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405)
검은 머리 영국 의사-405화(405/505)
405화 망막박리 [2]
불.
인류가 지금의 인류가 될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존재라 할 수 있다.
실제로 화식을 하게 되면서 생식하던 때보다 인류는 훨씬 더 효율적으로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덕에 두뇌 발달 또한 온전히 시킬 수 있었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놈 아니겠나.
허나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이다.
일단 불은 조심하지 않으면 불이 나는데, 그럼 사람이 죽을 수 있다.
“흐음…… 눈을 태운다…….”
“원장님, 실례지만 제정신입니까?”
강 건너 불구경이라는 말이 있듯 꽤 재밌기도 하거니와 예전에는 흔했던 모양인데, 재밌는지는 모르겠지만 흔한 건 맞다.
일단 방염 소재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인 데다가 불을 다루는 방식 또한 21세기에 비하면 가히 폭력적이라 해도 좋을 지경이다 보니 불이 잘 난다.
그럼 잘 끄기라도 해야 할 텐데…….
아무래도 소방차 같은 것도 없는 시절이다 보니 불 끄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그나마 부유층이 거주하는 곳은 목조 건물 비중이 작으니 좀 낫다곤 하지만 빈민가 쪽은 한번 불나면 정말 큰불이 나는데, 막말로 도보로 물 길어다 그걸 어떻게 끄나.
누누이 말하지만 소방관은 슈퍼맨이 아니다.
21세기에 그만한 장비를 갖추고도 불을 끄다 순직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 시기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 소방관들은 최선을 다해 여러분의 재산을 지켜 드립니다!
지금도 런던 거리를 지나다 보면 런던 소방 본부의 광고 문구를 볼 수 있는데, 놀랍게도 국가에서 운영하는 기관이 아니었다.
공공에서 뭘 한다는 게 거의 드문 시절이기도 하지만 불을 끄는 것처럼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를 굳이 나라에서 하고 싶진 않았던 모양이다.
그럼 저 문구는 과대광고니 철퇴를 맞아야 하지 않나 싶어지지만 실제로 지켜 주는 분들이긴 했다.
어떻게?
불이 난 집에 들어가서 값비싸 보이는 물건이나 주인이 특히 부탁한 물건을 들고나오는 방식을 통해서다.
“아니…… 제정신이야. 망막만 태우자는 거야. 눈이 아니라.”
이런 실정이니 다들 살면서 한두 번은 큰불을 봤을 수밖에 없는 시절이다.
나도 그랬고, 조지프도 그랬다.
업턴에서도 불이 났었는데…….
-우웩.
일반인 중에서는 나름 비위가 좋던 조지프가 토하던 게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불에 탄 사람을 보는 건 내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기억이 날 정도다.
리스턴이나 블런델 등도 그러한 경험이 다들 있었을 테니 원장님을 향한 공격적인 시선도 이해를 해 줘야 한다, 이 말이다.
거기에 더해 지금 우리의 입지가 원장님 입장에서 꽤 높아진 탓도 있었다.
21세기 같았어 봐.
어디 평교수따리가 원장님한테 제정신 운운하나.
“그러니까요. 불로 태우면 눈이 확실히 멀지 않겠습니까?”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자네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네. 하지만 나는 과거에서 배울 수 있는 것도 있다고 봐.”
“그 과거를 다 두들겨 패고 있는 것이 우린데요.”
리스턴의 말에 원장님은 잠시 움찔했다.
저 주먹을 휘두르면서 패니 어쩌니 하면 다들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원장님은 나름대로 리스턴 면역이 있는 사람인 데다가, 리스턴 말에 따르면 머리 심어 준 정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젊은 시절 꽤 큰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이다 보니 이 와중에도 의견을 낼 수 있었다.
“그래, 이제 우리 병원은 더 이상 상처를 태우진 않지. 하지만 말일세. 태우면 눌어붙는 건 알 거야.”
“그거야 알죠. 모를 수가 있습니까?”
나는 상상이지만 이들에게는 회상일 거다.
실제로…….
상처를 불로 태우던 시절이 바로 얼마 전이니까.
그게 아니면 끓는 기름을 붓거나.
그러다가 덧나면 리스턴이라는 이름의 망나니가 나서서 팔다리를 툭툭 잘라 왔는데…….
“내가 사실 연구 중인 게 있어. 살살 태워 보는 거야.”
“살살…… 태워요?”
“태운다기보다는 지지는 거지. 얼마 전에 경찰서 갔다가 힌트를 얻었네.”
“경찰서……? 아, 고문하는 걸 봤군요.”
“그렇네.”
21세기 최고의 검색 엔진은 논란의 여지 없이 네이버일 거다.
절대 내가 생전에 네이버의 녹을 먹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의사가 그럴 일이 있나?
아무튼, 그 네이버에 비견될 만한 검색 엔진이 19세기에도 있는데 바로 물과 인두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말과 ‘지지면 다 나온다’라는 말이 통용되는 시대가 바로 이 시대다, 이 말이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샌님들은 지금도 슬금슬금 우리처럼 문명화된 사람들이 야만인처럼 고문을 해야겠냐고 떠드는 모양이지만, 현장에서는 범죄자 동료 불게 하기, 음모 파헤치기, 드물게 기분 풀기 용도로 여전히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그게 너무 넓어서 사람이 다치는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네?”
“인두로 지지면 살이 오므라드는데, 나는 그게 아무리 봐도 상처에 갖다 대면 붙을 거 같거든. 그래서 해 봤네.”
“했어요? 벌써?”
“자네들 없던 게 몇 개월인데, 당연히 했지. 아무 말 말게나. 나도 힘들었어. 자네랑 닥터 평 없이…… 아휴. 이 모자란 놈들 데리고 내가.”
사람을 불로 지졌다는 말을 하고 있으면 응당 뭐라고 해야겠지만, 원장님은 과연 노회한 사람이다 보니 선수 필승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틈을 주지 않고 병원 쪽을 보며 버럭 화를 내는 통에 우리는 모두 비난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우리는 그저 그의 말을 듣게 되었는데, 나랑 같은 생각을 하면서는 아닐 거 같다.
‘확실히…… 지내면 지낼수록 이 시기 사람들이 21세기 사람들보다 지능이 딸리는 건 절대 아닌 거 같단 말이지.’
불로 지진다고 하면 되게 끔찍하게 들리겠지만, 사실 수술할 때 많이 지지긴 한다.
수술방에서 제일 역한 냄새 중 하나가 사람 살 타는 냄새고 그걸 막기 위해 석션을 하는 경우도 꽤 있다는 걸 수술과는 다 알 정도다.
사실상 모든 수술에서 지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당연히 인두로 지지는 건 아니고 전기 소작기라고 해서 끝이 얇은 기구로 지진다.
“이걸 보게나.”
그리고 원장님은 내가 늘 쓰던 것보다는 두껍긴 했지만, 적어도 송곳 정도로 얇기는 한 탐침을 보여 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날카롭거나 하진 않았다.
21세기 소작기는 칼처럼 쓸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만한 온도를 전달하기 어려울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걸로 지지면 진짜 아프겠는데…….”
“그러니까.”
“원장님…….”
나 외 모두는 그걸 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원장님은 똑똑한 사람이었다.
오직 한 사람, 내 반응만 보고 있었다.
“조용히 해 봐. 닥터 평은 가만히 있잖아. 어떤가? 내 아이디어가?”
확실히 이걸로 지지는 방식은 상당히 여러 방면에 효과가 있을 거 같긴 하다.
문제는 우리가 이걸 당장 써야 하는 부위가 눈이라는 거다.
그중에서도 눈알 뒤에 있는 망막인데, 이걸…….
‘송곳 같은 걸 찔러 넣어서 지지면…… 눈이 보이려나?’
뭐, 내 친구도 눈알을 지지긴 했다.
레이저로.
이런 소리 하면 ‘히익’ 싶을 수도 있는데, 레이저가 무기화되고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의료용 레이저는 그렇게 어마어마한 건 아니다.
엄청 미세하게 무언가를 태우는 용도로 쓰이는 데 숙달된 사람, 즉 나 같은 사람은 레이저로 종이에 장미를 새겨 넣을 수도 있다.
지졌다고 해도 레이저를 이런 물건과 비교하는 건 정말이지 크나큰 실례가 된다는 말이다.
‘근데…… 어차피 안 보일 눈이지? 그렇다면 희망에 모든 것을 걸어 보는 게 나아.’
실례는 실례고 현실은 현실인 법이다.
레이저?
레이저 같은 소리 하고 있다.
먹고 뒈지려도 없는 거 찾느니 우리 기특한 원장님이 미리 만들어 둔 이 물건을 쓰는 게 백배 천배 낫다.
“이건 쓸 만하겠어요.”
해서 나는 마침내 침묵을 깨고 의견을 말했다.
그러자 리스턴이 무슨 브루투스에게 찔린 카이사르라도 된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가 시선을 그의 머리 쪽으로 향하자 곧 나의 나팔수로 돌아왔다.
“평이 맞다고 하면 그런 거지. 안 그런가?”
사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술을 움찔거리는 놈들이 몇 있었다.
감히 조선 주술사, 주님 접신자인 내가 말씀하시는데 그런 불만을 품었다는 것이 참 괘씸하지만…….
지금은 없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조선 주술사라는 희대의 원딜러와 런던 제일검이라는 희대의 근딜러가 하나로 뭉쳤는데 거따 대고 개기는 건 용기가 아니라 어리석음이니까.
“하하하!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구만! 자, 그럼 그 사람을 부르세. 독일에서 나름 꽤 잘나가는 사람이라고?”
“아니, 근데. 바로 지지는 건 좀 그렇고요. 다른 사람을 지져 봐야 될 거 같은데…… 뭐 잘못한 사람 없나?”
“바로 경찰서에 문의를 해 보지.”
“급한 거니까 빨리빨리 해야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망막을 지지기로 합의를 보게 되었다.
다만 바로 잘못 없는 사람 눈알을 지지기는 좀 그러니까, 죄수부터 찾아보았다.
하지만…….
원래 개똥도 약에 쓰려면 잘 없는 법이다.
당뇨처럼 유병률이 높은 질환이면 모르겠지만 망막박리는…….
뭐 아주 드문 병은 아니긴 한데, 때를 놓치면 아무 소용이 없는 병이다 보니 지금 당장 눈이 멀 듯 말 듯 한 상태인 환자를 찾아야 하다 보니 이게 어렵다.
“없는데?”
“하아…….”
“죄인으로 만들면 될 거 같은데. 그럼 마음이 편해지지 않겠나?”
없다는 말에 내가 눈에 띄게 실망하는 모습을 보이자 경찰서장이 위로랍시고 이런 말을 했다.
솔깃한 것도 사실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딨나.
부끄럽지만 이 김태평이조차도…… 어느 정도 숨겨야 하는 게 있긴 하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것도 사실이기는 해서 나는 그냥 테오도르를 불렀다.
“방법을 떠올리긴 했는데 연습은 못 하겠네요.”
“실전이 최고의 연습이라는 말이 있죠.”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 인간도 역시나 훌륭한 19세기인이고 또 독일인이다 보니 내 의견에 반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한 발 더 나갔으면 나갔지…….
“그럼 해 볼까요.”
“흐아…….”
“긴장할 필요는 없어요.”
“선생님도 긴장한 거 같소만.”
“저에게 하는 말입니다.”
“흐아아아!”
“농담입니다, 농담. 생각보다 격렬하시네.”
“흐아.”
“사실 긴장은 됩니다.”
“흐아아! 아아아…….”
아무튼, 우리는 딱 봐도 좀 있어 보이는 환자를 데리고 와서 눕혔다.
나는 실력만 좋은 의사가 아니라 인성도 좋은 의사기 때문에 아이스 브레이킹도 했다.
별로 소용은 없는 거 같아서 앨프리드가 나서긴 했지만.
아무튼, 가스에 취해 잠든 환자를 나는 잠시 내려다보았다.
“음.”
“왜 그러십니까?”
솔직히 말하면 역시나 사람 눈알에 칼 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망막에 손을 대기 위해서는…….
눈알을 째고, 그걸 벌려서 안에 저 불에 달군 송곳을 넣어야 한다.
세상에…….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한데, 내가 이걸 해야 한다.
‘하아…….’
하기 싫다.
“오, 이게 그 접신인가?”
근데 옆에서 이 지랄 하고 있으니까 안 할 수가 없다.
내 위신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독일에도 조선 주술사 소문이 퍼지면 얼마나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