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448)
검은 머리 영국 의사-448화(448/505)
448화 다윈 [4]
사실 ‘가슴 열어 볼까’라는 말에 일말의 아쉬움이 남기는 한다.
하지만 개흉 수술은…….
21세기에도 되게 부담되는 수술이다.
괜히 흉부외과가 비인기과로 전락하고 있는 게 아니야.
뭐 외상외과 전공한 내가 그게 무섭다거나 하다는 건 아닌데, 그래도 사람 마음이 펄떡 뛰는 심장은…….
어? 경이롭긴 해도 그걸 굳이 직접 보고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법 아니겠나.
‘대부분은 심혈관 중재 시술로 해결하고 있지.’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니고 그냥 인류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의외로 심장 수술이 발전하던 것보다 오히려 더 먼저 심혈관 중재 시술에 대한 개념이 잡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새 심근경색이나 판막 망가졌다고 하면 우선 허벅지 동맥 따라 관 넣고 뭔가 할 수 있는지 보잖아.
그게 심혈관 중재 시술이다.
당연히 개흉 수술은 점점 줄고 있다.
흉부외과 전문의 따 봐야 갈 데가 없다는 얘기가 나오는 게 수가가 너무 낮아서 적자가 나니까 병원에서 안 뽑아줘서 그런 것도 있지만 내과에서 그 파이를 뺏어 간 탓도 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직까지는 개흉이 필요한 케이스가 있긴 해서 아예 없으면 환자가 죽게 되는 불상사가 벌어지지만…….
“후우, 주님.”
21세기도 아닌 19세기에 사람 심장을 열면 죽을 게 뻔하지 않겠나.
흉부외과?
그 잘사는 대한민국에서도 잘 못 키워 내는 걸 내가 왜 여기서 하나.
게다가 다윈은 일단 책 쓰고 죽는 게 확실하고, 여러 가지 정황상 심장 문제는 아직 없어 보인다.
뭐, 이런 치료를 계속 받다 보면 없던 문제도 생기기야 할 텐데…….
그걸 막기 위해 여기 온 것이니 나는 그 목적에 집중하기로 했다.
“주님?”
“있어 보게. 우리 닥터 평은 주님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니까.”
“아니…… 뭔…… 미친 소리를.”
다윈 앞에서 이러는 거 나도 좀 민망하다.
어지간히 믿음이 있는 사람 앞에서 해야 그럴싸하지 이게…….
어?
사실 19세기쯤 되잖아?
조선에서도 괴력난신을 진지하게 믿는 유학자는 거의 없다.
원래 뭔가 자꾸 배우면 초자연적인 믿음에 대해 회의감이 어리는 법이거든.
애초에 그럴 거라는 걸 알았는지 성경에도 남들이 미쳤다고 수군대지 않겠느냐라는 말씀이 있긴 한데, 아무튼, 나는 이러한 잡생각을 뒤로하고 꾸준히 말을 이어 나갔다.
“이자의 흉통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이온지요. 주님의 종이…… 어어.”
그 말은 곧 기도하다가 자연스레 접신의 영역으로 넘어간다는 뜻이었다.
수술도 그런데, 원래 뭐든 하다 보면 느는 법이다 보니 이제 꽤 그럴싸하게 할 수 있게 된 지 오래였다.
“어, 어 오셨다.”
“아니…….”
“이놈! 불경하게!”
“그…….”
거기에 더해 리스턴이라는 아주 훌륭한 조수가 있다 보니 더더욱 잘할 수 있었다.
상대가 감명을 받았건 안 받았건 간에 겉으로는 그런 척이라도 해야 살아날 수 있거든.
다윈도 똑똑한 사람이다 보니 리스턴의 휙 돌아간 눈과 이리저리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니는 나를 보면서 살길을 딱 찾았다.
“주님…….”
“그래!”
그래, 뭐 독립운동하냐?
아니면 조선 시대 성리학자라도 돼?
그게 아니면 살기 위해 뭐든 할 수 있는 게 인간이다.
그렇게 다윈이 꿇어 엎드리는 동안 사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폐도 아니고 심장도 아닌데 발생할 수 있는 흉통이라…….’
그다음 올 수 있는 건 당연히 근막염 같은 건데, 그건 아닌 거 같다.
갈비뼈 사이의 빗근이 아파야 할 텐데 거긴 운동으로 단련하거나 무리할 수 있는 곳도 아니거든.
기침 심하게 하다 보면 아플 수 있는 곳이긴 한데…….
얘는 전기가 흐를 때도 신음이나 흘렸지 기침은 안 했다.
‘다음으로는…… 아. 설마……?’
의학적으로는 답이 없는 거 같아서 그냥 사기나 칠까 했는데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내 개인적인 경험인데…….
부끄럽지만 예과 때 차인 적이 있다.
고백으로 혼내 주거나 했던 것은 아니다.
짝사랑으로는 아무래도 깊이 사랑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혹시 모욕으로 느낄 사람도 있을 텐데, 진짜다.
사랑은 서로 하는 거야.
‘그때…… 헤어졌을 때 진짜 가슴이 아팠지.’
새삼 다윈을 보니 이 새끼 딱히 연애해 봤을 거 같지가 않다.
애초에 어린 나이에 대학 들어가기도 했고…….
전공도 신학이잖아?
물론 정식으로 뭐가 된 건 아니고 반 취미로 배운 것이겠지만, 그래도 거기 다니면서 난잡하게 굴 수는 없는 법이다.
그다음?
다음엔 배를 탔잖아.
‘옳거니.’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슥 훑다 보니 여기저기 구겨진 편지가 버려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책 쓰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 몰골이…… 아무리 다윈이라고 해도 지적인 활동과는 연결 짓기가 어려워 보인다.
“사랑하고 있구나.”
게다가 다윈은 이제 팔팔한 20대.
그것도 5년간 배 타느라 강제로 아무도 만나지 못했던 상태다.
군대 훈련소 그거 몇 달만 들어가도 다 이뻐 보이는데 5년이라니…….
그것도 거칠기 짝이 없는 바다를 넘나들며 뱃사람들이랑…….
항구에서 본 아무 여성에게나 꽂혔다는 데 100파운드쯤 걸 수 있을 거 같다.
“어…….”
“오, 이번에도?”
아니면?
아니면 리스턴한테 리셋시켜 달라고 하면 된다.
뒤통수 후려갈기고 기절한 거 깨운 다음에 아까 했던 말 기억하냐고 묻는 거 몇 번 반복하면 못 한다고 하더라고.
약간 환상통 치료하는 느낌이랑 비슷하긴 한데 아무튼, 100% 통하는 방법이니 가끔 써먹긴 좋다.
“그래, 사랑하고 있는데…… 안 되는구만.”
“아니, 그걸 어떻게. 주님? 주님이에요?”
이제 보니 이 새끼 수염도 제대로 못 깎고 폐인처럼 하고 있다.
뭐 매일 전기 맞고 피 빼고 하면 멀쩡한 사람도 폐인이 될 거 같긴 한데…….
뒤에 보니까 임시 욕탕도 만들어져 있는데 거기에 너무나 수상해 보이는 전선이 드리워져 있는 걸 보면 벨트만 차는 게 아니라 수치료도 하던 모양이다.
수치료라고 하면 어쩐지 자연 치료 느낌이 나겠지만 19세기는 묘하게 과학에 집착하는 시대다.
전기를 물에 흘려서 맞는 걸 수치료라고 한다.
그런 치료를 반복해서 그럴까?
“이제 가셨네.”
“아. 아아…….”
확실히 전에 봤을 때랑 비교해서 애가 좀…….
이 시대에는 어쩌면 오래 살고 싶으면 그냥 배나 타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다.
야생의 치료사들도 그렇거니와 아직 나와 리스턴의 힘이 닿지 않는 지방 의사들은 될 수 있으면 안 만나는 게 득인 거 같거든.
돌팔이인 거 다 아는데 안 만나면 되는 거 아니냐고?
시대 분위기라는 거…….
그리고 소위 전문가라는 이들의 권위를 너무 무시하면 안 된다.
당장 21세기에도 병원에서 의사가 a, b, c 치료법 늘어놓고 ‘c로 해도 되는데 a가 좋긴 하죠? 엄청 비싸지만?’ 하면 a 택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2000년대부터 유행해서 진짜 고가의 돈을 받고 행하고 있는 로봇수술도 대부분의 경우에서는 딱히 필요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인데, 엄청 잘되잖아?
거기서 번 돈으로 몇몇 센터들이 진짜 세계 최고의 센터들로 탈바꿈하고 있는 걸 보면 또 마냥 비난할 만한 일도 아닌 거 같기도 하다.
“하여간 사랑하고 있구만. 이걸 조선에서는 상사병이라고 하지.”
“상사병……?”
“혹 가슴…… 여기가 미어지고 그러지 않나?”
“아, 네! 확실히 그럽니다. 어떻게 제가 말씀드리지도 않았는데…….”
하여간 나는 다윈에게 설명하다 말고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자 다윈은 두 눈을 감고 손을 모아 감사하다는 기도를 올렸다.
‘이거 이러다가 진화론 없는 세계가 열리는 거 아냐?’
잠깐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딱히 그럴 거 같진 않았다.
개인의 체험이라는 건 정말 얄팍하기 그지 없는 것이지 않은가.
아니, 인간 자체가 그렇다.
건져 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는 말이 괜히 있겠어?
외상외과로 일하면서 숱한 사람을 살려온 나지만, 그들이 내내 의사들에게 호의적일 거란 기대는 안 했다.
원래 사람들은 의사 싫어하잖아.
비단 대한민국만의 일은 아니고, 다 그런다.
하지만 내가 아파 보니, 적어도 내 앞에서 감사하다고 할 때만큼은 진심이었겠더라고.
그거면 되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주님에게 감사하는 것도 이번엔 진심이겠지만…….’
증상 좀 좋아지고 난 후에는 까맣게 잊을 거다.
그거 순 우연…… 아니었을까 할 게 뻔하다, 이 말이다.
아마 나처럼 주님도 그거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나와는 달리, 주님이 계시다면 인간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주님일 거 아니야.
그래 놓고 나 섭섭해! 너 지옥 가! 이러면 다윈도 왜 저러시나 싶을 수도 있다.
“아무튼, 상사병이라…… 조선에서도 약이 없는 병으로 통하는데.”
“허어…… 근데 조선이 어딥니까?”
“거참. 세계를 돌아보고 왔다는 놈이 조선도 모르나.”
“유명…… 유명한 나라예요?”
다윈의 멍청한 말에 리스턴이 나서서 가르침을 주었다.
“무릇 조선에서는 삼강오륜이라 하여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을 핵심으로 가르치네. 잘 모르는 이들은 이 때문에 조선이 단지 군자의 나라라 여기겠지만…… 실은 실학자들이 어마어마한 세를 불리고 있지. 특히 의학에 대해서는 여기 있는 병신만 봐도 알겠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야.”
약간 왜곡되어 있는 가르침이긴 했지만…….
19세기에 제대로 된 지식이 어딨나.
다 지들 멋대로 인식하는 거다.
특히 영국뿐 아니라 21세기 미국에 이르기까지, 앵글로·색슨에 외국 문화에 대한 인식은 무식함을 넘어 참담할 정도 아닌가.
조선에 대해서만큼은 좀 좋은 인식을 심어 놓는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거 같진 않다.
“으음…….”
그사이 나는 편지지를 들춰 보았다.
다윈이 끼약 하고 비명을 질렀지만, 주님의 종이 하는 행사를 어찌 부끄러워하냐는 말을 듣자 조용해졌다.
리스턴이 어깨를 잡아 눌러서 그렇게 된 거 같기도 한데 좋게좋게 생각하기로 한 만큼 일단 넘어갔다.
무튼, 편지에 있는 내용을 보니 이 새끼…….
‘비혼주의자잖아?’
나는 잠시 21세기로 왔나 싶을 지경이었다.
조선도 그렇겠지만 19세기의 영국도 때 되면 무조건 결혼해서 애 낳고 사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다.
허나 이놈은 확실히 괜히 범상한 놈이 아니었는지, 결혼하면 안 되는 이유를 줄줄이 나열해 놓고 있었다.
하기야 이성적으로 보면 그게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는데 더 유리해 보일 수도 있긴 할 거다.
과연 진화론을 설파한 놈이라고나 할까.
‘그래 봐야 다윈도 한낱 인간이긴 하구나.’
호르몬의 노예라는 말이 있다.
제아무리 이성을 추구하는 사람이라 해도 핏속에 흐르는 단 몇 밀리리터에 달하는 호르몬에 의해 감정적으로 치우치게 되기에 그랬다.
물론 나이가 들어서 그러한 파도가 잦아들게 된다면 또 모르겠지만 다윈은 아직 너무 젊다.
이 밑으로 쭉 한 여인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웨지우드……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구만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