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366)
검은 머리 영국 의사-366화(366/505)
366화 독살 [6]
리스턴은 단지 발만 빠른 것이 아니었다.
귀도 좋았다.
“저기!”
저택인 만큼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마자 모습을 보인 건 거실을 빙자한 로비였다.
업턴에서도 조지프가 꽤나 부유하게 살았기 때문에 좁은 집에 얹혀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런던에 와서 비로소 제대로 된 저택을 본 나에겐 꽤나 충격이었더랬다.
‘어마어마했지.’
하지만 이젠 아니다.
나도 그런 집에 살거든.
심지어 병원도 저택을 개조해서 만들었어.
리스턴도 동업자인 만큼 구조에 익숙해졌다, 이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즉시 상대를 향해 뛰어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 범인과 희생자가 어디에 있을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형님! 어디로 가는 거예요!”
“소리 안 들려?”
“안 들려요!”
“거참! 그러니까 청진기 같은 게 필요하지.”
하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리스턴을 따라 오르고 있었다.
물론 리스턴이 나보다 훨씬 빨랐다.
그는 이미 2층에 도달했고, 우측으로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이쯤 되면 나에게도 뭔가 소리가 들려야 할 텐데, 전혀 들리는 게 없었다.
왜 그런지는 올라가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시발.”
뭔 놈의 복도가 이리 길단 말인가.
이 정도면 거의 앨프리드 선배네…….
아, 거기랑 맞먹을 정도로 부자라 하긴 했더랬다.
19세기가 암만 산업 혁명의 시대라 해도 쌓인 부에 한계가 있는데 뭔 놈의 부자가 이리 많냐고 할 수도 있을 텐데, 런던은 가능하다.
여긴 진짜 대도시다.
그리고 영국은 대영제국이고.
전 세계의 부가 쏟아져 오고 있다.
덜컥.
아무튼, 리스턴은 내 욕설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복도 끝에 있던 방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도 최선을 다해 달렸기 때문에 곧 소란을 들을 수 있었다.
“뭐, 뭐…… 으악!”
소란이라기보다는 비명이었다.
안 봤지만 뻔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거다.
아마 주사기로 배 찌르던 놈의 뒷덜미를 잡아다 바닥에 꽂았을 거다.
쾅.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소음이 들릴 리가 없어.
혹 집이 무너지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다행히 돈 많은 상인이 제대로 지은 집이니만큼 한 번의 충격만으로 박살 나는 일은 없었다.
“형님!”
“설탕!”
“아! 여기!”
아무튼, 나도 활짝 열리다 못해 거의 떨어져 있는 문 틈새를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뭔가 다른 말도 하고 싶었는데, 대신 튀어나온 건 형님이라는 말뿐이었다.
리스턴이 바닥에 널브러진 범인 대신 슬슬 정신을 잃어 가고 있는 환자를 부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나도 운동 신경이 아예 없는 편은 아니었고 리스턴이야 두말할 것도 없는 전사였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게 설탕물이 든 유리병을 낚아챌 수 있었다.
“입 벌려!”
“으…….”
“이거 안 먹으면 너 죽어!”
“으…… 으으.”
그러곤 유리병 뚜껑을 열 새도 없었기 때문에 손날 치기로 병목을 날려 버린 후 입 안에 설탕물을 붓기 시작했다.
평소의 리스턴을 생각하면 아무 생각 없이 콸콸 부을 거 같겠지만 놀랍게도 그는 꽤 섬세하게 입에 따라 넣고 있었다.
흡인성 폐렴이 생기면 어떻게 되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하여간 물이 폐로 넘어가면 대개 끝이 좋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새끼. 어쩌지?”
하지만 다량의 인슐린이 이미 들어간 이상, 환자의 의식은 점점 꺼져 가고 있었다.
“어…….”
수액을 넣어야 하나?
설탕물을…… 그냥 농도도 모르고 막 만든 설탕물을 혈관 안에 쏟아도 되나?
‘안 되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김태평.’
19세기 산다고 진짜 19세기인이 되어 버리기라도 한 거냐?
설탕물은 그냥 처넣으면…….
제법 새로운 살인법이 될 거다.
어쩌면 실험적인 경찰이나 사법 기관에서 ‘이번 사형은 이렇게 해 볼까?’ 하고 나설 수도 있다.
“합!”
“형님?”
그때 리스턴이 안 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이내 환자의 가슴뼈 사이를 손가락으로 푹 하고 찔렀다.
가슴팍이 뚫리는 줄 알았다.
아마 진심으로 찔렀다면 뚫렸을 거다.
“흐억.”
“먹어! 안 먹으면 죽는다!”
“네, 네!”
더 놀라운 일은 다음에 벌어졌다.
‘인슐린으로…… 저혈당으로 의식이 꺼져 가는데 통증만으로 깨울 수 있다고?’
의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뭐…… 진짜 어마어마한 통증을 주면 눈이야 잠깐 뜰 수는 있을 거 같다.
하지만 대답을 한다고?
‘아마 리스턴에게 죽는다고 이해했겠지? 그렇다면 무리도 아냐.’
이해가 안 가는 일인데, 그렇다고 뭐 어쩌겠나.
이미 환자는 꿀떡꿀떡 설탕물을 삼키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정신이 더 드는지 안색이 핼쑥해지고 있었다.
갑자기 침실에 난입한 괴한이 왕진 온 의사를 바닥과 함께 박살 낸 후 안 먹으면 죽는다면서 뭔가를 먹이고 있단 생각이 들었을 테니 당연한 일이다.
원래 사람이 의식을 잃을 땐 기억도 쌓이지 않는 법이거든.
“이봐요. 얼굴이 기억이 나는데. 우리 환자죠?”
이럴 때 리스턴이 섣불리 나서는 건 좋은 방책이 아니다.
분위기 좋을 때조차 리스턴이 나서면 초상집이 되기 일쑤인데 이미 초상집일 때 나서면 어떻게 되겠나.
이럴 땐 그나마 사람 같이 생긴 내가 나서는 게 낫다.
물론 나도 노란 원숭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인인 리스턴보다 낫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경험을 통해 확인했던 바 있다.
“어…….”
“김태평입니다. 알죠?”
“아…….”
“여긴 리스턴이고요.”
“아…….”
지금도 예외는 아니었다.
환자는 내 말을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뭐 한두 번 말한 건 아니긴 하다.
몇 번 말하고 나서야 이렇게 된 거다.
중간중간 리스턴이 귀 잡고 협박도 하고 하긴 했다.
그러다 보면 환자가 의사에게 으레 할 만한 말인 ‘살려 주세요!’가 튀어나오기도 하는데, 나나 리스턴이나 익숙한 상황이다 보니 빙그레 웃으며 상대를 기다려 줄줄 알았다.
“기억이 잘 안 나겠지만, 저놈이 찌른 거 때문에 방금 죽을 뻔했습니다. 평소랑 좀 다르지 않았어요?”
“아…… 네, 그러고 보니. 좀 졸았던 거 같기도 하고……?”
“졸기는. 뒈질 뻔했다니까. 내 덕에 산 거야.”
“네네. 감사, 감사합니다…….”
우리의 노력 덕에 환자는 차츰 더 명확히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다.
물론 보다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은 경찰서장과 원장이 방 안에 도달한 후의 일이었다.
“아이구…… 죽었나?”
“죽진 않았네. 용케 살았네.”
“일단 이 새끼 잡아 처넣고.”
“근데 이거 조심해서 안 빼면 죽겠는데. 이봐, 리스턴!”
즉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암살범의 머리통이 바닥에 박혀 있었기 때문에 인간 기중기인 리스턴이 나서서 녀석을 수직으로 꺼내 줘야 했다.
이럴 때 어설프게 힘줬다가 목이 부러진다는 것을, 의외로 우리 원장님이 경험적으로 알고 있어서 그랬다.
뭐…… 그럴 수밖에 없긴 하다.
제대로 된 구조법을 어찌 알겠나, 이 시절에.
아마 사람 살리겠답시고 운반하다가 더 큰 부상을 입히곤 했던 일이 수두룩했을 거다.
“휴. 어때 아는 얼굴인가?”
“전혀.”
“병원 사람은 아니로구만.”
“아마…… 그놈이 고용한 암살자겠지.”
“뭐 특별한 의학 능력이 필요했던 건…… 아닌가?”
“약 만들고 용량 정하는 거야 그렇겠지만 그냥 찔러 넣는 건 뭐…… 아무것도 아니지.”
“아, 그렇구만. 이 새끼 묶어 놔. 이따 정신 들면 뭐 좀 물어보게.”
그렇게 범인이 무사히 바닥에서 빠져나온 이후에야 다들 환자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당연하게도 환자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자기 침실에서 편안히 당뇨 치료나 받으려고 했다가 이게 대체 뭔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괜히 거대 상단을 이끌었던 것이 아닌 만큼 차분히 설명하자 바로 알아들었다.
더군다나 이미 자기 상단 사람들 중 여럿이 죽은 마당이다 보니 더더욱 이해는 빨랐다.
“죽기 싫어서 외출을 삼가고 있었는데…… 다들 이런 식으로 죽은 것이었군요?”
“그렇게 의심하고 있었는데 오늘 이렇게…… 현장을 잡은 것이지.”
“하아…… 죽을 뻔했네요, 진짜. 그 개새끼…… 우리가 어떻게 해 줬는데 은혜도 모르고.”
“복수해야겠지?”
“당연하죠. 심증만 있을 뿐 증거가 없어서 못 건드린 겁니다.”
“그건 아니지. 그 인간의 세력이 훨씬 크지 않나?”
“그건…….”
잊고 있었는데 역시 우리 경찰서장님도 훌륭한 19세기 사람이었다.
세상에 방금 죽을 뻔한 사람한테도 팩트 폭행을 못 해서 안달이 났다.
뭐 상대도 19세기 사람이다 보니 꽁해서 삐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 시대에서는 그랬다간 사람 취급 못 받을 수도 있다.
속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겉으로는 대범하게 굴어야 한다.
“그건 맞죠. 아무튼, 복수를 원합니다. 잡아넣어야죠!”
“그래, 벌은 사법 기관에 맡기세. 리스턴 경이나 티에피영 경도 얽혀 있으니 어이없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야.”
“그러믄요.”
형이 좀 가볍게 나올 수는 있는 일이었다.
사실 지금 이 환자만 현장에서 검거가 되었을 뿐이지 않나.
게다가 교살 혐의였다.
부인하면 말짱 꽝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정황이 너무 명확하다 보니 아예 불기소 처분이 떨어지진 않을 거 같지만 ‘징역 10년!’ 막 이렇게는 안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 갇히면…….’
사법 거래가 있으면 또 모르겠지만…….
이 시기 감옥은 말 그대로 인생 끝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멀쩡했던 사람도 감옥 잠깐 갔다 오면 다음엔 수용소로 가곤 한다.
그만큼 혹독한 곳이라 이거다.
그렇다 보니 내가 하는 생각 정도는 다들 할 수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표정이 어두운 사람은 전혀 없었다.
그중에서도 서장이 독보적이었는데, 그는 이미 함정을 팔 생각인 모양이었다.
“우선 죽었다고 하세.”
“죽어요? 아, 이분.”
“그래. 그렇게 하고…… 잠깐 보자고. 그럼 자백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네.”
“사망 판정을 가라로 해 달라 이거로군?”
“그렇지. 그렇게 해 주게. 신문에도 내고 해야지. 부고장을. 이놈도 보니까 머리만 좀 깨졌지 얼굴은 멀쩡하니 가서 잘 얘기하면 속을 거야. 안 하면 리스턴 경에게 죽을 텐데, 하겠지.”
서장의 말에 암살범은 히익 소리를 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해 메소드 연기를 하겠단 뜻이었다.
그걸 본 서장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씨익 웃었지만 안타깝게도 나와 리스턴의 생각은 좀 달랐다.
‘우리는 뭘 얻지?’
‘아무것도 없는데요? 애꿎은 후원자만 잃었어요.’
‘안 될 말이지.’
‘그러니까요.’
이번에 후원자, 그러니까 연쇄 살인범이 감방 가고 나면 이 상단의 최대 주주는 자연히 지금 이 자리에 누워 있는 이 사람이 된다.
근데 이 인간이 입 싹 씻고 계속 불법으로 다른 병원에서 당뇨 치료를 받고 하면 우리는 뭐가 되나?
“잠깐. 약속 하나를 받아야 되겠는데.”
“응?”
“목숨도 살려 줬겠다…… 앞으로의 일도 처리해 주겠다…… 이거 한두 푼으로 될 일이 아닐세.”
“리스턴 경…… 지금 경찰 앞에서 협박을 하는 건가?”
“뭔 소리지?”
“응?”
“자네도 포함이야.”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