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449)
검은 머리 영국 의사-449화(449/505)
449화 다윈 [5]
웨지우드.
나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거 같다.
명문가인가?
런던 사교계에서?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언젠가 교수님 김장 도우러 갔다가 들었던 거 같다.
-야! 그거 비싼 도자기야! 깨지면 안 돼!
내 김치 담그러 간 게 아니고 교수님 댁 김치 담그러 간 건데 혼났어.
지금 살아 계시면 당장 불러다가 리스턴 시켜서 뎅강 시키고 싶은데 아쉽다.
조상님이라도 어떻게 해 볼까?
아니, 그게 아니라.
교수님은 전형적인 개룡남이었고 사모님이 진짜 부잣집이셨는데 그 집에서 쓰던 도자기 이름이 웨지우드였던 거 같다.
“자네 혹시 도자기 만드는 집안이랑 친한가?”
예전의 나였다면 이런 거 머릿속으로만 두고 있었을 거다.
일단 동양 놈이 너무 나대면 뒈질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맞는 말을 해도 그런데 만약 틀려?
그럼 줘 터지는 거다.
참고로 19세기 영국은 쩨쩨하게 주먹 가지고 놀고 그러지 않는다.
꼬챙이로 팬다.
“아……? 아직 안 가셨어요?”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가장 강한 상태다, 이 말이다.
아무 말이나 막 해도 되는데 심지어 접신 오해도 있다 보니 진짜 자유가 넘친다.
‘내게 강 같은 평화’라는 어린 시절 햄버거 사 준대서 쭐레쭐레 따라갔던 교회에서 들었던 찬송이 떠오른다.
“가시긴 했는데 말은 하시지. 원래 주님하고 대화하고 그러는 거 아닌가? 기독교인은?”
“아니…….”
“신학 대학교까지 나온 양반이 뭐야, 이게.”
“그…….”
“아무튼, 도자기 만드는 애랑 관계가 어떻게 돼.”
거기에 더해 나는 대학병원 생활, 그중에서도 교수를 꿈꾸었던 생활을 견뎌 낸 사람인 만큼 눈치가 꽤 빠르다.
아니, 상대의 안색을 살피는 기술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펠로우 하면서 현타가 진짜 세게 온 적이 있는데…….
교수님 출근하는 얼굴도 아니고 발걸음만 보고도 ‘아, 저 사람 오늘 기분이 어떻겠구나’라는 걸 아는 나 자신을 확인했을 때다.
교수를 꿈꾸고 있는 이상 내 꿈이 그 사람에게 거의 온전히 달려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지금에 와서는 역시나 세상 모든 기술이 다 쓸모가 있긴 하구나 싶다.
“그…… 애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외할아버지가 조사이어 웨지우드십니다. 어머니가 수잔나 웨지우드시구요.”
“잉.”
그럼 엠마 웨지우드는 대체 누구야.
얘 사랑하는 거 아니야?
아.
설마.
금단의 사랑, 뭐 이런 건가?
‘외가 친척을 사랑하고 있어요…… 이거야?’
이 새끼 이거 조선이었으면 삼족을 멸할 일 아닌가?
아닌가?
무식하니까 욕도 함부로 못 하겠다.
아무튼, 사회 통념상 이건 좀 그런 거 맞는 거 같다.
<대답하라 1988> 보면 동성동본 결혼도 불법이었고, 겹사돈도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던 걸 보면 지금은 아무래도 그때보다 훨씬 보수적인 사회여야 맞잖아.
21세기에야 서양은 그냥 오랑캐 수준으로 자유롭지만 지금은 진짜 숨 막히게 딱딱하니까.
“이 이름은 누구야, 그럼.”
“아…… 엠마요.”
“그래, 엠마.”
“엠마는 제 조수이자 외사촌입니다.”
“아…….”
이야…….
이 새끼…….
스승과 제자에 근친까지?
역시 이쯤 되는 사내여야만 창조론이 지배하는 세상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는 건가?
내 친우이자 기독교 탈레반에 속하는 리스턴 또한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었다.
그나마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다.
“설마 그 여자를 좋아하나?”
그래, 잘한다, 리스턴.
제아무리 상사병엔 약도 없다고 하지만 아닌 건 아니라고 해 줘.
“네, 그런 거 같아요.”
“그런 거…… 같아? 같은 건 또 뭐야. 자네 설마 여자 만나 본 적이 없나?”
“대학 다닐 땐 너무 어렸고, 식물에만 관심이 있었거든요.”
“배 타고는? 전 세계의 미녀들을 다 만나 볼 수 있는 거 아닌……가?”
약간 핀트가 이상해지고 있지만 괜찮다.
리스턴은 늘 그렇듯 귀신처럼 본질로 돌아가긴 할 거거든.
그렇다 해도 지금은 확실히 이상한 소리 하고 있는 게 맞아서, 다윈이 째려보고 있다.
아무리 정당한 반응이라 해도 리스턴에게 저런 눈빛이라니.
역시 다윈, 넌 내가 인정한다.
넌 세계를 뒤흔들 만한 놈이다.
“저희 비글호의 공식 임무는 해도를 작성하기 위한 남아메리카의 수로 측량이었고, 저는 지질 분석을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미녀라뇨…… 다 남자들뿐이었는데.”
“아, 그렇구만. 내가 실언을 했네. 그럼 처음이로군.”
“그렇죠. 아니, 제가 그녀를 좋아하는게 맞다면 처음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런 주제에 제 마음도 모르다니.
이래서 천재와 병신은 한 끗 차이라고 하나 보다.
누가 한 말이냐고?
그냥 내가 방금 지어냈다.
아무리 봐도 난 천재가 아닌 거 같은데 요새 자꾸 병신, 병신 소리 듣다 보니까 기분이 좀 그래.
‘뭐…… 21세기 같으면 남자들끼리 있다 보면 동성애도 싹트고 했겠지만…….’
19세기 영국은 대단히 보수적인 분위기다.
이전처럼 동성애 한다고 십자가에 매달아 불태워 죽이지야 않겠지만 사회적으로는 비슷한 처지가 된다.
성기가, 즉 X된다 이 말이다.
“어떤데.”
“그…….”
“말이나 해 봐. 자, 이거 마시고.”
“아, 네.”
아무튼, 남의 연애사 듣는 건 언제나 참 즐거운 일 아니겠나.
나는 늘 상비하고 있는 술을 꺼내 다윈에게 건네면서 그를 부추겼다.
의사인 주제에 술을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간단하다.
물이 구려서 그렇다.
단군 할아버지가 터 잘못 잡아서 고생한단 말이 있긴 했지만, 한반도는 화강암 지대다 보니 전 세계에서 물이 제일 깨끗한 곳 중 하나다.
일본도 비슷한데, 상대적으로 높은 평균 수명과 연관이 있지 않나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일단 그녀가 자꾸 생각이 납니다.”
“그럴 수 있지.”
“그리고 그녀가 웃으면 나도 웃게 돼요.”
“허어.”
나와 리스턴은 못된 눈 맞춤을 교환했다.
나랑 비슷한 연배라면 기억할 만한 <마X사냥>이란 프로에서 신X엽과 성X경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지금도 내일 그녀를 보면 뭘 줄지 고민하고 있어요. 꽃을 좋아하니 꽃을 줄까…… 아니면 연구 결과를 토의할까.”
“잘 나가다 연구 결과 토의라니. 숙녀에게 그런 짐을 지우는 건 옳지 않네.”
눈 맞춤은 그리 길지 못했다.
리스턴이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해서 뭔 소리야? 하고 있으려니 리스턴이 말을 이었다.
“이보게 젊은 친구. 여자와 남자는 구조적으로 달라. 우리는 바깥일을 하고 여자는 가정을 돌보도록 만들어졌다, 이 말이야.”
나는 나도 모르게 사방을 돌아보았다.
이거 21세기였으면 진짜 돌 맞아 죽을 일이어서 그렇다.
멀리 갈것도 없이 당장 내 동기들한테 메스에 썰려 버릴 거다.
걔네 나보다 더 독하게 당직 버티고 그러는 애들이거든.
물론 리스턴은 19세기인이고, 다윈 또한 19세기인이다 보니 이 대화가 유혈을 불러오는 사태는 없었다.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엠마는 똑똑해요. 독일어도 할 줄 알고…… 5개 국어나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허어? 어찌 그럴 수 있지?”
“어찌 그러긴요. 여자도 머리가 좋으면 좋은 거죠.”
“흐음…… 뭔가 약점이…… 아니, 뭐 그건 넘어가고. 지금 그렇게 발끈하는 거 보니까 사랑하는 거 맞나 본데?”
“그런가요?”
“여기 있는 병신과 달리 나는 사랑에는 도가 튼 사람이지. 어제도 둘이나 만나고 왔다네.”
갑자기 허를 찔린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둘을 만났다는 거부터가 사랑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다는 거 아닌가 하는 말은 병신이란 소리와 함께 쑥 들어갔다.
단지 중의적인 표현을 지닌, 그러니까 욕이라서만은 아니었다.
뭔가…….
지금 이 생은 모쏠이 맞다 보니 약간 좀 그래서 그랬다.
“아, 그렇군요?”
다윈은 그런 나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하긴 리스턴은 그냥 인기 있다고 주장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인기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라 그렇다.
더럽게 무섭게 생기긴 했지만, 머리털도 좀 이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대한 풍채는 대단한 인기몰이 요소지 않겠나?
심지어 리스턴은 나이도 아직 젊은 편인 데다가 명성과 지위 또한 어마어마하다 보니 요새는 꽤 지체 있는 집안에서도 혼담이 오간다고 들었다.
실제로 와서 보면 그런 생각이 들진 않을 거 같지만 아무튼, 그럴싸해 보이는 인간이다, 이 말이다.
다윈 같은 샌님이 보기엔 더 그럴 것이고.
“그럼. 일단 너는 사랑하고 있어.”
“그렇군요. 근데 이게 집안사람이다 보니…….”
“아.”
“사귀면 결혼으로 바로 이어질 겁니다. 제 마음도 그럴 거 같아요. 네, 이제 보니 사랑이 맞긴 하군요.”
응?
같은 집안사람인데 결론이 왜 그리로 튀지?
리스턴의 주먹도 튀는 거 아닌가 했는데 의외로 조용했다.
“하긴 사촌하고 사귀면 결혼 해야지.”
아니, 조금 있다가 개소리를 시전했다.
“에……?”
“아, 자네는 낯설겠구만. 조선에서는 그러는지 몰라도 우리는 괜찮아. 막말로 아는 집안끼리 하는 게 훨씬…… 뭐라고 하나? 잘 살 거 같지 않나?”
“아니…….”
왜 근친이 금기시 되겠나.
도덕적으로 옳지 않아서?
아니다.
애초에 그걸 누가 옳다 그르다 정할 수 있겠나.
막말로 사랑은 국경도 막을 수 없다고 하는데.
다만 본능이 걸러 주긴 하는데…….
왜 그러겠나.
그러면 애들이 아프니까 그렇다.
‘아니, 근데 오늘 또 접신하면 그건 좀 이상한데.’
그렇다고 가르침을 주기엔 아까 한번 해 가지고 안 될 거 같다.
이게 만병통치약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거든.
해서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나를 설득했다고 여긴 리스턴이 말을 이었다.
“근데 왜 그렇게 결혼을 기피하는 거지? 결혼하면 좋지 않나? 자식도 낳고 말이야.”
“그게…… 이게 제가 정리한 건데요.”
“정리……? 아이고…… 자네 진짜 샌님은 샌님이구만.”
다윈은 리스턴의 말에 아까 내가 확인 했던 미완성본이 아닌 완성본 서류를 건넸다.
다시 말하면 비혼 선언문 같은 건데, 나로서는 꽤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결혼하면 :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의무감, 여행도 못 감, 독서 못 함, 포로와 같은 삶…… 그러나 자식들, 영원한 반려자, 노년의 친구, 집을 돌봐 줄 그 누구는 좋을 거 같다. 하…… 하지만 끔찍한 시간 낭비, 일만 하다가 아무것도 남는 것 없는 삶이 될 수도 있다.
결혼하지 않으면 : 완전한 자유. 친척들 방문과 더불어 모든 사소한 일에 강요당하지 않음, 걱정과 책임감, 아이들 양육 비용,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의무감의 부재.
이거 약간 21세기 비혼 선언문하고 비슷하지 않나?
모든 것을 포기히야 했던 대한민국 청년의 일원으로 살았던 바 있는 내게는 꽤 그럴싸한 이야기로 보였다.
물론 리스턴은 개소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병신인가? 자네가 이렇게 부잔데 뭔 돈을 논해. 게다가 웨지우드? 그 집안 갑부잖아.”
“아, 그렇긴 하죠. 그렇네?”
“지금 가서 고백해. 그럼 가슴 아픈 것도 나을걸.”
“오…… 감사, 감사합니다!”
다윈도 사실은 그렇다고 생각했었는지 바로 박차고 달려 나갔다.
나는 그런 다윈의 뒷모습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근데…… 가서 차이면 어째요?”
“그때는 뭐 가슴 열어야지.”
“아.”
고백으로 혼내 주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단 생각이 들어서 그랬다.
아무리 봐도 다윈…….
약간 그쪽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