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408)
검은 머리 영국 의사-408화(408/505)
408화 화재 [2]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리스턴은 템스강 건너편에 구름 떼처럼 모여든 사람들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웨스트민스터 궁전이 있는 이곳은 켄싱턴과 인접한 곳이고…… 당연히 잘사는 지역이다 보니 인구밀도가 적지 않겠나.
서울 강남은 잘사는 지역이면서 동시에 사람들도 바글바글했었기 때문에 아직도 이게 좀 헷갈리는데, 하여간, 여기는 그랬다.
아무튼, 저 사람들이 여기 와서 몰려 있었다면 더 큰 일이기는 할 거 같아서 나는 리스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저거…… 저거 윌리엄 터너 아닌가?”
우리 일행 중 리스턴을 제외하면 제일 키가 큰 조지프가 다리 건너편에 있는 한 사람을 가리켰다.
나는 그렇게 키가 큰 편은 아니지만 리스턴과 한 몸이기에 바로 무등을 타고 조지프가 가리킨 쪽을 확인할 수 있었다.
뭐…….
사실 본다고 해서 얼굴이 보일 만한 거리는 아니긴 했다.
템스강이 한강처럼 널찍한 건 아니라고 해도, 배가 왔다 갔다 할 정도는 되니까.
아무리 그래도 저기 빠게뜨 놈들이 죽고 못 사는 센강보다는 훨씬 강다운 강이다, 이 말이다.
“맞는 거 같은데?”
하지만 윌리엄 터너는 알아볼 수 있었다.
겁이 많아서 그런가 아직 한쪽만 수술을 해 놨기 때문이다.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알 두꺼운 안경을 한쪽만 끼고 있다는 뜻이다.
런던에 아무리 몇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그런 몰골을 하고 있는 인간은 저놈뿐이니, 사실상 맞다고 단언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저 새끼 근데 뭘 그리는데?”
게다가 누가 화가 아니라고 할까 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궁전에 불났는데 한가롭게 앉아서 그림이라니…….
조선 시대에 저랬으면 왠지 국가 모독죄로 저잣거리에서 목 베여 뒈졌을 거 같은데 여기는 또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나중에는 몰라도 지금은 딱히 자유로워 보이는 문화권은 아닌데…….
하여간, 이놈의 양코배기 문화는 하도 이랬다저랬다 해서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설마 불 난 거 그리려고 저쪽으로 간 건가?”
“거참…… 눈 수술한 지 얼마나 됐다고 저렇게 무리를…….”
“그래도 기록은 남겨야지. 이 불…… 이건 런던 대화재 이후로 최대가 될 거 같은데.”
“하긴, 볼만하긴 합니다.”
지금도 봐라.
리스턴과 조지프는 딱히 윌리엄 터너를 비난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저 여상한 대화만 하고 있을 뿐인데…….
나는 둘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땅으로 내려와 화재 현장으로 다가갔다.
“어어, 평신이다!”
“설마…… 불도……?”
“아니, 끄러 왔겠지!”
“아, 아아. 주술로……!”
이 난리 통에도 나를 알아보는 이들이 몇 있었고, 말도 안 되는 말들을 하기도 했다.
불 질렀다는 새끼는 나중에 보면 어떻게 좀 해야겠는데, 문제는 불이 과연 꺼질까였다.
“혹시 안에 사람이 있나?”
좀 더 가까이 가자, 빈 물통을 들고 망연자실한 얼굴이 되어 궁전 쪽을 보고 있는 남녀 한 쌍이 보였다.
부부 같은데 내 기억에 따르면 아마 여기 경비 내외일 거다.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는 거 같아 물으니, 둘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퇴근했을 겁니다.”
“네. 이제 6시가 넘었으니까요.”
“으음, 그건 다행인데…… 불은…… 어쩌다 이렇게?”
“그건 모르겠습니다.”
“저희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내 말에 묻지도 않은 것을 답하면서였다.
괜히 의심스러워졌는데, 뭐가 되었건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 않은가.
‘사람은 없다? 그럼 다행인데…… 그렇다고 궁전이 홀라당 다 타 버리면 어쩌나, 이걸?’
정말 사람이 없는지도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21세기 건물은 내부에 감지 센서가 있어서 소방관 돌입의 기준이 되어 주지만 여기 뭐 그런 게 어딨나.
게다가 불도 불인데 연기가 이상하다.
“켈록. 일단…… 뒤로 오게. 이거 심상치가 않아.”
“네, 네.”
아무래도 나무만 타는 거 같지가 않다.
하긴, 그렇긴 할 거다.
저 안에 배관은 납으로 되어 있을 테니까.
납 증기가 천지 사방으로 번지고 있다는 뜻인데…….
내가 아는 게 그것뿐인 것이지 아마 유독한 물질 찾으려고 든다면 얼마든지 더 찾아볼 수 있을 거다.
“근데 소방관들은 안 오나?”
“그건…….”
연기뿐 아니라 아까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드디어 그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렇잖아.
불이 났는데 불 끄는 사람이 없다니?
나는 외상센터에 근무했었기 때문에 간혹 현장으로 출동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119와 손발을 맞춘 경험이 있다 보니 어색함이 더더욱 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경비 아저씨는 더 아는 것이 없었다.
“오고…… 있을 겁니다. 원래 같으면 보험 회사랑 연락을 해야겠지만 여긴 궁전이니까요.”
대신 답을 해 준 것은 어느 틈엔가 일행과 합류한 양복쟁이였다.
의회에서 일하는 사람인 모양인데, 나는 딱히 기억이 안 나지만 그는 나를 아는지 제법 친숙한 태도를 보였다.
“그래요? 그건 다행인데, 이걸 어떻게 끄지?”
“소방 마차가 있긴 할 텐데…… 그래도 이건…….”
“소방 마차라.”
소방차가 와도 쉽지 않을 거 같은데 마차라니.
나는 새삼스럽게 내가 두 발을 디디고 선 이곳이 19세기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다그닥.
다들 양반은 아닌지 말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모습을 나타냈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작은 마차들이었는데 여기저기서 온 것인지 생김새는 각기 달랐다.
물론 소방관들이라고 해서 차림새가 다른 것도 아니었다.
방염복 따위는 먹고 뒈지래도 없는 시절이다 보니 그냥 평상복에 물이나 적신 게 다였다.
“어…… 들어가잖아?”
그들은 물바가지만 달랑 들고서 우리가 뭐라 할 틈도 없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네, 그래야죠. 안에 중요한 물품들이 있으니까요. 특히 기록은…… 기록은 다 탈 거 같은데…….”
“기록이 중요하긴 해도 저렇게 들어가면 다 죽을 거 같은데?”
“그러라고 있는 직업인데요.”
“뭔…….”
나는 지는 밖에 있는 주제에 태평하게 말하는 놈을 불길에 집어넣으려다가 말았다.
세상이 이런 세상이기는 해서 그랬다.
말하자면…….
누칼협의 시대라고나 할까?
19세기 때 정점을 달했다가 간신히 고쳐진 인식인데 21세기에 또 한 번 불이 붙다니, 이래서 세상은 돌고 돈다고 하는 모양이었다.
‘들어갔으니…… 나올 때 화상을 입을 거야. 뻔하지.’
나까지 다치거나 죽어 가는 소방관에게 누가 칼 들고 그거 하라고 협박했냐는 말에 동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상은 소방관 같이 자기 삶을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어 간신히 살 만하게 돌아가고 있지 않겠나.
물론 나머지 사람들이 다 그들을 보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겠지만 세상에 나 같은 놈도 한둘쯤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저 밑도 끝도 없이 희생하는 이들을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을 테니.
“자, 여기로! 이쪽에서 대기! 영웅들을 기다립시다!”
해서 나는 이렇게 외쳤다.
누가 되었건 간에 다른 이들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면 그게 영웅이라 생각했기에 그랬다.
옛날 같았으면 아무리 고래고래 외쳐 봐야 별 소용이 없었을 테지만, 이젠 아니었다.
나는 조선 주술사이자 주님의 사자인 동시에 런던 제일의 명의이자 갱단의 두목이었으니까.
“뭘 하면 될깝쇼!”
“뭐든지 시켜 주십쇼!”
우리 일행뿐 아니라 구경하러 왔던 이들까지 합세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노인도 있고 아이도 있어 내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훈훈해지고 있었다.
‘하.’
이걸 무슨 기분이라고 하면 알아들을까…….
그래, 마인X우에게 원X옥 던지려던 손오공이라고 하면 될 거 같다.
연식이 짧은 사람들은 알아듣기 어렵겠지만, 알아들을 사람이 더 많다고 본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을 보면서 화상 치료에 대해 떠올렸다.
‘전문적인 치료는 나도 안 돼.’
그렇다고 일행에게 의지하는 것도 어렵다.
양파 챙기는 사람한테 의지하게 된다면 사실상 나도 다 끝장난 셈 아니겠나.
하지만 나는 이제 19세기에 적응한 지 오래된 사람이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꼭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그래서 알게 되기도 했다.
“일단 물 길어 와요! 템스강 물!”
“어…… 저 물은 똥물인데요!”
“그래도! 물은 물이니까 불은 끄겠지! 안에 들어간 사람들이 살려면, 여기서라도 불길을 잡아야 합니다!”
“아아, 네!”
똥물이라기보다는 독물이라는 게 더 올바른 표현이겠지만 사람들은 내 말에 우르르 강으로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걸 본 건너편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자살하지 마!”
괜히 하는 소리는 아니다.
이 시기 템스강에는 함부로 들어가는 게 아니었으니까.
태어난 김에 세계 일주를 하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갠지스강 물을 먹고도 살아남은 웹툰 작가가 있었는데, 그조차 이 템스강 물은 견디기 어려울 거라고 본다.
여긴…….
이제 물고기가 멸종해 가고 있으니까.
“자,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합시다. 화상 치료…… 해 보는 겁니다.”
“응! 양파 여기 있네!”
“붕대도!”
“조지프, 물 가지고 왔지?”
나는 리스턴과 블런델의 말을 무시한 채 조지프를 바라보았다.
조지프는 소독에 미친 놈인 만큼 취미로 증류수를 만들기도 했는데, 그 덕에 우리 병원은 늘 증류수가 넘쳐흐르는 곳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타고 다니는 마차나 조지프의 배낭에도 증류수가 가득했다.
“어? 어어. 오늘 만든 거야! 왜 목말라?”
그는 이제 다른 물은 마시기는커녕 쳐다보지도 않는다.
실제로 그 이후로 건강해졌는데, 그만큼 물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다만 오늘만은 마시는 대신 다르게 쓸 생각이었다.
‘화상의 기본은…… 열에 의한 손상이야. 그걸 식혀야 해. 어차피 아주 찬 물은 없으니 물을 붓는다고 해서 추가적인 손상이 생기기는 어려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화상 입은 사람이 있으면 거기에 물을 부어야 해. 붕대도 깨끗한 거 있지? 그걸로 덮고 붓는 거야. 마르지 않는 게 중요해. 마르면 살점까지 다 떨어져!”
“그래서 양파가…….”
“한 번만 더 양파 소리하면 양파 머리 만들 겁니다.”
“아니…….”
나는 풀 죽은 리스턴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일반인에게는 절대로 불가능한 명령이지만 이 사람은 왠지 될 거 같았다.
“형님은 양파 말고, 병원 가서 얘가 만든 증류수나 더 가져오세요. 아니면 그냥 마차를 끌고 오든지.”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말을 어떻게 모나. 그리고 말은 겁이 많아서 불난 곳으로는…….”
“형님.”
나의 진중한 말에 리스턴이 입을 다물었다.
뭐가 되었건 간에 내가 이렇게 나오면 반드시 따르는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맹세도 했는데 응당 그래야 하지 않겠나?
“조선에는 인력거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상당히 불안해지는데.”
“사람이 끄는 마차죠. 형님은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아무리 내가 힘이 세도…….”
“물이 많아야 사람을 살릴 수 있어요. 아까 들어가는 사람들…… 무조건 화상이에요. 불길을 좀 보십쇼. 템스강을 부어야 끌 수 있을걸요?”
“그건…… 이런 제기랄. 알겠네. 런던 제일검의 이름에 기대어 보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