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430)
검은 머리 영국 의사-430화(430/505)
430화 급변하는 정세 [1]
제이미 경은 놀랍도록 빠르게 건강을 회복했더랬다.
그래 봐야 뭐…… 노인네긴 하니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 상황이긴 했다.
21세기에도 노인은 어제까지 팔팔하다가 오늘 갑자기 쓰러지곤 하지 않나.
세월에 장사 없다는 말이 적어도 21세기까진 통한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제이미 경도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바로 정무에 복귀하겠다고요?”
“그래,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거 아닌가?”
“그건…….”
“티에피영, 솔직히 말해 주게. 얼마나 더 살 거 같은가.”
“오래 살진 못하겠지요.”
무리하겠다는 노인이라고 해서 무작정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심지어 그 노인이 대영제국이라는 거인의 머리에 속하는 인간이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말이 되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세상엔 목숨보다 중한 일들이 있기도 하기에 그랬다.
나로서는 아직 이해가 잘 안 되지만…….
19세기는 낭만이 없으면 살수가 없는 시대라 그런가 이상하게 이런 류의 인간들이 많았다.
“그래, 그럴 줄 알았네.”
제이미 경은 죽다 살아난 주제에 곧 다시 안 좋아질 거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그저 웃었다.
거의 처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인간이 멋져 보이는 건.
사실 첫인상이 좋기는 어려웠잖아.
스스로 고환을 자른 공작 각하라니.
웹소설 제목으로도 기각이다, 이런 건.
“역시 전하를 만나야겠네.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뭐…… 얼마 남지 않았다 해도 1, 2년이에요. 무리하면 단축되겠지만 제가 책임지고 명 붙들어 놓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져 보일 수 있다는 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보면 된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나는 기적을 목도하고 있단 말이 된다.
해서 나는 의사라면 사실 하면 안 되는 말을 하고 말았다.
책임진다느니 하는 말들…….
당연한 말이지만 적어도 입 밖에는 내면 안 되는 말 아닌가.
분위기 좋을 때야 다들 허허 웃지만 나중에라도 혹 잘못되면 바로 고소감이 된다.
하지만 이 시대는 그럴 만한 시대도 아니었고, 제이미 경은 사나이 중의 사나이였기 때문에, 괜찮을 거 같았다.
“자네도 같이 가세.”
“네? 저요? 전 그냥 의산데.”
“하하, 농담도…… 자네를 이제 와서 그냥 의사라고 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 그래도 되나? 중요한 말씀하러 가시는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자네도 연관된 일일 거야.”
“어…….”
그것과는 별개로 뭔가 개같은 일이 벌어질 거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넋 놓고 당하는 거보다는 아무래도 미리 들어서 준비라도 하는 게 낫지 않겠나 싶었다.
그 준비라는 것이 결국, 마음의 준비에 불과하기야 하겠지만…….
19세기는 멘탈 싸움이라는 게 내 결론이다.
해서 나는 무려 어전 회의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엔 나조차도 쉬이 보기 어려울 만큼이나 대단한 귀족들이 잔뜩 들어와 있었다.
물론 아무 작위가 없는 사람들도 있기는 했다.
허나, 그런 사람들조차 일단 의원이긴 했다.
그 말은 곧 어퍼 클래스에 속하는 사람들이란 얘기였다.
‘닥치고 있자고.’
‘네, 형님.’
나나 리스턴도 어영부영 작위를 받긴 했지만…….
그에 대해 불만 가진 이들이 꽤 많은 것도 사실 아닌가.
물론 그 중 태반은 우리 둘 선에서 처리가 가능하겠지만, 그렇게 싹 다 처리하면서 올라가다 보면 어디가 나올지 알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었다.
아니, 솔직히 우리만의 결론은 아니고 우리 주변을 지켜 주고 있는 높으신 어른들의 의견이었다.
꼭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내가 뭐 정세에 대해 아는 게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그냥 닥치고 있는 게 맞는 거 같아서 리스턴과 나는 존나 가만히 있기로 했다.
“폐하. 제가 죽다 살아난 것은 알고 계실 겁니다.”
“알고 있네. 티에피영이 자네를 살렸지.”
“네. 고통스러운 치료였지만,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래, 이렇게 모았으니 하고자 했던 말을 해 보시게.”
윌리엄 4세께서는 빅토리아 공주도 데리고 온 참이었다.
뭔가 조선이었으면 ‘어디 아녀자가 국무를 논하는데!’ 하면서 ‘갈!’ 소리가 나올 만한 상황 같았지만,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라는 걸출한 여왕을 모셨던 국가라 그런가 그런 일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웃기는 일이다.
밖에 나가 보면 영국도 조선 못지않은 남존여비 사회 아닌가.
애초에 제대로 된 교육도 시켜 주지 않을뿐더러…….
여자 작가들이 여자 이름을 걸고 책을 내면 안 팔리는 정도가 아니라 사달이 날 수도 있어서 가명으로 책을 내고 있는데 정작 제일 고위층은 이러고 있다니.
정말 알다가도 모를 시대다.
“러시아가 점점 지중해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대영제국에 있어 중대한 위협이지요.”
“하는 수 없는 일 아닌가. 오스만 제국이 나날이 쇠약해져만 가고 있으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대화였다.
한때 오스만 제국의 허락을 받지 않고서는 단 한 척의 배도 지중해에 띄울 수 없다는 말도 있지 않았나.
X항해시대 게임 하다 보면 나오는 괴물 같은 해적 하X레딘도 오스만 제국의 해군 제독을 모티브로 만든 인물이니 말 다 한 셈이다.
하지만 지금의 오스만은 유럽의 병자로 전락한 지 오래다.
그러니 러시아고 뭐고 다들 지중해에 한 숟갈씩 퍼먹으려고 달려들고 있고.
“하지만 그대로 두었다가는 러시아가 두고두고 우환거리가 될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만…… 러시아는 지금 기세가 만만치 않네.”
“하는 수 없다는 말로 나폴레옹을 두고 보다가 유럽이 어떻게 되었었습니까. 그런 일은 막아야 합니다.”
“그럼 어쩐단 말인가?”
나폴레옹.
한국에서는 그냥 키 작은 영웅 내지는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고 외쳤던 전쟁 잘하던 아저씨 정도로만 인식되지만 19세기 유럽에서는 거의 볼X모트급의 위력을 행사하는 거 같다.
그 말 한마디에 윌리엄 4세뿐 아니라 다른 이들 또한 표정이 확 가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또 다른 나폴레옹이 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대영제국의 실세들을 긴장시킬 수 있다니…….
참 대단한 인물이긴 한 모양이다.
“우선 오스만을 충동질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오스만을? 러시아랑 한판 붙어 보라고?”
“네. 폐하.”
“그놈들이 그런다고 러시아랑 붙을까? 미치지 않고서야, 어디…….”
“폐하. 지금 우리 영국의 지원을 받는다고 하면 세계 어느 나라건 간에 기운이 날 겁니다.”
“으음…… 일단 계속해 보게.”
제이미 경은 얼마 전까지 쓰러져 있던 것이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기운찬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의 부관이 세계 지도를 펼쳤다.
아무리 봐도 놀라운 광경이라 할 수 있다.
아직 조선에서는 자기 나라 전도, 즉 대동여지도조차 제작하지 못했던 때인데 이들은 벌써 상당히 정확한 수준에 다다른 세계 지도를 그리고 있다니, 참…….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양이 서양보다 앞서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텐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 알 것도 같다.
‘조선에도 이런 미친놈들이 필요했어.’
의학만 봐도 그렇지 않나.
어떻게 보면 야만의 집합이지만, 뭐가 되었건 간에 결국은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옛 성현의 가르침과 자신의 관찰이 부딪칠 때 관찰을 믿고 우직하게 나아간다는 얘긴데…….
이것은 결국, 인식의 변화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르네상스니 뭐니 하면서 전통을 스스로 박살 낸 이들과 19세기 말에 이를 때까지도 공자 왈 맹자 왈 하고 있던 이들과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겠지.
“여기 있는 티에피영 경과 리스턴 경 덕에 청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하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내 이름이 나와 흠칫 놀랐는데, 아무래도 나쁜 뜻은 아닌 거 같아 조용히 있었다.
오히려 다들 흐뭇한 미소와 함께 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쳐다보지 않는 이들도 많았는데, 분위기를 깰 정도로 많은 숫자는 또 아니었다.
“청이 약화되고, 우리 대영제국이 큰 이득을 취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지만…… 러시아가 그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허어…… 러시아가 저쪽을?”
“네. 그렇습니다. 저기 있는 나라들이…….”
제이미 경은 잠시 내 눈치를 살피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청, 조선, 그리고 저팬이라는 나라들이온데 저쪽은 우리가 지원을 해 준다고 해도 러시아의 남하를 틀어막긴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런가…… 조선은 나름대로 강대국 아닌가?”
“베일에 싸여 있사오나…… 그래서 지원을 받아들일지조차 미지수입니다. 다만 나라 크기가 그리 크지 않다 보니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남하한다면 쉽지 않을 겁니다.”
“그것도 그렇겠군, 그래. 하지만…… 러시아에 저기가 우선순위가 되겠나?”
윌리엄 4세의 말에 제이미 경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것은 나도 동의하는 바다.
조선, 즉 대한민국 입장에서 동북아를 바라보는 시선과 러시아의 시선이 같을 수는 없지 않겠나.
세상의 중심은 이제 중국이 아니라 유럽이고, 지중해는 그곳으로 향하는 관문인 데 반해 동북아는 세상의 변방에 불과하니.
“아니지요. 하지만…… 욕심이 나긴 할 겁니다. 중국이야 여전히 물산이 풍부하지 않습니까. 그쪽에 눈독을 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 그럼……?”
“티에피영이 해 준 말 중에 죽 쒀서 개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꼴이 될 수는 없지요. 오스만을 충동질해서 정신 못 차리게 해야, 우리가 온전히 중국을 뜯어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 뜻이로구만. 묘안일세.”
“전쟁이라도 나면, 프랑스도 러시아의 남하가 달갑지만은 않을 테니 연합을 이루어서 러시아를 두들기면 될 겁니다. 그렇게 이기고 나면 지중해의 이권을 들고 올 수 있을 테죠.”
“오스만도 승전국이 될 텐데 그게 되겠나?”
윌리엄 4세의 말에 제이미 경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뿐 아니라 나머지 인원 중에서도 웃는 놈들이 있었는데 다들 아는 얼굴이었다.
청과의 전쟁, 즉 아편 전쟁의 주역들이었다.
나쁜 놈들이란 뜻이다.
물론 같은 편일 땐 이보다 든든한 놈들도 없다.
적을 악랄하게 뜯어 먹을 테니까.
“처음에는 지겠죠.”
“응? 지원을…….”
“안 하진 않을 겁니다. 싸워 볼 만하겠다, 여기서 영국까지 참전하면 이기겠다, 뭐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는 해야죠.”
“하지만 바로 참전을 안 하는 거구만.”
“네, 그렇습니다. 간당간당해졌을 때 저희가 들어가는 겁니다. 물론 너무 많은 피를 흘리면 안 되니 프랑스를 끌어들이고요. 놈들 또한 지중해 패권이 중요하니 절대 거절하지 못할 겁니다.”
“허어…… 묘안이로구만, 정말로.”
윌리엄 4세가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나도 마찬가지였다.
세계사에서 보면 영국이 또 영국 했다는 말이 있잖아.
과연……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영제국이라기보다는 거의 악의 제국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란 생각까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