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434)
검은 머리 영국 의사-434화(434/505)
434화 제대로 된 강의 [3]
“사람을 살리기 위한 원칙입니다. 제일 먼저 살펴야 할 것을 써 둔 것이죠.”
나는 일부러 강단 위를 휘적거리면서 걸었다.
뭐 그리 어려운 내용도 아니거니와 이거 준비하느라 지난 며칠간 워낙 고생을 하기도 했기 때문에 머릿속에 할 말이 착착 쌓여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 시대에 와서 나는…….
그래, 인싸가 되지 않았던가.
사람들 앞에서 떠드는 일에 이토록 익숙해질 줄은 꿈에도 몰랐더랬다.
“먼저 질문부터 드리겠습니다. 혹시…… 아, 그래. 거기. 뭘 먼저 봐야 할 거 같습니까?”
자유롭게 다니다가 눈에 띄는 이에게 물었다.
어차피 제대로 된 답이 돌아올 거란 기대 따위는 없다 보니 이렇게 마음이 자유로울 수가 없다.
허나 표정만큼은 심드렁하게 있을 수 없기에 일단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아는 얼굴은 아닌데,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현직 의사긴 할 거 같았다.
이 시대는 아직 제대로 된 커리큘럼이 없어서 입학 나이도 중구난방이거니와 졸업도 그냥 막 마음 내키는 대로 시켜 줘서 대개 어리거든.
애초에 평균 수명이 높을 수 없는 시대이기도 하기 때문에, 교육에 너무 열을 올리다 보면 정작 써먹을 수 있는 시간이 팍 줄어들기 때문이기도 할 거다.
“아…… 그…… 일단 죽었는지, 살았는지…….”
하여간, 현직 의사의 입에서 21세기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말이 튀어나왔다.
세상에 환자 보는 데 있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뭐냐고 했더니 저런 대답이 나올 줄이야.
기대를 안 하고 있던 것과는 별개로 좀 놀랬다.
예상을 너무 빗나가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내가 누군가.
구라 마스터 김태평이다.
그저 떠오르는 대로 지어내야 하는 구라도 잘 치는 사람이 사실에 기반한 떠들기를 못할 리가 있나.
“그래, 좋아. 그럼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판별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뭡니까?”
“어…… 숨?”
“그래, 맞아요. 숨입니다. 그럼 그 숨을 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뭐죠?”
“어…….”
마치 미리 합을 맞춰 본 것처럼 나는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정리한 후 다시 ABC가 적혀 있는 천 앞에 섰다.
그사이 여기저기에서 내 질문에 대한 답을 떠들고 있었지만 딱히 맞는 말은 없었다.
그저 공허한 외침들일 뿐이었다.
기대가 없다는 것이 이럴 때 도움이 된다.
상처받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여기 A가 바로 Airway…… 기도를 뜻합니다. 환자를 볼 때, 이 사람의 기도가 제대로 확보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죠. 사람의 기도는 생각보다 쉽게 막히거든요. 여러분이 좋아하는 장어 젤리로 인한 질식사가 이곳 런던에서만 1년에 몇 건씩 보고 될 정도예요.”
하지만 영국 음식은 매번 기대를 하나도 안 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상처가 된다.
그건 아마도 상대가 악의를 가지고 음식을 만들고 있기 때문일 거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는 말을 한다면…….
지금 당장 런던 날아가서 버거킹이나 맥도날드 같은 아무 버거집에 가서 한번 먹어 봐라.
놀랍게도 같은 치즈버거인데 런던에서 먹으면 맛이 없다.
심지어 아는 사람이 지브롤터에 놀러 갔다가 해 준 얘기인데, 지브롤터는 스페인 남단에 있는 영국령이니 스페인의 음식 맛을 생각하면 당연히 썩 맛있어야 할 텐데 다 맛대가리가 없다더라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19세기 영국 음식에 비할 바는 아니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새끼들 세계 경영이니 뭐니 한 게 프랑스 음식처럼 맛있는 거 지들도 먹고 싶어 그런 거 같다.
특히 지금 내가 말한 장어 젤리는…….
진짜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걸 만든 놈도 제정신은 아닌 거 같은데 먹는 놈들이야말로 진짜 광기라는 게 내 생각이다.
심지어 먹다 죽는 사람들이 나오는데도 먹는다.
보양식이니 뭐니 하면서…….
세상에 먹다 뒈지는 보양식이 어딨나.
“거기에 더해 고개만 살짝 꺾어도 사실 숨쉬기가 어려워지죠. 지금 해 보시죠.”
영국 음식 얘기라면 선 자리에서 몇 시간이고 더 떠들어 댈 수 있는데, 지금은 그럴 시간이 아니니 일단 고개부터 숙였다.
건강한 성인이라면 고개를 숙인다고 해서 바로 숨이 캑캑 막히고 하진 않는다.
하지만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좌측이 됐건 우측이 됐건 간에 돌리기까지 하잖아?
그럼 좀 답답해진다.
“어우.”
“캑.”
‘어우’까지는 이해가 가는데 ‘캑’은 좀 심하다 싶어서 보니 그냥 목이 좀 튀어나와 있는 노신사가 눈에 들어왔다.
‘성대 마비라도 있나……?’
좋지 않은 사인이다.
그냥 그런 사람이면 어찌 되든지 말든지 두겠는데…….
이 자리에 와 있다는 것은 뭐가 되었건 영국에 있어 중요한 사람이라는 거다.
나중에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눈도장을 찍어 두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이렇게 되어 있으면 어째야겠습니까? 일단 기도를 정렬시켜야겠죠. 기본적인 해부학 정도는 이제 교양이 된 시대이니만큼 너무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진 않을 텐데…… 혹 모르겠다, 내가 시대에 뒤처지고 있다 싶으면 정확히 다음 주에 이 자리에서 저와 리스턴 경이 주최하는 해체 아니, 해부쇼가 있으니 한번 오세요. 아무튼, 기도를 정렬하려면 딱 이렇게 하면 됩니다. 콜린.”
내 말에 콜린이 내 앞에 미리 가져다 둔 해부용 탁자 위에 털썩 누웠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진짜 시신이 있던 곳이라 찜찜할 수도 있겠는데 별 망설임이 없다.
앨프리드와 비교가 된다.
선배라는 인간이 어? 운동 좀 하라고 했다고 그렇게…….
얘는 인종 차별주의자였다가 회심해서 이렇게까지 하는데 말이다.
“자, 보이시죠?”
아무튼, 나는 콜린의 목을 살짝 뒤로 젖혀 기도가 일직선이 되는 모양새를 만들어 보여 주었다.
“이렇게 기도를 확보하고 나서 또 확인 할 것이 있죠. 바로 숨을 제대로 쉬는지 여부입니다.”
“아…….”
“기도를 확보하지 않고 확인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숨을 쉴 만한 길이 없는데 숨을 쉬겠습니까? 의식이 있는 환자라면야 알아서 하겠지만 아닌 환자들은 반드시 우리가 확보해 주고 확인해야 합니다. 무튼, 어떻게 확인하면 되겠습니까.”
“그…… 코나 입에 손을?”
사실 정답이다.
일반인 수준에서는 21세기에도 저렇게 한다.
하지만 우린 의료인이지 않나?
21세기에 의사를 그려 보라고 하면 어떤 모습을 그리나.
일단 가운 입고, 안에는 양복이나 수술복을 입고 어깨에는 뭔가 걸친다.
뭘 걸치나?
바로 청진기다.
“우린 의사이기 전에 과학자입니다. 그것도…… 네? 19세기입니다, 19세기. 대체 언제까지…… 손? 하이고.”
손 쓸 수 있다.
좋은 도구다.
21세기에도 손을 대체할 만한 것은 없어.
하지만 후후, 청진기가 더 좋다.
게다가 중요한 건 있어 보인다는 거다.
손으로 하는 거보다야 뭐,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나.
“자, 이게 청진기입니다. 이걸 가슴에 대고 숨 쉴 때 들으면 폐 소리가 고스란히 들립니다.”
사실 거짓말이다.
고스란히 들리진 않는다.
하지만 확실히 그냥 귀를 대고 듣는 것에 비해서는 훨씬 잘 들린다.
청진기 자체가 귀를 모방해서 만든 물건이니만큼 소리를 확 증폭시켜 주거든.
그렇기에 아쉬운 것도 21세기 청진기를 쓰던 내 입장에서이고, 없다 있게 된 놈들에게는 그저 신세계일 뿐이다.
블런델을 시켜서 영업을 해 놨더니 요새는 장의사들도 쓴다고 들었다.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는 데 있어 청진기만큼 좋은 게 없다고 하면서, 말이다.
“오…….”
“오늘 오신 분들에 한해 특별 프로모션을 진행합니다. 이따 강의 끝나면 저 뒤에서 사 가실 수 있으니 참고 하시고. 아무튼, 이렇게 숨을 확인 했으면 다음은 뭐가 있을까요?”
“으음…….”
질문을 던질 때마다 당황하는 꼴을 보는 것도 퍽 재밌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모인 이들이 그래도 꽤 배운 사람들인데도 이렇다니, 참…….
대한민국이었으면 군대에서 배우는 지식이지 않나.
그뿐만이 아니라 전역해서도 6년 동안이나 예비군이라고 매년 불러다가 이런 거 가르치고 그런다.
좋았다는 뜻은 아니다.
멀쩡히 생업 있는 사람들 붙잡아 놓고 일당 만 원도 안 쳐 주고 예비군으로서 당당히 자부심을 가지라고 하는 걸 좋아하면 그건 좀 이상한 일 같으니.
“심장이 뛰는지 봐야죠. 청진기가 없는 상황이라면 여기. 경동맥을 짚습니다. 만약 잘 모르겠다, 그러면 사타구니 사이를…… 콜린.”
“네…….”
내 말에 누워 있던 콜린이 바지를 살짝 내렸다.
명색이 귀족가의 자제인데 수백 명의 관중 앞에서 이런 일까지 할 수 있다는 게 참 대견하다.
확실히 의학의 진보에 목숨을 걸었다는 생각이 든달까.
“여기에 허벅동맥이 있는데 굵기가 거의 엄지손가락만 한 혈관이니만큼, 어지간히 맥이 약해진 상황이라 해도 여길 짚으면 맥박이 느껴질 겁니다. 물론 청진기가 있으면 심장 뛰는 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겠지만, 뛴다고 해서 무조건 피가 전신을 돌고 있는 것은 아니니 무조건 짚어 봐야 합니다.”
그 노력에 부응하기 위해 나는 열변을 토해 ABC의 기본적인 개념을 완성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폐로 숨을 쉬고, 심장이 뜀으로써 피가 돈다는 것 정도는 이미 다들 알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었으면 이보다 훨씬 기초적인 강의를 했어야 했을 텐데…….
아무튼, 나는 그렇게 ABC 강의를 마친 후 다음 장으로 넘겼다.
다음 천에는 ‘TRAUMA’라고 써 놓았다.
‘내과적인 치료는…… 아직 어불성설이야.’
아쉽지만 감기, 독감, 폐렴 등과 같은 감염 질환을 치료하는 건 지금 시점에서는 거의 꿈에 가까운 일이다.
맞서 싸울 수 있는 항생제도 없고 항바이러스제도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고혈압이나 당뇨, 고지혈하고 싸우나?
당뇨 말고는 아직 그게 병인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리고 당뇨는 이미 우리 센터에서 독점 치료한 지 꽤 되어 놔서 굳이 여기서 가르칠 일은 아니다.
‘외과에 집중한다…….’
사혈 같은 거 교정해야 하긴 하는데…….
그게 진짜 쉽지 않은 일이지 않나.
애초에 내가 하는 치료까지 다 사혈의 일환으로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세상에 뇌출혈 환자 기껏 수술해 놨더니 두개골 사혈이라고 하면서 따라 하는 놈들이 있지 뭔가.
런던이야 우리가 꽉 잡고 있으니 여기서는 그런 불상사가 없었지만 소문은 전화가 없는 세상에서도 발 빠르게 번지는 법이라, 프랑스 파리에서는 벌써 두개골 사혈 센터가 성행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 게 원 역사에도 있었다면 프랑스가 절대로 영국과 더불어 강대국이 되진 못했을 테니…… 내 존재가 꼭 의학을 순방향으로만 발전시키고 있진 않은 거 같단 생각이 든다.
‘푸 만추 대신 김태평이 될 수 있어, 진짜로.’
나는 그 위기감을 간신히 떨쳐내고 말을 이었다.
“자, 그럼 다친 환자가 왔을 땐 뭐부터 해야 할까?”
역사 속 인물에게는 누구나 공과가 있는 법이다.
나 같은 경우엔 공만 있고 과라는 것은 다 억울하게 들러붙은 것이지만…….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면 다소간의 조작과 더 많은 공으로 덮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