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389)
검은 머리 영국 의사-389화(389/505)
389화 항노화 [3]
우리의 식객, 고환 도둑, 빠게뜨 장 피에르는 당황한 얼굴로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그 주변을 나를 비롯한 자랑스러운 영국인들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은 채 에워싸고 있었다.
일행이 아닌 이도 하나 끼어 있었는데, 나름 런던에서 유명해진 지 한참인 화가 윌리엄 터너였다.
거의 모든 그림에 해가 아련하게 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정물화나 초상화에도 능한 사람이었다.
시켜 보니 해부나 수술 그림도 곧잘 그리는데, 워낙 비싸서 자주 부르지는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도 옛날얘기고 지금은 윌리엄 4세가 우리의 후견인이다 보니 재능 기부를 받고 있다.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는 재능 기부만큼 짜증 나는 일이 없지만, 재능 대신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재능 기부만큼 좋은 말도 없는 법이지.’
나는 언젠가 왕께 이 단어를 알려 드렸을 때를 떠올렸다.
-재능 기부라. 좋은 말이로구만. 하긴 주님께 받은 달란트인데…… 무조건 돈을 받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니겠지.
지나치게 공산주의적인 생각으로 받아들이시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나만 아니면 되는 법이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을 허름하게 꾸미라고요?”
그래도 이건 좀 선 넘는 거 아닌가 싶었다.
나름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인데.
허나 열심이었다.
상대가 프랑스 놈이라 그런 거 같다.
대체 왜 그렇게 프랑스 사람을 싫어하는 거냐고 물으면, 물은 사람을 경멸할지언정 상세한 대답은 못 할 정도로 그냥 싫은 수준에 이른 지 오래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 뭐 어려울 건 없지 않겠나? 애초에 있어 보이는 인상은 아니니.”
“그건 그렇긴 합니다만. 흐음…….”
“나 영어 잘하네.”
뒷담화도 참 하면 안 되는 짓이지만 앞 담화는 더 하면 안 되는 거 같다.
장 피에르는 기분이 많이 상했는지 인상을 썼다.
그러면서도 가식적인 프랑스 놈답게 돌려 말했다.
영어로 욕해도 다 알아들으니까 그만하라는 뜻일 거다.
‘음흉한 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리스턴은 장 피에르의 어깨를 쿵 하고 쳤다.
억 소리가 나는 가운데 리스턴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뽑힌 거야.”
“가만히 좀 있어 봐요. 전체적인 구도를 잡아야 할 거 아닙니까.”
장 피에르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어깨가 너무 아픈지 말은 하지 못했다.
그사이 윌리엄 터너 화백은 이리저리 장 피에르의 얼굴을 돌려가면서 관찰했다.
그러더니 우리가 화장대 위에 올려 둔 가위를 집어 들었다.
“수염을 좀 잘라야 될 거 같은데…….”
“수염을? 안 되네!”
“어떻게 자를까?”
고장 난 라디오처럼 혼선이 좀 있는데, 어차피 장 피에르 말은 아무도 안 듣고 있다 보니 일이 진행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제가 하죠, 이건. 나름 예술이라.”
“아니, 내 수염을! 이걸 내가 어떻게…….”
“하긴 못나 보이게 하는 것도 일종의 예술일 테지.”
윌리엄 터너는 장 피에르가 평소 손가락을 말아 올리던, 프랑스 놈이라고 하면 클리셰처럼 떠오르는 형태의 수염을 잘랐다.
한 번에 싹둑 자른 것은 아니고 뭔가 기묘한 술수를 썼는데 신기하게 진짜 사람이 굉장히 가난해 보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옷은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고 있음에도 그랬다.
“그리고…….”
그럼에도 우리 화백은 만족하지 못했는지 시선을 머리 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리스턴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대신 나선 것은 블런델이었다.
“머리 자르게요?”
평소 자랑거리가 풍성한 머리털이었던 만큼 탈모인에 대한 동정이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전생을 떠올려 봐도 그랬다.
-너 그러다 대머리 되면 어쩌려고 그래.
-그때는 올 게 왔다고 생각하려고.
하도 대머리 놀려 대는 친구가 있길래 물었더니만 돌아오는 답이 가관이었다.
“관리되지 않은 머리만큼 없어 보이는 것도 없는 법이죠.”
“하긴, 그것도 그렇지.”
“이 미친놈들이.”
“이건 좀 그렇지 않나.”
리스턴마저 말리고 있었지만, 상대가 프랑스 놈이다 보니 그렇게 적극적이진 않았다.
그렇게 장 피에르는 머리털도 잘리게 되었고, 이후 화장을 빙자한 숯검댕이 바르기가 완성될 때까지 넋이 나간 얼굴로 앉아 있었다.
거기에 빈민에게 돈을 주고 사 온 넝마 같은 옷을 입혀 놓으니 훌륭한 거지였다.
“재능이 있는데?”
“무서울 정도네요.”
머리 자를 땐 도저히 못 보겠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리스턴조차 감탄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분장은 시작일 뿐이었다.
들어가서 잘해야 했다.
“누가 있는지 반드시 기억해 와야 해요. 여기 화백님에게 머리 모양, 눈썹, 눈매, 코, 입술, 얼굴형, 체형, 옷차림 등등을 다 말씀드려야 하니까요.”
듣자니 이 자식들도 지들이 켕기는 게 있다는 건 잘 아는지 안에서는 실명을 부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장 피에르는 궁에 있었던 적이 있다 해도 여장하고 숨어 있지 않았나.
사교계 인원의 얼굴을 알아볼 길이 없다, 이 말이다.
해서 나는 드라마에서 주워들었던 몽타주 작성 기법을 이용하기로 했다.
장 피에르도 아마추어고 윌리엄 터너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아마추어니 아무래도 당장 뭐가 되진 않겠지만…….
“네, 대강만 말씀해 주시면…… 제가 나름대로 유명한 분들 얼굴은 다 아니까 알아볼 겁니다.”
윌리엄 터너는 유명 화가기에 초상화를 자주 그리는 편이다 보니 이쪽이 오히려 알아볼 확률이 좀 있었다.
“어…… 근데 가면 피 뽑히는 거 아닌가……?”
“뽑겠지요. 근데 한두 번 헌혈하는 건 괜찮아요.”
“아니…… 그래도 생피를…….”
“그러게 왜 와서 공짜로 밥을 그렇게 드셨습니까.”
“보통은 밥 먹는다고 피를 받진 않네. 자네 혹시 샤일록인가?”
“유태인이라고 욕하시는 겁니까? 감히? 저주받고 싶어요?”
“아니, 아닐세…….”
물론 우리에게나 그러한 것이 중요할 뿐이고 장 피에르는 그저 피 뽑히는 게 걱정인 모양이었다.
참 어리석은 인간이었다.
공중보건을 위한 일인데…… 어찌 의사라는 사람이 이렇게 희생정신이 부족할까.
게다가 프랑스 놈들이 벌이고 있는 일이라고 하지 않은가.
같은 빠게뜨인으로서 책임질 생각은 없고…….
‘하긴, 그게 되면 빠게뜨 놈인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미리 써 둔 부적을 써내 들었다.
부적이라 봐야 내가 하는 한자가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뜻은 보통 좋은 뜻을 지녔거나 엉뚱한 뜻을 지닌 사자성어가 적혀 있을 뿐이었다.
입춘대길, 입신양명, 일석이조 등등.
그중에서도 길이나 양명, 조는 어떻게 쓰는지 몰라서 한글로 적어 놨는데 양놈들 눈에는 이게 더 신비로워 보이는 모양이었다.
부적을 보자마자 장 피에르는 순한 양이 되어 밖으로 향했다.
물론 우리도 따라나섰다.
‘장 피에르 정도 되는 놈이 런던 뒷골목에 혼자 있다가는…….’
바로 캐릭터 삭제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특출난 부분이 있는 법인데, 뒷골목 깡패들은 약자를 확인하는 데 있어 스페셜리스트라 할 수 있다.
장 피에르 같은 놈이 눈에 띈다?
일단 털린다.
근데 이 시대에는 좋게 좋게 끝나는 법이 잘 없어서, 운이 좋으면 맞고 끝나고 운이 나쁘면 어딘가 찔리거나 터지기 마련이다.
‘맞거나 털리면 피를 안 뽑아 주겠지.’
불법으로 피를 뽑아 가는 놈들이 설마 그렇게까지 까다롭게 굴까 싶을 수도 있을 텐데, 원래 불법이 더 까다롭다.
돈도 더 들이는 데다가 수상쩍은 놈은 아예 발도 못 디디게 해야 적발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봐…… 어.”
하여간, 벌써 두 놈째다.
“히익. 살려 주십쇼…….”
“운 좋았다. 그냥 가라. 저놈 건드리면 죽은 목숨이라고 알리고.”
“네, 넵!”
장 피에르를 노리고 다가가던 깡패 놈을 리스턴이 한 손으로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살아온 생이 꽤나 험악했겠지만, 뭐 어쩌겠나.
세상엔 인력으로 안 되는 일도 있는 법이다.
“저놈도인가?”
“아니…… 저놈은 장화가 가죽이에요.”
“그럼? 저게……?”
“아마도?”
“아니면 어쩌나.”
“그럼 딴 놈 써야죠, 뭐.”
“하긴, 그렇군.”
그러던 중 장 피에르에게 접근하는 놈이 하나 더 눈에 들어왔다.
눈길이나 전체적인 인상은 일반적인 깡패와 다름이 없었지만, 부유해 보이는 것이 차이점이었다.
무엇보다 여럿이 몰려다니는데, 주변을 지나치다 싶을 만큼 경계하고 있었다.
뒷골목에 녹아들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봐.”
“네, 네?”
“돈 필요하지 않나? 필요해 보이는데.”
역시나 놈들은 장 피에르에게 돈 운운하면서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장 피에르는 그렇게 신신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있는 쪽을 슬쩍 바라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제일 눈에 띄는 리스턴이 눈보다 빠르게 숨었기 때문에 발각되는 일은 없었다.
“그럼 가지. 대충은 알고 있지? 피만 팔면 돼. 이보다 쉬운 돈벌이도 없을 거다.”
“네, 네.”
그렇게 장 피에르는 덩치 좋은 사내들에게 둘러싸여 이동하기 시작했다.
부둣가에 도착하고 보니 장 피에르 같은 신세의 사람들이 무려 열 명은 모여 있었다.
인솔자 역을 하고 있던 놈들은 횃불로 한 번 더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한 후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재밌는 건 장 피에르 얼굴을 제일 짧게 들여다봤다는 점이었다.
역시 분장의 힘일까.
아니면 원래 없어 보이는 얼굴 덕일까.
나와 리스턴은 돈 내기를 하면서 어떤 배에 들어가는지까지 확인했다.
“덮치는 건 역시 안 되겠군그래.”
“네. 출항까지 할 줄이야.”
배는 일행이 다 들어가자마자 항구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다시 정박했다.
뭐, 들어가려면야 갈 수 있겠지만…….
이 야밤에 전문가도 없이 배에 쳐들어가는 건 좀 그렇다.
게다가 리스턴이 가면 아무래도 배를 잘라 버리거나 할 텐데…….
그러다 선주가 나는 몰랐다고 하면 물어 줘야 할 수도 있지 않겠나.
“어차피 피에르가 알아 올 거야. 우리 영국인들은 차분히 말하면 대화가 되는 사람들이니, 뭐…… 괜찮겠지.”
“그렇죠.”
리스턴이 나서면 영국인이 아니라 프랑스 놈들도 대화가 된다는 걸 숱하게 보지 않았나.
-그거 아나? 아무리 과묵한 놈도 한 대 맞으면 수다쟁이가 된다네.
리스턴이 남긴 명언 중에 제일 와닿는 게 이거다.
칼침?
그런 것도 필요 없다.
그냥 머리통 한 대 딱 후려치면 갑자기 접신한 것처럼 묻지도 않았던 것까지 막 늘어놓는다.
“어땠나?”
몇 시간이 지났을까.
장 피에르는 유독 지친 얼굴을 하고서 돌아왔다.
팔을 가리키면서였는데 야매 주제에 꽤나 실력이 좋은 것인지 두 번 찌른 흔적은 없었다.
게다가 소독한 흔적까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과연 이 조직이 제법 크긴 하구나 싶었다.
“그런 생각만 든다고? 자네는 악만가?”
소감을 말했더니 장 피에르가 나를 비난했다.
이해가 안 가서 바라보고 있으려니 리스턴이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악마가 아니라 주술사네.”
“아니…….”
“그보다, 얼굴은 봤나?”
“내 피 받는 사람밖에 못 보긴 했는데, 확실히 보긴 봤네.”
“좋아. 가세.”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