히 큰, 그래 봐야 리스턴보다는 작지만,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옆으로는 여러 부하로 보이는 사람들을 거느리고서였는데 과연 영주 그 자체였다.
“안녕하십니까. 미리 연락드렸던 조셉입니다.”
“알지, 알지. 그래, 패트릭은 잘 있고?”
“네, 덕분에.”
“그래…… 하하. 근데 이쪽은?”
“아, 앨프리드입니다. 아버지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앨프리드? 아, 막내? 벌써 이렇게 컸나!”
우리 선배 가문은 남들 다 뉴욕에서 얼쩡거리거나 또는 독립 전쟁 이후 눈치만 보고 있을 때 공격적으로 미 대륙에 남아도는 작물과 담배, 목화 등등을 아예 내륙 대농장에서 직수입해서 돈을 만지고 있는 곳이지 않나.
뭐 지금은 그렇게 번 돈으로 인도나 청도 가고 있지만…….
아무튼, 그렇다 보니 꽤 돈독해 보였다.
“아…… 이분이 그 리스턴 경이시군.”
“반갑소.”
오는 길 내내 사실상의 뒷담화를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리스턴은 얼굴 하나 바뀌지 않고 인사를 건넸다.
다음은 사실 내 차례였지만 우리의 농장주께서 의도적인지 아닌지 모르게 콜린과 조지프와 먼저 악수를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야 나와 밀러를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손은 뒷짐을 진 채였다.
“이분이 그 유명한 티에피영 경입니다.”
“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경 자가 붙었다 보니 손을 내밀긴 했다.
그러고 나서 몰래 옆에 놈이 들고 있던 냅킨을 이용해 부리나케 닦는 걸 봤다.
뭐 이 정도면 양반이다, 싶다.
그렇잖아.
아이 안 낳는 죄로 사람 불태우는 놈이 저 정도면 썩 괜찮은 대우지.
“밀러, 오랜만이네.”
그나마 밀러랑은 악수도 안 했다.
무튼, 그렇게 다 인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해는 중천이었다.
더 가려면 더 갈 수도 있는 시간이었지만…….
사실 노숙이라는 건 우리 같은 도시 사람뿐 아니라 좀 거칠게 살아온 사람들도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법 아니겠나.
오죽하면 말도 힘들어한다.
심지어 앞으로 가야 할 길은 거리는 더 짧을지언정 훨씬 험한 길이 될 예정이다 보니 제대로 정비를 하긴 해야 했다.
“음.”
밝은 날에 대놓고 어색해하는 사람 앞에 두고 서 있는 것처럼 못 할 짓도 몇 개 없다.
다행히 농장주도 그러한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는지, 뒤에 서 있던 누군가를 불렀다.
그러곤 무려 일대일 매칭으로 농장 구경을 시켜 주라고 일러 주었다.
차분히 기다리고 있으려니 마침내 내 차례가 온 모양이었다.
농장주가 나를 한번 보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베티나!”
하고 외치면서였다.
그러자 여자 흑인 노예가 앞으로 나섰다.
“네, 주인님.”
주인님이라고 하면서였다.
“너는 여기…… 이 신사분을 모시고 구경 좀 시켜 드려!”
“네.”
“아, 이 사람은……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 아니. 귀족이야! 노랭이 가끔 봤지? 그놈들처럼 대하면 안 된다고.”
“그럼 주인님처럼 대할까요?”
“아니. 그건 안 되지.”
“그럼…… 어떻게요?”
“음…… 아, 그래. 그…… 망치 만드는 놈 누구지. 아, 그래 제리. 그놈처럼 대해.”
“네, 알겠습니다.”
아까 리스턴이 저주 운운할 때만 해도 장난이었거든.
근데 이젠 진짜로 걸어야겠다.
내가 방법은 모르겠는데, 걸긴 걸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