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431)
검은 머리 영국 의사-431화(431/505)
431화 급변하는 정세 [2]
오스만 제국.
아쉽게도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유럽 역사에 비해서 뭔가 낯설잖아?
물론 1차 세계 대전에 괜히 참전했다가 갈가리 찢겼다는 건 알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20세기의 일이고, 지금은 19세기다.
‘역사 공부 좀 할걸…….’
아마…….
아편 전쟁이 조금 당겨진 것처럼 이것도 원래 벌어질 전쟁이 조금 당겨진 걸 거다.
어릴 땐, 그러니까 철없이 전쟁놀이나 하고 놀 때는 힘센 놈이 뭔가 뺏을 만한 게 있으면 나는 게 전쟁이라고 생각했지만 크고 보니 그런 게 아니지 않나.
전쟁은 날 만해서 나는 거라고 보면 된다.
특히 19세기는 더더욱 그렇다.
각이 보이고 또 명분이 주어지면 전쟁은 나게 되어 있다.
심지어 대영제국과 프랑스와 같은 놈들이 무제한으로 날뛰는 상황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영프에 오스만이 러시아랑 뭔 전쟁을 했는진 모르겠는데…….’
모르겠지만 러시아가 질 거 같긴 하다.
불곰이니 뭐니 하면서 엄청 셀 거 같지만, 실제로 러시아나 소련이 어디 가서 이긴 적이 거의 없잖아.
이제는 얼마 남지도 않았겠지만, 하여간, 러시아 빠들은 ‘2차 세계 대전에 독소전이 있지 않습니까!’ 하고 외칠 수도 있는데…….
나는 그걸 꼭 이겼다고 볼 수 있는지가 의문이다.
제일 많이 죽었잖아.
심지어 미국이 랜드리스 안 해 줬으면 아무것도 못 했을 거다.
소련에서 생산할 수 있는 건 사람뿐이었으니까.
‘그럼 역시 영국이 이기고 패권을 확 가져오겠구만.’
역사를 몰라도 머리를 잘 굴리면 예상할 수 있다…….
게다가 우리 제이미 경의 말이 엄청 그럴싸했더랬다.
왠지 그렇게 될 거 같아.
정작 전쟁 벌어지는 거까지는 못 볼 거 같긴 한데, 아무튼.
“뭔 생각을 그리하나.”
다른 데가 아니라 진료실에서 이러고 있었다 보니, 리스턴 형님이 내게 물었다.
최근엔 우리가 직접 나서야 하는 일이 점점 줄어서 시간이 났기 때문이다.
뭐, 최근이라기엔 바로 저번 주까지도 엄청 바쁘게 뛰긴 했다.
제이미 경이나 뭐나 뭐가 되었건 생명이 위독한 상황에 이르렀으면 결국 내가 나서긴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응급 출동 시스템도 그렇다.
등급별로 나눠서 내가 직접 가야 하는 상황은 최소화했지만…….
우리 똘똘이들이 용케 가서 심폐소생술을 해서 살려 오면 결국 또 내 몫일 거 아냐.
‘그 경우야 뭐…… 내 몫이라 해도 살릴 수 있을지 어떨지는 진짜 모르겠지만.’
심폐소생술로 딱 살아나는 케이스가 아니라, 이후에 뭔가 더 필요한 것이 있는 케이스라면 사실상 지금 당장은 어쩌기가 어렵다.
“아, 뭐. 아까 제이미 경이 얘기했던 거 생각하고 있죠.”
무튼, 그 생각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뭐가 되었건 우리 리스턴 형님은 내 친우지 않나.
무엇보다 전쟁이 날 예정이라면 더더욱 가까이 둬야 한다.
막말로 일이 심하게 틀어져서 러시아군이 상륙이라도 한다? 리스턴 있으면 전쟁도 이길 수 있을 거다.
“아…… 전쟁 생각을 하고 있었군. 그러면서 그런 표정이라니. 자네는 역시…….”
“제가 어쩌고…… 에이, 그건 아니다.”
나는 실로 음흉해 보이는 미소를 재연해 보이고 있는 리스턴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하여간, 전쟁이 나면 사람들이 엄청 죽어 나가지 않겠어요?”
“그렇겠지. 엄청 죽겠지.”
“저희가 나름 많이 개선하긴 했지만…… 이거 전쟁 통에서는 별 효과가 없을 거예요.”
“그것도 그렇네. 이번에도 느꼈지만 우리가 한 번에 돌볼 수 있는 환자는 고작해야 열 명 이내야. 그것도 사실 많이 쳐준 셈이지.”
“네, 이제 슬슬 군의관들이라도 제대로 된 교육을 하긴 해야겠는데…….”
“군의관들만 해서 되겠나?”
“네?”
“그치들이 그거 얼마나 된다고. 전쟁 막상 나면 징병 돼서 더 늘기야 하겠지만 그래 봐야 대다수의 환자를 돌보는 건 간호사들일걸.”
“그게 그렇게 되나요?”
“그럼, 그렇게 되지.”
전생엔 미처 전쟁을 겪어 보지 못했더랬다.
안타까운 건 아니다.
내가 전공 바보로 살아온 의사긴 한데, 나름 취미로 전쟁 다큐는 좀 봤거든.
그뿐만 아니라 전쟁 영화도 꽤 보고, 드라마도 보고, 소설도 보고, 심지어 인포그래픽 책도 보고 그랬다.
보다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데 그중 가장 강력한 건 ‘아무래도 역시 전쟁은 피하는 것이 최우선이겠구나’이다.
하지만 전쟁이 어디 민초들 뜻대로 된다던가.
높으신 양반들이 전쟁해야겠다고 결심했다면 이미 막을 수 없다.
“청나라랑 붙을 때는 꽤 수월했는데.”
“그거야…… 자네 앞에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동양이 아무래도 좀 과학 발전이 모자라지 않나. 그리고 우리나 수월했지 청나라 쪽은 암담했을 거야.”
“하긴…… 그냥 그대로 수장당한 사람도 많았겠죠. 러시아는 청보다는 좀 나은가?”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당연히 훨씬 세겠지. 이쪽도 꽤 죽어 나갈걸?”
그렇군.
이 시기 러시아는 그래도 꽤 세군.
하긴, 생각해 보니 1차 세계 대전 승전국이긴 하다.
중간에 독일이 푼 독(禿, 대머리 독 : 레닌)에 나라가 뒤집어지면서 아웃 하긴 하지만, 무튼.
‘잉…… 이땐 싸우고 그때는 동맹이야?’
아무리 국제 사회에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지만…….
아, 그렇게 보기엔 프랑스랑 연합한다고 하긴 했다.
세상에 바게뜨 놈들이랑 한편이라니, 어이가 없다.
“내 생각에는 슬슬 자네가 교육에도 나서야 할 거 같긴 해. 아니, 이미 늦은 감이 있네.”
“교육이라…….”
“그래, 교육. 지금 말이 교수지, 자네가 강의를 하나 뭘 하나. 그냥 우리 팀 이끌고 여기저기 떠돌면서 치료만 하고 있지 않나.”
“그렇게 말하니까 되게 한량같이 느껴지는데요? 그러는 형님은요?”
“안 그래도 원장님께 어제 한 소리 들어서 그래. 자네랑 같이 강의 좀 하래. 요청이 쇄도한다는구만그래.”
“으음…… 돈은 되나?”
내 말에 복도에서부터 쿵쾅쿵쾅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원장님이었다.
뭔 야차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돈? 돈이라고 했나? 자네가 받아 가는 월급은 생각 안 해?”
“월급……? 그런 게 있었나?”
“있어! 은행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네! 자네가 워낙 부자라서 티가 안 나는 것일 뿐이야!”
“아…… 받고 있었군요?”
“그래. 그러니 강의를 하게. 강의 안 하는 교수라니…… 그게 말이 되나?”
“말이…… 안 되긴 하죠.”
사실 의과대학 교수들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강의를 무슨 잡일 취급하는 편이긴 했다.
환자 보는 데 워낙 집중하다 보니 벌어지는 일인데, 아무리 그래도 강의를 하긴 했다.
그게 교수의 본분이긴 하니까.
“그러니까 하게.”
“그럼 전쟁 준비도 할 겸 겸사겸사할까.”
“아니, 무슨 강의를 전쟁 준비하는 셈 치고 하나. 대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전쟁이라니.”
“그런 게 있습니다.”
“그런 게 있다고 넘어갈 일이 아니잖나! 우리 집안이 프랑스에서 어떤 꼴을 당하고 도망 온 건지 몰라서 그러나?”
“아, 아아. 맞네. 근데 원장님은 별로 상관없을 거예요. 전쟁터 안 나갈 테니까.”
“그, 그래?”
“근데 저는 나갈 거 같거든요.”
높은 사람은 뒤로 빠진다.
대한민국에서는 상식이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험하고 위험한 일은 아랫것들이 하고 윗분들은 뒷짐 지고 시 짓고 술 먹고 놀았으니.
허나 모든 권리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는 대영제국이 그래도 조선보다는 나아 보인다.
이쪽도 특권 의식이 장난 아니긴 한데, 그만큼 전쟁과 같은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귀족들이 솔선수범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런던 제일의 의사이자 작위까지 받은 내가, 심지어 아직 나이도 젊은 놈이 전쟁을 안 나간다?
“역시 자네야. 안 간다고 해도 내가 끌고 가려고 했네.”
그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심지어 나는 곁에 리스턴이 있어서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
메스가 아니라 칼로 사람 째는 데 더 익숙해 보이는 이 중세 기사와 함께인 이상 군의관으로 복무하는 건 거의 필수라고 보는 게 맞다.
마검 리스턴을 다루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 강의에 원장님도 들어오면 되겠네.”
“나? 아니, 나는…… 이 나이에 무슨 강의를.”
“그래야 우리 없을 때도 돈을 펑펑 아니, 사람들을 살릴 거 아닙니까.”
“지금도 잘 버는데…….”
“더 잘 벌어야지. 사람이 이렇게 배포가 작아서 어디다 씁니까.”
“여기서 더? 그게 가능한……가?”
강의가 귀찮다고 생각할 때는 진짜 세상 귀찮게만 느껴졌는데 막상 하려고 드니까 제법 필요한 일이긴 했다.
원래 더 멀리 가려면 쉬는 시간도 필요한 법 아니겠나.
언제까지고 나 혼자 뭔가 다 하는 것도 무리기도 하고.
아랫것 부리면 된다지만 아랫것도 부릴 준비라는 게 필요하다.
‘하긴…… 레지던트 일 년 차가 뭐 제대로 하나? 펠로우 일 년 차는 뭐 제대로 하고?’
생각해 보니까 우리 교수님들이 우리에게 아낌없이 가르침을 베풀어 주신 이유가 다 있었다.
잘 부려 먹으려고…….
정말이지 나는 전생에 열심히, 알차게 배운 거 같다.
“더 벌 수 있죠. 의료 산업이 앞으로 얼마나 유망할 텐데.”
“그, 그런가…… 하긴, 자네라면…… 그렇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자면 혼자서는 안 됩니다. 우수한 놈들을 많이 만들어서 부려야지.”
“부린다니…… 다 귀한 돈 내고 오는 학생들인데.”
“그리 귀하게 여겨서 이 뽑고 그랬어요?”
“의학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게다가 지금은 의료 산업이라는 말 자체가 없다시피 한 시대 아닌가.
그럴 수밖에 없다.
병원이라는 곳이 심심하면 사람 죽어 나가는 곳인데 뭔 놈의 산업인가, 산업은.
치료하려는 사람도 받으려는 사람도 다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오게 되는 곳이 바로 지금 시대의 병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뭐…….
21세기 관점에서 보자면 도긴개긴 수준의 병원이 되겠지만, 여기서는 기적이라는 말로도 모자랄 만큼의 일은 해낼 수 있다, 이 말이다.
“아무튼, 그 교육이라는 거 좋습니다. 해 봅시다.”
“그렇게 말하니까 또 괜한 일을 시키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니, 교육자가 교육하는 게 당연하지. 강의 싹 잡아요. 그리고 간호사들도 다 오라고 해요. 전쟁 준비해야지.”
“전쟁…… 그거 나중에 자세히 좀 말해 주게.”
“안 됩니다, 국가 기밀이라, 그건.”
“그럼 아예 얘기를 꺼내지 말든가!”
“어허…… 소리를 질러? 귀족 앞에서 버릇이 없군요.”
“리스턴…… 이 친구 좀 어떻게 해 주게.”
원장님은 처음 들어올 때와는 달리 풀이 죽은 얼굴이 되어 밖으로 향했다.
리스턴이야 이럴 때의 나를 말리는 건 별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냥 협조하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럼 나는 뭘 하면 되나.”
“팔다리 자르는 강의 해야죠.”
“그건 늘 하던 강의인데?”
“남는 시간엔 제 강의 들어와야죠.”
“하하, 나도 명색이 교순데.”
“원장님도 들어와야 하는데 교수가 대수인가. 모르면 배워야지.”
“하아…… 원장님 말씀대로 할까?”
중간에 좀 싸늘한 순간도 있긴 했지만, 접신 흉내를 내고 나서부터는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