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395)
검은 머리 영국 의사-395화(395/505)
395화 백내장 [2]
윌리엄 터너.
전에 내가 꽤 유명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냥 현존하는 영국 최고의 화가라고 보면 되는 수준이었더랬다.
그래 봐야…….
‘아직 프랑스 놈들한테 문화적인 쪽으로는 좀 밀리긴 하지, 우리 대영제국이.’
유럽 본토에 비하면 영국은 한참 모자란 상황이긴 했다.
애초에 영국이라는 땅이 그렇게 넓은 것도 아니거니와 문명 발달에 있어 섬과 대륙은 상당한 격차가 있기에 그랬다.
뭐 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부터는 단점이었던 것이 오히려 장점이 된 거 같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는 대다수의 유럽 위인들, 특히 예술가들은 독일이나 프랑스 쪽 사람들이라는 걸 보면 확실히 문화는 시간이 좀 걸리는 거 같다.
그렇게 잘 산 지 좀 되니까 비틀즈나 퀸이 나오는 거 봐.
근데 지금은 19세기고 아직 영국은 문화 변방이라 할 수 있다.
“그…… 이게 참.”
그 와중에 윌리엄 터너는 프랑스에까지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니, 참으로 우리 대영제국의 자랑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사람이 아프다면서 와서는 쉬이 고민거리를 내놓지 못하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약간 아팠다.
그러면서도 이 새끼도 진짜 아파서가 아니라 뭔가 다른 문제가 있겠구나 싶었다.
-그…… 피영신?
-네, 말씀하시죠.
-우리 대영제국을 위해 불철주야 참 고생이 많네…… 그나저나 내가 요새 좀 몸이 안 좋은 거 같아서 말이야.
-아, 네.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쇼. 제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가 배배 꼬인 놈이라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이런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 그렇다.
꼭 저렇게 되게 중요한 말을 할 것처럼 해 놓고 꺼내는 고민거리는 결국, 아랫도리와 연관된 것들이었다.
특징이 하나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하긴, 19세기 사람들이라 해서 체면이 없는 게 아닌데 왜 아니겠나.
“뭐든 말해 보십쇼.”
뭐…….
윌리엄 터너는 유명하긴 해도 나라의 명운을 움직이는 사람도 아니다 보니, 그러거나 말거나 싶어졌다.
마음이 넓어졌다, 이 말이다.
해서 나는 무슨 말이 나와도 다 들어 주겠다는 마음으로 잠시 기다렸다.
“눈이 좀 이상하네.”
“네네. 스쿼트를…… 네? 눈?”
허나 튀어나온 말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네, 눈이 좀…… 이상합니다. 아무래도 침침한 것이. 이전보다 안 보이는 게 확실합니다.”
“허어. 그래요? 눈이?”
“네.”
안과 환자였다.
안과…….
‘가고 싶었던 과지.’
누가 넌 외과 왔냐고 하면 늘 저는 사람 생명 살리기 위해 의대에 왔고, 그렇기에 딱 맞는 외과에 왔다고 당당하게 말했지만…….
뭐, 마음 한구석에 그런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니 마냥 생구라는 아니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과에 미련이 남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중에서 제일 아쉬웠던 과라고 하면 역시나 안과다.
처음엔 나도 개원해서 대박 나고 싶었거든.
그 한을 지금 여기서 풀고 있는 거 같긴 한데, 아무튼, 안과가 참 좋은 과다.
다른 과에서 밥그릇 건드리기엔 안과가 다루는 눈이란 곳이 진짜 너무 어렵기도 하거니와 위험한 기관이기도 해서 그렇다.
‘그래서 관심은 있었지만…… 솔직히 어떻게 치료하는지 하나도 모르는데…….’
내가 진짜 다른 과 문제면 어느 정도 건드려 볼 자신이 있다.
솔직히 이비인후과 같은 과는 같은 마이너 서저리라고 해도 뭐…….
응? 귀 한쪽 안 들린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잖아?
아, 21세기 기준이 아니라 19세기 기준이다.
여긴 뭐 치료하다가 사람 죽어도 대강 넘어가는 분위기잖아?
그나마 내 명성과 우리 병원의 명성을 생각해서 조심하는 거지 다른 놈들은 여전히 무식하기 짝이 없다.
의술보다 승마술을 더 열심히 익히는 놈들이 꽤 많다, 이 말이다.
“눈이라. 언제부터 그랬죠?”
속으로는 이런저런 고민을 하면서도, 나도 어쩔 수 없는 의사긴 해서 일단 진료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워낙 침착한 성품을 지닌 나이다 보니 상대는 내가 당황했다는 사실은커녕 고민하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 네. 역시 질문부터 다르군요. 그, 사실 긴가민가한 거는 꽤 오래됐어요. 몇 년은 된 거 같습니다.”
“몇 년이라…… 근데 이제 병원에 온 것을 보면 정말 불편해진 것은 최근인가 보군요.”
“아, 사실 저는 잘 몰랐어요. 뭐…… 책 볼 때 불편했긴 한데, 그거야 다들 그렇지 않습니까? 나이가 들면요.”
아, 이 양반 나이가 곧 환갑이다.
75년생이거든.
1775년.
그러니 나이가 드네 어쩌네 하는 것도 상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말이다.
“그렇긴 하죠.”
뭐 21세기 기준으로는 나이가 든다고 책을 못 볼 정도로 눈이 망가지는 경우가 흔치 않겠지만, 이 시기에는 일단 터너처럼 나이가 드는 거부터가 희귀한 일이다.
참 복 받은 인생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럼 어떤 불편감을 느끼신 건가요?”
나는 과연 몇 살까지 살 수 있을까.
조선 주술사를 시기하는 놈들이 칼이나 총으로 푹 하지 않더라도…….
어쩐지 그렇게까지 오래 살 수 있을 거 같진 않다.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거의 안 마시지만, 런던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면 모르겠지만, 내게는 지식의 저주가 아주 세게 내린 마당이다.
그렇다 보니 뭘 봐도 저기 납 페인트가 있네, 저기 수은 든 디저트가 있네, 오늘도 스모그네 등등의 위험 신호가 팍팍 들어온다는 말이다.
“지인이 해 준 말인데. 제 화풍이 변한 것을 칭찬하더라고요. 너무 놀랐습니다.”
“화풍이……? 화가로서 발전한 것일 텐데 그걸 듣고 왜 놀랍니까?”
잠시 딴생각을 하다가 터너 표정이 너무 좋지 못해서 나는 다시 대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저는 딱히 그렇게 그릴 생각이 없었거든요.”
“아니, 그럼……?”
“그냥 보이는 대로 그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친구의 말에 따르면 최근 제 작품은 아주 몽환적이라고 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최근 제가 보는 풍광이 좀 흐릿하단 느낌이 많이 듭니다.”
“음…… 풍광이 흐릿하다라.”
나는 터너의 시선을 쫓아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런던의 하늘은 늘 그렇듯 오늘도 흐릿했다.
아마 내가 의사가 아니었다면, 아니, 일반적인 19세기 의사였다면 그냥 ‘착각입니다’ 하고 넘어갔을 거다.
하지만 나는 세상에 백내장이라는 병이 있고 그 증상이 어떠한 것인지 아주 잘 알고 있다.
딱히 내가 안과에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다.
그냥 내 친구가 젊은 나이에 백내장을 앓게 되어서 그렇다.
이비인후과 친구였는데, 걔가 묘사해 준 바에 따르면…… 세상이 간유리를 통해 보는 것처럼 흐릿해진다고 했다.
‘하지만…… 말만 들어서는 알 수가 없어.’
검안경이라도 있으면 눈알 보는 흉내라도 내겠지만, 이 시대에 그런 것은 먹고 뒈지려도 없다.
기술이 없어서는 아닐 거다.
현미경도 있는 시대에 뭐 그런 걸 못 만들겠어.
하지만 어찌 만드는지, 왜 필요한지 몰라서 못 만들 뿐이다.
나도 어떤 원리로 만들어진 물건인지 전혀 모르는 데다가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다 보니 유추조차 불가능했다.
“그, 그림을 좀 볼까요?”
“아, 제가 그럴 줄 알고 좀 가져왔죠. 이봐!”
터너의 외침에 하인들이 마차에서 그림 몇 점을 들고 왔다.
“아니, 이 멍청아! 이건 내가 최근에 그린 거라고 몇 번을 말해. 그린 순서대로 놓으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냐!”
“죄, 죄송합니다.”
아…….
터너는 확실히 실력이 좋고 젊은 시절부터 돈과 명성을 얻은 사람이지만, 소문이 마냥 좋진 못하다.
인성에 대한 악평이 특히 심한 편이다.
애초에 저만큼이나 유명한 사람이 그 흔한 수행인 하나 없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나만 해도 벌써 제자가 넷이나 되는데 윌리엄 터너는 딱히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니 뭐 말 다 한 셈이다.
그런 사람이 우리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는 걸 보면 역시 사람은 성공하고 볼 일이다.
물론 성공해서만은 아니고 무서워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아무튼.
“여기가 젊은 시절에 그리신 거고, 여기가 최근에 그린 거라는 거죠?”
“네.”
“으음…….”
“어떻습니까? 사실 제가 젊은 시절에 그린 것도 지금 보니 꽤 흐릿하다는 느낌이 듭니다만.”
“으음…….”
나는 윌리엄 터너의 말을 들으면서 그의 그림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들었던 대로 그림이 확실히 좀 흐릿해진다는 느낌은 받았다.
하지만…… 이 양반이 살아온 세월을 통해 추정해 보건대, 그사이에 런던의 대기 오염 또한 상당히 심각해지지 않았겠나.
당장 오늘만 해도 출근하면서 바라본 런던의 전경은 흐릿함을 넘어 거뭇하다는 인상을 줄 지경이었다.
물론 그림 자체…… 그러니까 붓 터치도 좀 더 뭉개지는 형태를 띠고 있긴 한데…….
‘나이가 들면 아무래도 지치잖아?’
뭐, 우리 윌리엄 터너께서는 성질만 더러운 것이 아니고 꽤 체력도 좋은 편이라고 들었다.
세상에 취미가 바다에 나가는 거더라고.
그냥 남들이 모는 배에 타기도 하지만 본인이 직접 작은 배를 몰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이가 별로 나가지 않았다는 건 힘이 진짜 좋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 봐야 리스턴이나 조지프에 비하면 한 수 두 수 처지긴 하겠지만…….
‘그런 면에서 뭉개어 그린다고 생각하면 흐릿해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닌 거 같은데.’
나이와 대기 오염이 화풍에 영향을 준다는 생각은 내가 해낸 것이지만 확실히 그럴싸한 거 같았다.
게다가 내 기억이 조작되는 것일 수도 있는데, 어렴풋이 어떤 기사에서 미세 먼지가 어떤 화가의 화풍에 영향을 미쳤다는 걸 읽은 거 같다.
뭐…… 미세 먼지 하면 런던일 테니, 윌리엄 터너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제 내게 남은 건 환자를 위로하고 안심시키는 일밖에 없다는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편에 좀 찜찜함이 있었다.
그림이 단순히 흐릿해지거나 뭉개지기만 한 게 아니어서 그랬다.
무언가 다른 하나가 더 있었다.
“아.”
그 생각을 하면서 참을성 있게 그림을 더 지켜보다 보니 그제야 보이는 변화가 있었다.
“터너 님.”
“네, 말씀하세요.”
“혹시 최근 들어 노란색을 더 쓰는 거 같진 않습니까?”
“네? 아…… 그런가……? 하긴, 최근에 노란색 물감을 더 사는 거 같긴 합니다.”
그림의 색감이 변화하고 있었다.
더 노랗게.
분명 런던의 색감도 변화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거뭇해지고 있다고 보는 게 옳다, 노래지는 게 아니라.
런던 하늘 아래 정말 노란 건 나 하나뿐인가 싶을 때도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터너의 그림은 확실히 노래지고 있었고, 나는 불을 가져와 터너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히익. 살려 주십쇼!”
보통 이러면 화를 내야 할 텐데 내 위명 때문인지 영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아무튼, 불빛을 비쳐 본 터너의 눈은…….
내가 남들 눈을 이렇게까지 본 적이 없다 보니 비교가 어려웠다.
‘봐서는 모르겠네.’
나는 솔직히 말하는 대신 거짓말을 했다.
“백내장이 있는 거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