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440)
검은 머리 영국 의사-440화(440/505)
440화 나이팅게일 [5]
정말로 몰랐다.
나이팅게일 여사가 이렇게 부잣집 영애였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 태어난 곳이 이탈리아?”
“네, 저희 부모님께서 신혼여행으로 유럽 여행을 갔다 오셔서.”
신혼여행을 유럽으로 갔는데 왜 이탈리아에서 태어나나?
보통 신혼여행은 일 주, 길어야 이 주 컷 아닌가?
뭐 이런 생각을 하다가, 아, 19세기는 좀 다른가 싶어졌다가, 이내 헷갈려졌다.
아무리 19세기가 산업 혁명으로 인해 이전 시대에 비해 더 부유해졌다고는 한들, 신혼여행이 일반적이진 않아서 그랬다.
애초에 여행을 갈 수 있는 계급이 별로 없다.
일단 가게 되면 21세기와는 달리 오래 가야 하는데, 가서 쓸 돈도 돈이지만 그렇게 오래 일을 안 해도 되는 계급이 예나 지금이나 귀족 말고 달리 있겠나.
또 귀족이라고 해서 마냥 놀아도 되는 놈들이냐고 하면 그것도 절대 아니었다.
‘힘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
일단 백작 이상 되는 인간들은 공사가 다망한 나머지 런던을 뜨기도 어렵다.
뭐 런던 근교에 별장 지어 놓고 충분히 즐기면서 사는 편이고 또 뭔 일 나면 프랑스 파리 정도는 가긴 하지만, 그것도 다 공무의 일환으로 가는 거다.
마냥 놀러 가면 욕 먹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내가 요즘 들어서는 나름 런던의 실세로 통하게 되지 않았나.
그렇다 보니 여기저기서 들려주는 얘기도 있고 해서 고위층 돌아가는 꼴을 잘 알게 되었다 보니 더더욱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고 있었다.
나이팅게일 또한 이런 반응이 처음은 아닌지 겸연쩍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 여행을 3년간 다녀서요. 언니랑 저랑 그 여행 중에 태어났어요.”
“허. 신혼여행을 3년간?”
“네.”
“엄청 부자구나, 진짜.”
“그…… 뭐, 나름대로 부자죠. 그런데 교수님도 부자 아닌가요?”
“나야 이제 버는 거지, 하하.”
역시 부를 쌓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속이 아닌가 싶다.
자수성가는 쉽지 않다, 정말로.
인생…….
참…….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나이팅게일이 뭔가 느끼는 바가 있는지 부지런히 입을 놀렸다.
“하지만 저는 부모님 후광에 기댈 생각은 없어요.”
요약하면 금수저인 거 인정하지만 독립적인 사람으로 행동할 거다, 딱 이거였다.
뭐…….
유별나긴 해도 처음 보는 유형의 인간은 결코 아니었다.
내가 하필 태화 의료원 출신이지 않나.
대한민국 최고의 병원인 동시에 세계 굴지의 대기업으로 발돋움한 태화 그룹이 사회 환원 목적 및 일가, 임원들의 원활한 진료를 위해 운영하는 병원인 만큼, 당연하게도 교수들 중에도 그룹 인사들이 꽤 있었다.
교수뿐만 아니라 레지던트 중에도 많지는 않아도 알알이 낑겨 들어가 있었는데 걔네들 말이 어디서 배웠는지 되게 비슷한 면이 있었다.
-맞아, 우리 아빠가 전자 사장이셔. 근데 난 아직 물려 받은 것도 없고 (파X 필립을 쩔렁이며) 그럴 생각도 없어.
-응, 진짜야. 나는 오로지 내 노력만으로 (벤X 키를 내려놓으며)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진짜 지랄이 난당이라는 생각만 들었더랬다.
뭐, 의대 교수라는 게 생각보다는 실력 위주로 뽑히는 자리긴 했다.
다른 과들과 비교하는 건 미안할 정도로 공정한 자리긴 하다는 거다.
왜?
일단 의대는 유학파라는 게 있을 수가 없다.
국비 지원 유학이라는 제도도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난한 이들이 유학을 갈 수가 있나?
생각보다 사람은 먹고 자고 싸는 데 드는 돈이 많은 법인데 우리가 유학이라는 걸 갈 만큼 잘 사는 나라에서는 그러한 돈이 훨씬 더 많이 들지 않겠나.
학비야 어찌어찌 해결이 된다 한들 그 외에 생활비는 스스로 벌거나 지원을 받아야 한다.
‘스스로 생활비 버는 건…… 아름답게 들리는 일이지. 하지만…….’
나도 예과 때랑 본1, 2 때까지 과외 뛰어서 내 생활비 충당했거든?
어디 가서 얘기할 때야 당연히 자랑스럽게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대단히 힘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빡센 의대 생활에 따로 시간을 떼어 내어 과외까지 한다는 건 고통스럽기까지 한 일이었다.
헌데 유학생은 과외도 못 하지 않겠나?
아무래도 위인급 인사가 아니면 어지간히 사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게 유학이라는 거다.
‘그게 없는 의대도 공평치는 않았지…….’
교수, 교수하는 것도 옛말이라는 말도 있긴 하다.
특히 의사는 이제 전문의 안 따고 나가서 미용하는 게 최적의 루트 아닌가 하는 논의가 일기 시작한 대한민국에서는 더더욱 그런 말이 돌았다.
배금주의가 판을 치기 시작한 무렵이다 보니 브레이크가 없었는데, 원래 명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길을 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법이다.
‘저 사람은 돈이 아니라 다른 것을 선택했구나!’라는 찬사가 터진다는 말이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의대에서 교수하는 애들은 점점 부잣집 애들로 가득 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말은 곧 딱히 돈을 내가 벌 필요가 없는 애들이 교수를 한다, 이 말이었다.
‘뭐…… 뭐라고 할 일은 아니지?’
원래 사람은 자기가 이미 가진 것에 대해서는 감흥이 없게 되는 법 아닌가.
게다가 나는 전생의 내가 아니다.
지금의 나는 그때 내 앞에서 깝죽거리던 친구들보다 더 가졌으면 더 가졌지 결코 못 하진 않다.
해서 나는 나이팅게일을 훈계하는 대신 격려했다.
‘어차피 기부금도 받았고…… 앞으로 더 받을 수 있을 거 같기도 하고.’
어린 마음에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뛰어 주면 나는 고마울 뿐이다.
사고 칠 것을 기대하고 또 혼낼 것을 기대하는 건 아니다.
눈앞의 아이는 어릴지언정, 그 이름을 역사에 길이길이 남긴 위인 아닌가.
방향성만 잘 조정해 주면 이보다 든든한 아군도 없을 터였다.
“그래, 나는 응원한다. 잘할 거 같아.”
“감사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간호부장직을 맡아 줬으면 하는데?”
“네? 그건 특혜…… 아닌가요? 설마 청탁이 있었습니까?”
철부지 부잣집 아이답게 청탁에 예민하게 구는 것도 귀엽게 보일 정도다.
생각해 보면…….
어?
기부한 돈이 얼만데 이 정도도 못 해 주겠나.
하지만 그런 어른들의 사정을 이해하기엔 나이팅게일이 너무 순수하다.
아마 이 부분만큼은 나이가 든다고 한들 딱히 변하거나 하진 않을 거 같다.
그러니 목숨을 걸고서, 이런 부잣집 딸내미가 전쟁터에 뛰어들었지.
심지어 멀쩡히 돌아온 것도 아니고 남은 평생을 그 후유증으로 인해 누워 지내야 했다는 걸 알고 있는 나로서는 딱히 뭐라 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있나.”
“근데 저처럼 어린 신참에게…….”
“우리끼리 하는 말인데 지금 있는 간호사들은 정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야.”
“네? 아…… 뭐……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긴 하군요. 하지만 이 병원은…….”
“그래, 내가 있는 병원이지. 그럼에도 역부족이었네. 의사들을 가르치는 것도 힘들었다는 말이야. 그 와중에 내 어찌 간호사들까지 신경 쓸 여력이 있었겠나.”
이건 진심이었다.
간호사 아니라 사실 우리 부하들 말고 다른 의사들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사방에 피할 수 있는 죽음으로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가득한데 제대로 된 의사인 내가 어찌 정신이 있었겠나.
사실 지금이라고 해서 딱히 상황이 많이 바뀐 것은 아니긴 하다.
바뀐 것이 있다면 나다.
어지간한 것은 그러려니 하고 있다.
나 혼자 다 바꾸려고 하다간 내가 죽을 게 뻔하지 않겠나.
물론 이제 어느 정도 힘이 있긴 한데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바꾸려고 하는 건 안 될 일이다.
‘그런 짓 하다가 마오쩌둥 되고, 히틀러 되고, 스탈린 되고, 폴 포트 되고 그러는 거지…….’
물론 저들은 방향도 틀렸다는 게 차이겠지만, 지금 시대를 기준으로 보면 틀린 것은 나지 대중이 아니지 않나.
“그렇군요…… 그럼 저는.”
“다 바꿔야지. 선조치 후보고도 되니까 어떻게든 바꾸게나.”
“어떻게든이요……?”
해서 조금 뒤로 숨기로 했다.
나이팅게일은 좀 거칠긴 해도 결국은 위인으로 남은 사람이니 내가 충동질을 한다 한들 악인으로 남을 거 같진 않잖아?
병동은 네게 맡기겠다, 나이팅게일.
출동이다.
“그래, 어떻게든. 무슨 수단과 방법을 써도 좋으니.”
“후…… 알겠습니다. 이 정도로 결연한 뜻을 가지고 계신지는 저도 미처 몰랐습니다.”
“음.”
내 착각일까.
눈에 흐르는 광기와 더불어 어떤 기가 일렁이기 시작한 것은.
혹시 몰라 옆에 있던 리스턴을 돌아보니, 형님은 알 듯 말 듯 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딱 한 번 본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바로 링컨, 미래의 미합중국 대통령이자 현 레슬링 챔피언…….
그리고 리스턴이 먼저 승부를 내 보자고 제안했던, 유일한 강자를 마주했을 때의 그 얼굴이었다.
‘이거 혹시 내가 실수라도 한 건 아닐까?’
병동에 호랑이 한 마리 푼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리 나라고 한들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위인을 상대로 오락가락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겠나.
무엇보다…….
‘저분이 괜히 얘를 보낸 건 아니겠지.’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가 늘 의지하고 따르는 신에 대해 묵상했다.
그래, 세상에 내 의지가 어딨나.
다 저분 뜻이지.
그 말은 곧 내 책임은 하나도 없다는 얘기다.
이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부족했던 신앙심이 풀충전이 되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과연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의 짐을 대신 들어 주시는 주님이시다.
“아멘.”
“갑자기?”
“참된 신앙인은 길 가다가도 주님을 떠올리는 법이죠.”
“뭐…… 그래, 그게 낫지. 요새 참람한 얘기가 떠도는데 그놈들에게 자네를 보여 주고 싶구만그래.”
“참람한 얘기요?”
“그래, 아주…… 허어…… 신자로는 감히 입에 담기도 어려울 말들이 오가고 있네.”
해서 나는 나이팅게일을 보내고 불편한 마음을 덜어 내기 위해 산책을 하다 말고 하늘을 향해 아멘을 외쳤고, 리스턴은 그런 나를 보고 감탄하다가 말고 갑자기 시대를 탓하기 시작했다.
보통 나이가 들면 사람이 이러는 법인데 아직 장가도 안 간 사람이 이러니 좀 걱정이 되었다.
또 대체 뭔 일이길래 이 사람이 이러나 싶기도 했다.
보통은 한탄하는 대신 가서 쥐어패는 사람이거든.
“뭔 말인데요.”
“진화론이라고 들어 본 적 있나?”
“잉.”
해서 물어봤더니 상상도 못 했던 단어가 나왔다.
‘이상하네? 종의 기원은…… 19세기 중후반에 나온 책 아닌가……?’
이상해서 다시 한번 기억을 점검했지만 내 기억은 온전한 듯했다.
이건 대놓고 자랑인데, 내가 전생에도 태화 의과 대학을 나온 수재이지 않나.
기억력이 보통 이상으로 좋지 못하면 가뜩이나 경쟁률 치열한 한국에서 의대 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뭐 다방면으로 관심을 두진 못해서 아는 게 많은 건 아니지만, 시험과 관계되어 있는 지식은 비교적 정확하게 알고 있다, 이 말이다.
“자네도 대강 들어 본 듯하구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가세.”
“어딜요.”
“오늘 다윈인지 하는 놈이 귀국한다더구만. 대놓고 진화론을 떠들지는 않았다지만, 그놈이 충동질했다는 걸 모르는 놈이 없지.”
“어어.”
갑자기, 다윈?
새삼스레 19세기 영국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이 이토록 많을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