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401)
검은 머리 영국 의사-401화(401/505)
401화 안과 [3]
기다리는 것이 가장 중요할 때가 있다는 말이 있다.
내 선배가 해 준 말인데, 교수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 너무 불안해서 상담하러 갔더니 이런 말을 해 줘서 그나마 기다릴 수 있었다.
결국, 교수가 되긴 했으니 상당히 의미가 있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뭐 나야 그러고 거의 바로 죽었지만.
‘하지만 지금은……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선배…….’
그 명언이 여기서는 통하지가 않는다.
기다려?
뭘 기다리나.
기다리는 동안 사람 다 죽어 나간다.
내가 와서 엄청 좋아지긴 했다지만 여전히 파상풍이니 뭐니 하면서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여전히 의사라고 하면 합법적인 살인자로 보는 사람들도 많고.
“눈이…… 더 밝게 보이긴 합니다.”
“잘 보여요?”
“아뇨.”
“그렇군.”
이런 상황에서 의사라니…….
참 꿈도 희망도 없는 느낌이다.
내가 다른 지식이나 경험이 있었다면, 그러니까 군인이었다면 전쟁 영웅이라도 되었을 텐데 참 아쉽다.
아, 지금은 큰 전쟁이 없나?
아무튼, 나는 어제 수술한 사람들의 시력을 확인했다.
“평.”
“네.”
“하나도 못 보는 거 아닌가……?”
“그러게요.”
“‘그러게요’라니. 괜찮은 건가?”
“없던 머리도 생기는데 눈도 보이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렇군. 내가 시비를 걸려던 건 아니고 우매한 놈들이 그렇게 떠들어 대길래…… 가서 혼쭐을 내 줘야겠구만.”
리스턴이 씩씩거리면서 나갔는데, 진짜로 그런 말을 한 놈이 있다면 아마 크게 난처해질 거 같다.
아무튼…….
예상은 했지만 역시 수정체만 제거하는 것으로는 시력 회복이 어려운 거 같다.
“저는 안 받겠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내가 수술 확립만 하면 바로 받기로 했던 윌리엄 터너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고 있는 게 보였다.
예전에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요새는 하도 사람 눈을 들여다봐서 그런가 이렇게 멀리 떨어져 봐도 왼쪽 눈에 백내장이 있는 게 딱 보인다.
안 보이면 모르겠지만 보이는데 내가 어찌 아무것도 안 할 수 있을까.
“그건 안 되죠.”
“아니, 저는 괜찮습니다.”
“안 돼요. 수술받아야죠. 그림 그려야 되는데.”
“이렇게 되느니 그냥 안 그리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생각보다는 괜찮지 않아요?”
“그…… 그렇긴 한데. 그래도 이게…… 주님께서 주신 것을 제거한다는 것이…….”
“대신 주님의 사자인 제가 다른 렌즈를 만들어 줄 거라니까요?”
“그래도…….”
계속해서 뒤로 물러서고 있었지만 별 소용은 없다.
진료실 안에서 어디로 튀나.
밖으로 나가면 되겠지만.
“어딜 가려고? 혹시 진료 거부인가?”
“아니, 아닙니다.”
거긴 리스턴이 있다.
참고로 나나 리스턴이 제일 싫어하는 게 진료 거부다.
21세기의 진료 거부는 보통 의사가 했지만 여기서는 환자가 하기 때문이다.
다른 의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건 괜찮다.
그놈들은 돌팔이니까.
하지만 우린 안 된다.
우린 진짜 의사니까.
“어차피 집도 아네.”
“하아…….”
그래서 우리는 한번 찍은 환자가 있으면 절대로 치료해 버리는 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심지어 상대가 집으로 도망가면 거기까지 쫓아갈 정도다.
물론 다른 도시로 도망가 버리면 좀 곤란해지긴 할 텐데…….
사실 그것도 쉽지 않은 시대다.
자동차가 없다 보니 필연적으로 마차를 타야 하거든.
말 타고 가면 되는 거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튀는 건 사람 죽인 의사 정도나 하는 거지 어느 정도 사회적인 지위가 있고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택할 수 없는 일이다.
‘혼자 움직인다는 건 곧 죽음인 시대지.’
해적뿐만 아니라 산적도 있고 도적도 있다.
강도질 당하는 거야 마차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싶겠지만 마차는 그 자체로 훌륭한 엄폐물이 되어 줄뿐더러, 이 시기 마부들은 다들 총잡이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운 존재라 할 수 있다.
이런 얘기를 왜 하냐면 마부들이 총을 쏘다 보면 이런저런 식으로 뒷골목과 얽히기 마련이라서 그렇다.
우리가 런던 뒷골목을 주름잡고 있다는 건 곧 마부들을 꽉 잡고 있다는 얘기가 되고, 우리 몰래 런던을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이 말이다.
“무슨 뜻인지 잘 알리라 믿네.”
“히이…….”
윌리엄 터너는 리스턴의 말에 이러한 것을 이해하고는 도망가는 것을 포기한 모양이었다.
대신 기도하는 얼굴로 내 옆에 와서 앉았다.
제발 잘하기를 바라고 있을 터였다.
나도 그랬다.
‘일단…… 모양새는 그렇게 나쁘지가 않아.’
수정체를 제거하면 눈알에 구멍이 나는 거니까 진짜 좀 이상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앞에 각막은 있다 보니 그렇게까지 무섭게 보이진 않았다.
그러고 보면 런던 안과 의사라는 놈들 중엔 수정체만이 아니라 각막도 제거하는 놈들이 있는 모양이다.
진짜로 구멍 난 사람들도 있었거든.
아무튼, 모양새는 괜찮으니 다음은 시력이다.
“일단 뭐가 어떻게 될지 몰라서 이렇게 다 들고 왔습니다.”
“제가 즉석에서 주문에 맞춰 깎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쉽게도 시력은 내가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보니 어제 불렀던 런던 최고의 안경 제작자와 유리 세공사를 데려왔다.
다행히 둘은 P.S.의 일원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환자들도 협조를 아주 잘해 주고 있다.
단지 공짜로 수술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밥도 주고 돈도 주고 하니 당연한 일이다.
무엇보다 여기서 제대로 협조하지 않으면 나나 리스턴과 개인 면담을 해야 하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긴 할 거다.
“그럼 오늘도 따 볼까.”
“네.”
“오늘은 너도 따 봐.”
“네?”
“네는 무슨 네. 너도 이제 슬슬 수술할 때가 됐지.”
“정말로?”
뒤를 맡기고 나는 조지프와 함께 수술에 나섰다.
리스턴은 팔다리 자르러 가서 없었다.
어떻게 된 게 아직도 자를 사람이 있다.
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항생제도 없고 연고도 없고…… 무엇보다 그놈의 민간요법이 문제지.’
우리나라도 다치면 된장 바르라는 말을 아직도 하는 어르신들이 있지 않나.
된장이라는 게 결국 콩을 발효시킨 음식이고 발효라는 게 균이 작용한 결과인데…….
그걸 바른다는 게 참 그렇다.
나도 된장국 좋아하고 뭐 있으면 된장 찍는 거 좋아하지만,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하겠다.
바르면 안 된다.
여기서 ‘나는 괜찮았는데?’라고 하는 건 19세기 영국인과 같은 수준이라는 걸 증명하는 거다.
이론과 통계로 무장한 학문에 나만의 경험을 들이미는 건…….
물론 어지간히 효과가 있었으니까 지금까지 남은 거 아니겠냐는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 와서 보니 오래 살아남은 치료법이라고 해서 반드시 효과가 있는 건 절대 아니다.
‘미친놈들이 아직도 자꾸 기름을 붓고 그런다지…….’
기름도 그냥 기름이면 모르겠는데 끓여서 붓는다고 한다.
딱 봐도 더 고통스러워하는 게 보일 텐데도 그런다.
“자, 여기 앉으시고.”
“왜 피영시인이 아니라…….”
“제가 옆에 있으니까 너무 떨지 마시고. 돈은 더 드립니다.”
리스턴을 떠올리는 사이 조지프가 벌써 한 명을 앉혀 놨다.
환자야 당연히 집도의가 내가 아니란 사실에 두려워했지만, 돈을 더 준다고 하자 금세 얌전해졌다.
절박한 사람들에게 돈 가지고 너무하는 거 아닌가 싶겠지만, 여기서도 가난하다고 분류되는 이들에게 돈은 그냥 생명이라고 보면 된다.
정말로 돈이 없어서 죽는 사람들이 하나 가득이니까.
“떨지 말고.”
“어, 으응.”
“환자보다 더 떨면 어째. 시신 연습 많이 했잖아.”
“하기는 했는데…… 그래도 이게.”
“하긴 눈 찌르는 게 보통 일은 아니긴 해. 그래도 네가 벌써 나 따라 배운 지 몇 년이야. 그 세월을 믿어 봐.”
“알았어.”
마취가 된 후에도 잠시 아무것도 못 하고 있던 조지프는 내 격려에 힘입어 바늘로 환자의 눈을 따기 시작했다.
아트로핀 덕에 확 눈동자가 넓어진 참이라 아무래도 다른 안과 의사들에 비하면 훨씬 수월하긴 할 텐데, 그런 것을 감안해도 퍽 잘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꼼꼼한 놈이라 그런지 느려도 잘못 찌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느낌이라고 할까?
“후…….”
“어때.”
“느는 거 같아.”
“그렇지? 수술은 많이 하는 게 장땡이야.”
처음부터 그런 수준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환자를 수술할 때쯤에는 적어도 이 수술만큼은 나보다 잘한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다행이었다.
어제 해 보니까 이게 생각보다 눈이 아프더라고.
그러다 눈 잘못되면, 이런 식으로 수술을 받거나 아예 방치를 해야 할 텐데…….
‘안 되지…… 나는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이야.’
그에 비해 조지프는 확실히 체력이 좋은 놈이다.
리스턴 옆에 있어서 자꾸 약해 보이는 거지 리스턴만 빼면 견줄 자가 없는 수준이었다.
절대 내 위험을 친구에게 던진 건 아니다, 이 말이었다.
“후우…… 오늘은 좀 마실까?”
“그게 좋겠네. 근데 어디 가기도 좀 힘들겠는데.”
아무튼, 첫 수술을 했으면 축하를 해 주어야만 하는 법이었다.
조지프야 축하고 나발이고 간에, 집에 가서 자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소식을 전해 들은 리스턴과 블런델까지 호들갑을 떨었기 때문에 우리는 곧 근처 펍에 들어서게 되었다.
뒷골목에 있는 곳들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라고 보면 되었다.
신분과 신원이 확인된 사람들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인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나 리스턴조차 여긴 못 들어왔을 정도니 말 다 한 셈이었다.
“축하하네.”
“하하…… 근데 제가 이런 델 와도 되는 것인지…….”
“친구 잘 만난 덕이지. 그렇지 않나?”
“정말 그렇긴 합니다. 업턴에 있을 때도 똑똑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하하 말을 가려 하게. 그냥 똑똑한 게 아니라 신의 사자니까.”
“아, 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으려니 누군가 하나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저,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혹시 리스턴경과 피영시인 아니십니까?”
“아, 맞습니다.”
“네, 혹시 만난 적이 있나요? 얼굴이 낯이 익은 거 같은데…….”
여기서 누구시죠 하면 좀 그렇다.
나나 리스턴이나 귀족적인 말투나 예법에 익숙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무례한 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혼나면서 고치고 있다.
선생님이 ‘스스로 불알 자른 자’라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확실히 공작님이긴 하니까 믿고 있다.
“아, 아닐 겁니다.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독일에서 온 테오도르라 합니다.”
“그렇군요. 테오도르…….”
“그냥 닥터 테오도르라 해 주시면 됩니다.”
덕분에 우리는 리스턴이 나름대로 예의를 지키는, 참으로 희귀한 광경까지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무튼, 닥터라고 하니 확 거리감이 줄어드는 느낌이 있어서 옆에 앉혔다.
그는 오늘 축하 대상인 조지프에게도 인사를 하더니 본격적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실은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어떤……?”
“안과 진료도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네, 그렇죠.”
“얼마 되지 않으셨으니 모르실 수도 있을 텐데…… 세상에는 망막이 떨어지는 병도 있습니다. 제 중요한 환자 중에 그런 증상이 있는 사람이 있어서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