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404)
검은 머리 영국 의사-404화(404/505)
404화 망막박리 [1]
나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집에 돌아와서도 한참 동안 망막에 대해 생각했다.
당장 떠오르는 것은 망막 하던 교수님이 해 주었던 말이었다.
-안과는 해도 되는데 망막은 하지 마.
-왜요?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시발놈아.
보통 레지던트한테는 몰라도 학생한테 쌍욕 박는 교수는 거의 없다 보니 잘 잊히지가 않는데…….
이유가 있긴 하다.
망막은 말 그대로 막막한 분과라 그렇다.
일단 눈알 안쪽 깊숙이 있는 게 문제다.
게다가 너무 얇아…….
-시력에 너무 치명적인 것도 문제란다. 전안부는 개꿀이야. 전안부를 하렴.
망막 교수님은 이런 얘기도 해 주었더랬다.
물론 전안부 보는 교수님들이 듣자마자 버럭 화를 내긴 했는데, 더 얘기를 듣고 나니 위로하는 분위기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왜?
백내장이나 라식, 라섹이 다 전안부거든.
이건 상대적으로 수술 만족도가 대단히 높은 수술이라 한때 안과 의사가 전체 의사 중 환자에게 감사 인사를 제일 많이 듣는 의사였던 때가 있을 지경이었다.
그에 반해 망막은…….
잘해야 본전인 만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 면에서는 내가…… 교수님보다 훨씬 낫군.’
실력이 좋다는 건 아니다.
말이 안 되잖아.
하지만…….
환자 풀이 다르다.
여긴 수술했는데 환자가 살았어?
그럼 일단 감사 인사가 나온다.
게다가 상대가 나다?
수술하기 전부터 나온다.
‘죽어도…… 별말 안 나오겠지, 사실.’
19세기 런던…….
정말 마경이긴 한데, 오히려 이래서 이 시기에 급격한 발전이 있었던 거 같긴 하다.
옹호하는 건 아닌데 뭔가…….
으읏.
나도 모르는 사이에 19세기 사람이 되어 버렷.
“야, 뭐 해.”
그렇게 고민하고 있으려니 조지프가 들어왔다.
오늘 처음 안과 수술한 주제에 이미 마음만은 안과 의사였다.
심지어 테오도르에게 검안경 하나를 더 뺏어서 들고 있었다.
뭐…….
그로서는 별 방법이 없긴 했을 거다.
아닌 게 아니라 조지프 혼자만 있어서도 뺏기긴 했을 거야.
이 녀석도 리스턴만 없으면 어디 가서 참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하긴 했을 거거든.
“어, 아니. 아까 들었던 거 고민 중이지.”
“사실 나도 그래. 근데 떠오르는 게 없어.”
“쉽게 쉽게 떠오르면 그게…… 벌써 했겠지.”
“그렇지. 흐음.”
녀석은 자연스레 내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거야 뭐 어릴 때부터 그랬다 보니 나도 자연스레 녀석 옆에 앉았다.
그러곤 이러쿵저러쿵 말을 이어 나갔다.
대개는 쓸데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오늘 처음 수술을 해 보니 이랬더라 저랬더라 등등이다, 이 말이다.
하지만 얘기를 하다 보니 이 녀석도 과연 내 밑에서 허투루 구른 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나야 소독 전담으로 쓰고 있었지만, 원래 배우는 입장에서는 옆에서 보고 듣는 것만 해도 뭔가 달라지는 법 아니겠나.
‘게다가…… 내 자랑 다 빼고 봐도 지금 내 가르침은 시대를 훅 뛰어넘었지.’
거의 200년을 앞선 지식이니 말 다 한 셈이다.
게다가 지난 200년 동안 이룩한 발전이 그 지난 역사에서 이룩한 발전 전체를 쌈 싸 먹는다고 봐도 될 정도 아닌가.
현대인이 우수하다기보다는 인류 문명이 어떤 임계를 넘어갔다고 보는 것이 옳을 터였다.
아무튼, 그렇다 보니 이 녀석도 꽤나 능력이 생긴 모양이었다.
“망막박리라는 게 망막 뒤로 물이 찬다는 거잖아?”
“그렇지.”
“근데…… 음. 보통 그랬으면 망막에 구멍을 내서 물을 빼면 나아야 될 텐데…… 오히려 더 심해졌다고 했지?”
“그랬지.”
진짜 남의 망막이라고 별의별 짓을 다 한 모양이었다.
심지어 망막이라는 게 신경이다 보니 이게 망가지면 영양 공급이 끊기게 되어 필연적으로 안구위축이 오게 되는데도 그랬다.
안구위축이라니…….
감이 잘 안 올 텐데 눈이 쪼그라든다고 보면 되었다.
그렇게 되면 눈꺼풀이 안으로 말려서 안색이 시커메진다.
좀 무서운 인상이 된다, 이건데…….
‘그거야 알 바 아니긴 할 거야.’
19세기에 인상이 뭐…….
좀 무서우면 오히려 살기 편할 수도 있다.
너무 순하게 생겼는데 못산다? 그럼 보통 오래는 못 살더라고.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 봤어.”
“응. 말해 봐.”
조지프의 실력이 는 것은 인정하지만, 솔직히 이 녀석의 입에서 내가 참고할 만한 얘기가 나올 거 같지는 않아서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영 성의 없게 앉아 있진 않았다.
대화는 하고 있다, 이 말이었다.
덕분에 나는 조지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게…… 먼저 구멍이 나고 유리체액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박리가 되는 거 아닐까? 전에 코 수술할 때 네가 그랬잖아.”
“응?”
“물로 박리시켰잖아. 비중격 만곡증인지 뭔지 수술하면서.”
“아, 아아. 그랬지.”
물로 박리시킨 적이 있나 해서 물어보니 과연 그랬던 적이 있다.
내가 진짜 여기 돌아와서 별짓을 다 하긴 했던 모양이다.
하긴, 모든 분야를 나 혼자 끌고 나가야 하니 당연한 일이긴 하다.
참 힘든 세상인데…….
그래도 보람은 있는 게 제자들이 그런 내 가르침을 보면서 쑥쑥 크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물도 그런 힘이 있는데 유리체액도 당연히 그렇지 않을까? 안구 해부하다 보면 안에 물이 엄청 많잖아.”
“으음…… 그래, 그렇지. 아니, 그럴 거 같은데?”
지금 그걸 실감하고 있다.
나도 대강 기억은 하고 있었는데 조지프가 말해 주니 딱 정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확실히…… 기전이 거꾸로 되어 있어.’
학생 때는 의대에서 왜 발병 기전을 이렇게까지 힘들여 가르치나 했더랬다.
그냥 증상과 치료법만 알면 일단 환자는 볼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는 불충한 생각을 했었다는 말이다.
허나 그건 아는 게 쥐뿔도 없을 수밖에 없는 학생이나 할 법한 생각이다.
전문의 따고 돌이켜 보니 기전만큼 중요한 것도 없는 거 같다.
그걸 알아야 제대로 된 치료법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닥터 테오도르의 말이 맞았다면, 사실 치료를 그렇게 했을 때 하나쯤은 나아야 했을 거잖아.”
“그렇지. 환자가 약해서 죽는 건 말이 안 되는 거니까.”
“아니, 뭐 약한 사람이 있기야 할 텐데…… 그래도 몇 번 해 봐서 안 되면 치료법을 바꾸긴 해야지. 근데 무작정 바꾸기보다는 기전을 한 번 더 생각을 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게 내 생각이야. 어때?”
“허.”
나는 나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봐야 보이는 건 달도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뿌연 안개 아니 매연뿐이긴 했지만, 내 눈엔 그 너머에 있는 어떤 존재가 비쳐 보이는 듯했다.
참 원망을 많이 했던 존재였더랬다.
특히 전생엔…….
어? 뒈지게 고생해서 겨우 살 만해지려나 했더니 죽여 버렸잖아.
밸런스 X망겜 X망겜 하는데 아마 나만 한 놈도 거의 없긴 할 거다.
‘근데 밸런스 패치로 19세기로 보내 줬지.’
19세기…….
빈말로도 살기 좋은 시대라고는 못 하겠다.
물론 생각해 보면 21세기 현대 사회보다 살기 좋은 시대는 없었을 테고, 고대 사회에 비하면야 훨씬 낫긴 했겠지만 철없던 시절에는 원망도 했던 거 같다.
그랬던 거 같긴 한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세상에.
보고 계십니까?
지금 19세기인 조지프가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얘도…… 원래 위인인가?’
이럴 때 내 모자란 인문학적인 소양이 아쉽다.
그래도 의사 중에서는 어느 정도 다른 분야에도 관심을 두고 살았다 자부하는 편인데, 그럼 뭐 하나?
전쟁사 조금이랑 예술 쪽 제외하면 하나도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튼, 만약 이 녀석도 위인이라면…….
내 주변에 존 스노에 리스턴에 조지프까지 해서 벌써 셋이나 있는 셈인데 이쯤 되면 상태창 하나 쥐여다 준 셈이라고 쳐도 될 거 같단 생각마저 들었다.
“뭐야. 아니야? 왜 ‘허’ 하고 아무 말도 안 해.”
내가 잠시 감개무량해 하고 있으려니 조지프가 불안한지 이렇게 물어 왔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아니, 맞는 거 같아. 확실히 일리가 있어. 우리는 거꾸로 생각을 해 보자고. 망막이 박리되는 게 먼저가 아니라 망막에 어떤 식으로든 구멍이 나고 안으로 유리체액이 들어차는 거라고.”
“그렇게 되면…… 흠. 어떤 치료를 해야 하지?”
올바른 기전을 떠올렸으니 칭찬 아니라 헹가래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다만 한계는 있었다.
기전을 떠올린다고 해서 바로 치료법도 덩달아 따라오는 건 아니기에 그랬다.
그건 이제부터 고민을 해 봐야 했다.
“으음…….”
“으음.”
언제나 그렇듯 백지장도 맞들면 나은 법이지 않겠나.
동료가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둘이 머리 싸매고 있을 필요는 없으니 나는 다음 날 바로 일행을 불러모았다.
원래 계획은 브론테 자매를 찾아가 내 자서전을 부탁하는 것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초침이 째깍거리는 순간에도 환자의 눈은 망가지고 있을 테니까.
치료법을 떠올리고 연습하고 하려면…….
솔직히 지금 바로 뭘 해도 모자랄 거 같다.
“구멍이 문제면 꿰매면 안 되나?”
블런델이 먼저 의견을 내었고, 리스턴에게 격침되었다.
“어제 뭐 들었어. 꿰매다가 다 찢었다고 했잖아.”
“아니…… 그 사람 손이 후질 수도 있잖아. 나는 수술 잘해.”
“평이도 안 된다고 했는데 네가 무슨 수로.”
“아, 그건 그렇네.”
사실 구멍을 메운다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이면서 동시에 합리적인 생각이기도 했다.
그걸 격침시키는 건 내게도 리스턴에게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한숨이 뒤따랐다.
나부터도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리스턴이 갑자기 무언가 책임감이 느껴지는지 머리를 싸매기 시작했고, 나는 그에게 그러다 머리카락 빠지면 너만 손해라는 말을 해 주었다.
“아.”
해서 리스턴은 사실상 머리를 비워 버렸다.
겉은 비우고 속을 채우는 것보다는 겉을 채우고 속을 비우는 것을 택했다, 이건데. 누구도 그런 그에게 돌을 던지긴 어려울 터였다.
사자도 갈기가 빠지면 볼품이 없어지기 마련인데 인간이라고 다를까.
“잠시.”
그때 묵묵히 듣고 있던 원장님이 나섰다.
약간 켕기는 것이라도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면서였다.
21세기에서는 상대가 이러면 딱히 기대하면 안 되는 법이지만 19세기에는 오히려 이러면 좋다.
의외성이 빛나는 시대라서 그렇다.
“자네들 없을 때 내가 주치의 노릇을 했던 거 기억하지?”
“아, 그럼요.”
“뭐 그전에도 해 온 치료긴 한데…… 어디 물려서 오거나 하면 불로 지지잖아.”
“또 지졌어요?”
“아니, 지지겠다는 거 말렸지. 나도 눈이 있고 머리가 있는 사람이야. 더 나은 치료법이 있는데 굳이 그런 짓을 하진 않지.”
“아.”
“한번 하긴 했네.”
“아.”
“환자는 죽었지만. 아무튼, 그간의 경험을 떠올려 보면…… 지지면 상처가 붙지 않나.”
엄밀히 말하면 붙는다기보다는 눌어붙는다고 해야겠지만, 뭐가 되었건 붙기는 한다고 볼 수 있긴 했다.
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려니 원장님이 실로 끔찍한 치료법을 들고 나왔다.
“망막을 태우면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