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409)
검은 머리 영국 의사-409화(409/505)
409화 화재 [3]
나는 가끔 그리스·로마 시대에 대해 생각한다.
그 둘은 정말이지 대단한 문명이었던 거 같다.
다른 분야는 내가 잘 몰라서 함부로 말하기가 좀 그런데…….
의학적인 면만 보면 유럽에서만큼은 세계 제일이다.
잘했다기보다는 영향력이 그렇다는 얘기다.
“일단 이것도 좀 쓰게나.”
“이건……?”
“아편이야.”
“아편을 들고 다녀요?”
나는 블런델을 바라보았다.
조금이라도 부끄러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였다.
물론 별 소용은 없었다.
우리로 따지면 공자님 같은 옛 성현들의 말씀을 따르고 있는 것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도 뭐…… 이제 와서 굳이 블런델의 이러한 사고방식까지 교정할 생각은 없다.
“갈렌 가라사대 아편으로 진정을 시키는 것이 화상 치료에 아주 중요하다고 하셨네.”
“아, 스승님. 저도 들어 본 일이 있습니다.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도 봤고요.”
하지만 우리 똘똘이 존 스노까지 이러면 곤란하다.
나는 불길 속에서 아직은 아무도 나오지 않고 있다는 걸 확인한 후 차근차근 물었다.
“뭔 도움이 됐는데?”
혹시 나도 모르는 치료법이 있었나 궁금하기도 했다.
그 왜…….
실전된 고대 유물 같은 거 있지 않나.
21세기에 이르러서야, 그런 소리 진지하게 했다가는 학계에서 바로 매장되겠지만.
나 어릴 적까지만 해도 고대 유물 같은 것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책도 있고 그랬다.
“환자가 막 아파하다가 조용해졌어요.”
“아.”
역시 그런 게 사라진 이유는 명확하다.
다 개소리라서 그렇다.
세상에 조용해졌다니.
21세기에 들었다면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겠지만, 19세기에는 소름 끼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죽었다는 말과 비슷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일단 넣어 둬요. 진짜로 필요하게 되면 말씀드릴게.”
“그래? 아니, 그래도…… 흐음. 그럼 칼이라도 꺼내 둘까.”
“칼이요? 당장 쓸 일은 없을 텐데?”
“하하. 갈렌 가라사대 불을 쓰지 못하는 치료에는 철을 쓰라고 하셨네. 화상은 이미 불에 부상을 입은 것이니 철을 써야지.”
“그…… 갑자기 왜 그래요, 무섭게. 이제 우리 많이 진보했잖아. 갈렌에서 많이 벗어났잖아요.”
나는 존 스노를 무시한 채 블런델 쪽을 타일렀다.
예전 같았으면 전혀 소용이 없었겠지만, 이제 와서 내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의사가 있겠나.
갈렌보다도 더 위대해진 사나이, 그게 바로 나다.
“그, 그런가?”
“콜레라 때도 그렇고…… 갈렌 말대로 하면 사람이 더 죽는다니까요?”
“하지만 말일세, 그게 예외적인 일 아니었겠나? 만약 정말로 더 죽는 치료였다면…… 대체 어떻게 지난 수천 년간 이어져 내려왔을 수 있겠나.”
글쎄, 그것이야말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유럽 놈들이 다 바보 븅신은 아닐 텐데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모종의 세력이 있어 인류를 그런 방향으로 이끌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너무 지나친 생각 아니냐고 할 수도 있을 텐데, 여기 와 보면 아마 다들 나처럼 될 거다.
‘그러니…… 나도 주술을 써야만 하지.’
나는 현대인이 이런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가장 현명한 결론을 내린 채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 갈렌은 악의 사도였습니다.”
“응?”
그게 뭔 개소리냐는 표정이 돌아왔다.
괜찮다.
예상을 하지 못했더라면 상처가 되고 또 당황도 하겠지만 나는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으니.
물론 제자랍시고 데리고 다니는 놈들까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건 좀 그렇긴 했다.
내가 지금까지 보여 준 이적과 기적이 대체 몇 갠데 아직도 이리도 믿음이 없단 말인가.
제대로 된 놈들이었다면 내가 지금 당장 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여기 모여든 이들 다 먹이겠다고 해도 일단 믿는 시늉은 해야 할 텐데…….
“쯧.”
“응?”
“아닙니다. 아무튼, 그 사람이 기독교인이었습니까?”
“응……? 그거야 알 수가 없지. 기록이 없지 않나……?”
“콤모두스 황제 때 인물이니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죠. 당시 로마는 기독교를 박해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어어…… 그런가?”
맞을 거다.
주일 학교 때 들었거든.
딱히 믿음이 있어서 다닌 건 아닌데, 가면 먹을 것도 줬다.
무엇보다 한 달에 한 번 하는 퀴즈 대회에서 우승하면 피자 쿠폰까지 줬는데 예나 지금이나 공부하는 거 하나는 자신 있던 내게 조그마한 동네 교회 주일 학교에서 우승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목사님!
자랑스러워해도 좋습니다.
그때 그 작은 소년이 이제 주님의 사자가 되었어요.
“네, 놈이 사특한 기록을 많이 남긴 거 같은데…… 그거에 우리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죄 속은 겁니다. 내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간밤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어…….”
리스턴이 있었다면 일단 믿었을 텐데 역시 블런델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런 미친 소리에 반신반의하는 반응이라도 보인다는 게 어딘가.
확실히 나는 제대로 살아 내고 있는 게 맞는 거 같다.
비록 후세의 평가는 어디로 갈지 점점 알 수 없게 됐지만…….
진짜 영웅은 말보단 행동으로 보이는 법이다.
“그러니까 일단 그 망할 놈의 이교도 갈렌은 머릿속에서 지우시고, 과학적으로 생각합시다.”
“그, 그래.”
사실 과학이야말로 종교의 적이 되어 가고 있는 시대였지만, 눈앞의 불길과 지금까지 내가 보여 주었던 이적들이 일행의 눈을 흐리게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 명에 따라 후다닥 뛰어갔던 리스턴이 정말로 혼자서 마차를 끌고 오고 있는 모습은 성경 속의 삼손을 떠오르게 했다.
그쪽은 머리가 풍성하고 또 길었으니 모양새야 많이 다르긴 했겠지만…….
머리 관련한 일이면 물불 가리지 않게 된다는 점에서 리스턴을 내 삼손이라 여겨도 될 거 같다.
“물도 왔겠다……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명확히 정하겠습니다.”
“아, 말하게. 듣고 있어.”
“우리는 온도를 낮추는 데 집중할 겁니다.”
“불이 붙은 것도 아닌데……?”
“열과 불은 다른 겁니다. 주전자 만져 보면 불이 붙은 것도 아닌데 뜨겁지 않습니까? 사람 살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런데 들어갔다 나오면 당연히 뜨거워져요. 그 채로 계속 두면 안이 익는 겁니다.”
“으음…… 이해가 잘…….”
이해가 안 가면 그냥 닥치고 하라고 하고 싶지만, 나는 이들을 단순한 일꾼으로 여기는 게 아니지 않나.
일단 나 혼자서는 한계가 있다.
입만 열면 세계를 논하고 있지만 사실상 런던만 해도 너무 크고 넓으니까.
세상에 뭔 놈의 인구가 이렇게 많은지 이 시대에 수백만이 여기서 우글거리고 있다.
어떻게든 얘네를 키워야 한다는 건데, 다행히 나는 정말이지 신께서 주신 주둥아리가 있는 거 같다.
아니, 어떻게 순간적으로 이게 딱 떠오르지?
“스테이크 구울 때 레스팅이라는 게 있죠?”
“어…… 그렇지. 장 피에르가 딱 하나 있는 재주가 그거 아닌가.”
“네. 그거…… 그냥 뜨신 접시에 스테이크 두고, 덮개로 덮을 뿐인데 고기가 더 익지 않습니까? 사람의 살이라고 다를까요?”
“아, 아! 그렇겠구만! 이걸 그냥 두면 레스팅이…… 허…… 그렇구만! 자네는 어찌…….”
“어제 주님이 나타났다니까.”
“아.”
그렇게 딱딱 이해가 가게끔 설명을 해 주었다.
와…….
내가 진짜 외과 교수가 되었어야 한다.
그랬으면 대한민국 의료 수준이 팍 올라갔을 텐데…….
“어, 나온다! 아이고! 불이……!”
그렇게 한탄을 하고 있으려니 내 명에 따라 건물에 템스강 물을 들이붓고 있던 사람 중 하나가 불길 쪽을 가리켰다.
과연 사람 둘이 나오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등 뒤에 살짝 불이 붙어 있었는데 많이 뜨거운 모양이었다.
“형님!”
“맡겨 주게!”
해서 나는 리스턴을 출동시켰다.
그는 방금 전까지 마차 끌고 반쯤 달려온 주제에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마차에 실려 있던 증류수를 상대의 등에 부어 주고는 그대로 그를 집어 들고 나에게로 뛰어왔다.
‘미친…….’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이게 되나 싶은 광경이었다.
“오오…….”
“역시 런던 제일검이시다!”
나도 이러니 남들은 뭐 어떻겠나.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조금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면 정신이 많이 없는 것일까?
아무튼, 나는 이제 내 차례라는 생각에 방금 불이 꺼진 환자의 셔츠를 주의 깊게 내려다보았다.
이럴 때 함부로 벗기려고 하다간 그나마 남아 있는 피부가 같이 벗겨질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큰일이다.
‘역시…… 이런 제기랄.’
범위가 넓지는 않은데, 깊이가 깊다.
보이진 않지만 아마 3도겠지.
‘내가 딱히 화상 전문은 아닌데…….’
태화 의료원은 시스템이 잘 잡혀 있다 보니 외과에서는 수술만 하고 화상은 피부과에서 주로 보았다.
피부 이식 정도는 그냥 거기서 했고, 만약 더 큰 재건술이 필요하면 성형외과에서 했는데…….
나는 옆에서 본 적이 몇 번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이건 진짜 감염으로 죽어.’
그때마다 들었던 생각은 화상만큼 X같은 병도 잘 없겠다는 것이었다.
외양이 변하는 것도 참 끔찍하게 변하는데, 낫는 과정도 참 쉽지가 않았다.
일단 더럽게 아픈 게 문제였다.
“으, 으아아아아!”
아까 리스턴의 배려로 뒷목을 맞아 잠시 정신을 잃었던 환자는 내가 옷을 가위로 잘라 내고, 남은 부위를 물로 적시면서 조심스럽게 벗겨 내는 동안에 깨어나 버렸다.
그와 동시에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들었던 비명이 애교로 느껴질 만큼이나 끔찍한 비명이었다.
“어이구, 어이구.”
“주술이니까 아프기야 하겠지.”
“그래도 살아나는 게 어딘가.”
“하긴, 영국의 복이지.”
여기 있는 구경꾼들은 대부분 상류층인데 이런 말이 들려온다.
다행이라 할 수 있다.
뭐가 되었건 내가 이 사람을 해치려는 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는 거 같으니까.
“이제 어쩌나?”
“일단…….”
문제는 아직 옷이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이걸 그냥 두면 반드시 환자는 죽는다고 봐야 했다.
엉겨 붙은 채로 염증을 일으킬 것이고, 감염이 일어나게 되면…….
이미 피부라는 보호막이 사라진 부위에 균이 다 쳐들어와서 순식간에 패혈증으로 진행할 테니까.
‘항생제…… 시벌…….’
우리 화학자 아저씨는 왜 코카인이나 만들고 있는 걸까.
빵 썩히면 될 거라는 결정적인 힌트를 줬는데도 왜 아직도 페니실린이 안 나오고 있냐고.
“으, 으아아아. 사, 살려…… 으아!”
무시하고 진행해 보려고 했는데, 그건 안 될 거 같았다.
미안해서가 아니라 이러다 죽을 거 같아서였다.
통증으로도 쇼크가 와서 갈 수 있는 게 사람이거든.
무엇보다 나는 21세기에 활동했던 사람이다 보니 이렇게 아파하는 게 좀 익숙하지가 않다.
쓸데없는 고통만큼 제거해 줘야 할 것도 없다고 배우는 것이 우리기에 그렇다.
“아편…….”
“응?”
“아편 줘요.”
“아니, 갈렌 놈은 잊으라며.”
“아파하니까 그건 조절해 줘야죠.”
“그…… 조용해지는 것과 다른 건가?”
“치료 자체가 아니라, 치료를 위한 겁니다.”
“으음.”
설명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나는 우선 아편을 환자의 입에 흘려 넣었다.
잠시 후, 환자는 말 그대로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