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450)
검은 머리 영국 의사-450화(450/505)
450화 심장 수술 [1]
“감사합니다! 잘 됐어요!”
19세기는 원래 참 이상한 시대이긴 하다.
누가 봐도 어?
아니, 제가 제 입으로 모태 솔로라고 털어놓았던 놈이 갑자기 여친이 생겨서 들어온다고?
“역시. 남자는 용기지. 그래, 결혼도 하게 될 텐데 기분이 어떤가.”
“뭐…… 어쩔 수 없죠. 사랑하니까요. 불합리한 결정이라는 걸 알긴 하지만, 엠마는 다른 여자랑은 다릅니다.”
끝이 좋을 거 같진 않다.
우리 엠마는 남들과는 달라요.
이거 전형적인 차임 엔딩으로 향하는 멘트 아닌가.
비단 연애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저런 말은 하면 안 된다.
비근한 예로는 전쟁터에 애인 사진 보기, 가족 얘기하기, 우리 돌아가면 다 같이 사진 찍자고 제안하기 등등이 있다.
“그래, 사내라면 이래야지. 축하하네.”
“네, 감사합니다.”
“그래서, 가슴 통증은 어때?”
“네? 어?”
“자, 엠마라는 그 처자 생각해 봐. 지금도 아픈가?”
“아, 아뇨. 괜찮아…… 괜찮아졌습니다.”
물론 그건 미래의 일일 뿐이었다.
증상이 사라졌다면 나 또한 오늘만큼은 기꺼이 축하할 용의가 있다.
“역시 우리가 고쳤군.”
해서 나는 다윈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입을 털었다.
“명의지? 다른 놈들하고는 다르지?”
“그래, 우리가 괜히 유명한 게 아니야. 에든버러 의과 대학 출신들하고는 비교하지 말게. 아주 섭섭해.”
리스턴도 합세했다.
잠깐 다윈이 나간 사이에 집을 좀 돌아봤는데, 이놈 이거 보이는 것보다 더 부자란 생각이 들어서 그랬다.
단순히 일회성으로 삥을 뜯는 것보다 훨씬 거대한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후원.
그래, 후원이다.
다행히 영국은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통하는 나라기에 그렇다.
얘네가 훌륭해서는 아니고 제도적인 뒷받침이 되어 있을뿐더러 안 그러면 국민들의 반감을 아주 심하게 살 수 있어서 그렇다.
“아…… 네, 이번에 확실히 알았습니다. 역시 의학도 실증적 사고를 하는 분들이 잘하는군요.”
“그래, 우리는 우리가 관찰한 바에 따라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그에 따른 처방을 내리네. 무작정 옛 가르침을…… 음.”
그렇게 가스라이팅을 하기 위해 열심히 입을 털던 리스턴이 뭔가 좀 이상함을 느꼈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다윈은 똑똑한 사람이지 않나.
별 소용이 없었다.
“네, 확실히…… 옛 가르침을 무작정 따르는 건 과학자로서 가장 지양해야 할 일인 거 같습니다. 흐음.”
내가 여기 와서 느낀 게 하나 있는데.
어차피 일어날 큰일은 일어난다는 거다.
물론 뭐…….
내가 진짜 초인이어가지고 뭔가 대단한 일을 했다면 또 모르겠는데, 그건 아니잖아?
나는 단지 미래에서 살다 온 덕에 의료 분야에 대한 정답을 일부나마 알고 있는 범인일 뿐이다.
‘지옥의 아가리 김유진이 왔다면 또 모르겠는데…… 아니야, 그 인간도 19세기 영국은 답 없어.’
다시 생각해 보니까 범인은 아닌 거 같다.
나 정도면 꽤 대단한 사람인데도 이렇게 되는 걸 보면 뭐…….
“그렇다 해도 당장 뭘 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일단 제가 관찰한 것이 정말 전부인지도 모르겠으니까요.”
“어…… 그, 그래. 신중해서 나쁠 거 없지. 우리를 어설프게 따라 하다가 사람을 죽인 수많은 의사들이 있다는 걸 유념하게나.”
다행히 다윈은 바로 달려 나가 진화론을 발표하진 않았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긴 하다.
일단 너무 급진적인 사상은 피를 부르기에 그렇다.
마르크스주의처럼 계급 타도를 부르짖는 건 아니지만, 이것도 세계 전반에 걸쳐 합의되어 있는 믿음을 뒤집는 발언이니만큼 위험하기는 매한가지라고 본다.
“그래, 젊어서 혈기가 넘칠 텐데 좀 조심하는 것도 좋지.”
“병신 경도 젊지 않나요?”
“발음이 좋네?”
“저 외국어 빨리 배우는 편이라서요.”
“그래. 아무튼, 젊으면 조언도 못 하나?”
“아뇨, 병신 경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죠.”
병신 뒤에 경, 경 붙이는 게 약간 나 멕이는 건가 싶긴 한데 표정을 보니까 또 아닌 거 같기도 하다.
하여간, 이제 본론에 들어갈 때가 왔다.
수금 시간이다, 이 말이다.
“그나저나 다윈.”
“찰스라고 불러 주십쇼.”
“그래, 그럴까? 찰스.”
내 눈짓에 리스턴이 움직였다.
원래 부업으로 삥 뜯던 사람이라 그런가 되게 자연스러웠다.
두꺼운 팔로 어깨동무부터 거는데 저렇게 되면 ‘아, 오늘 내가 이 사람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집에 무사히 가기 어렵겠구나’ 싶어질 수밖에 없다.
만약 그 장소가 집이라면 더더욱 커다란 공포가 밀려올 거다.
그렇지 않겠나.
보통 놈도 아니고 리스턴이 상대니까.
“이번에 비글호 타고 돌아다니면서 느꼈을 거야. 과학에는 돈이 든다는 거 말일세.”
“아, 그, 그렇죠. 돈이 많이 들죠.”
“그나마 자네는 부자니까 별 어려움을 못 느꼈을 수도 있지만 그저 그런 집안 출신들은 아무래도 어렵단 말이지.”
“그, 그렇습니다. 아무래도요.”
아마 다윈은 ‘그래서 좀 살 만한 애들만 과학자를 하고 있지 않나요?’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우리 생각보다 과학이 실생활과 밀접해지고 그렇게 됨으로써 돈이 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필요한 노동자는 말 그대로 노동자이지 과학자는 아니지 않나.
바로 그 덕분에 내가 운영하는 연구소도 비교적 저가에 우수 인력들을 부릴 수 있는 거기도 하다.
하지만 리스턴과 대화하면서 합리적인 방향을 원하는 건 그리 영리한 일이 아니다.
다윈은 영리한 사람이다 보니 그저 리스턴이 원하는 답만 해 주고 있었다.
“우리를 도와 달라는 건 아냐. 우리는 부자야. 하지만…… 크흡.”
리스턴은 요새 연기에도 부쩍 관심을 두고 있다.
원래 이 시대의 부와 영예가 예술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에 그랬다.
21세기에도 부자들이 지들끼리 하는 파티에 유명 연예인 부르고 그러잖아?
이 시대는 그게 더 하다.
녹화는커녕 녹음도 안 되는 시대다 보니 예술이 말 그대로 상류층의 전유물이라서 더 그렇다.
“오직 의학 발전 하나만 보고 와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제자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만…… 그들이 나중에 훌륭한 의사가 되면 오늘처럼, 그래, 오늘 찰스 자네를 고친 것처럼 또 다른 사람들을 치료할 텐데 말이야.”
“그, 그것참 안타까운 일이네요.”
“그래서 말인데, 정기 후원을 좀 부탁해도 되겠나.”
보통 사람이라면 벌써 저런 말을 하진 않을 거 같다.
좀 그렇잖아?
애초에 대화에 돈 얘기 섞고 그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상당히 뻔뻔해야 가능한 일이다, 이 말인데…….
우리 리스턴은 철판을 깔았다.
실제로 철판처럼 면상이 단단하기도 하다.
“그, 네. 얼마나…….”
“뭐…… 그거야 자네 마음에 달렸지. 한번 적어 보게. 평.”
“아, 네. 형님.”
나는 그렇게 단단하진 않지만, 인류를 위해 뻔뻔해진 부류라고 보면 된다.
형님 말대로 우리가 돈이 없어서 이러는 게 아니지 않나.
다 후학을 위해…….
더 나아가서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이러는 거다.
그렇기에 나는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미리 작성해 둔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미리 찰스 다윈 이름도 다 적어 두었고 우리 사인도 해 놔서 다윈이 해야 할 일은 그저 숫자를 적는 일뿐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사려 깊다.
“그…….”
다윈은 일단 앞에 ‘1’을 적었다.
숫자가 낮아서 실망할 수도 있는데, 여기저기 수금하러 다녀 본 경험에 비추어 볼 땐 오히려 잘된 일이라 할 수 있다.
보통 높은 숫자 적는 놈은 자릿수가 적더라고.
우리로서도 ‘0’ 하나 더 쓰라고 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액수가 팍팍 올라가기 때문이다.
“음.”
“으음.”
하지만 앞이 ‘1’인 이상 뒤에 ‘0’ 하나 더 붙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나.
물론 사람은 압박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해도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부담스럽게 다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매달인가요? 아님 매년인가요?”
“아, 매년이지. 그게 편하잖아. 세금도 그렇고 돈 보내기도 그렇고.”
“그렇군요.”
“매달인 줄 알고 멈춘 거구만?”
“아니…… 지우려고…….”
“하하, 이미 쓴 걸 뭐 하러 지우나. 내 생각에 자네 연구에도 우리가 도움이 될 걸세.”
“네? 어떻게요?”
“모르지. 우리는 자료를 보낼 뿐이야. 근데 그 자료가 전국 아니, 전 세계에서 제일 좋을 거라는 건 보장할 수 있네.”
덕분에 우리는 얼렁뚱땅 다윈에게서 상당히 많은 돈을 매년 뜯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다 이거 기둥뿌리 뽑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웨지우드 도자기 팔아 버는 돈이 이거보단 훨씬 많을 거 같아 안심이 되었다.
그에 더해 우리도 다윈의 연구 자료를 받아 볼 수 있게 되었다.
리스턴은 이런 사특한 연구를 들여다봐서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냐고 툴툴거렸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뭐 나도 지금 당장 진화론이 의학에 직접적인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놈이 가지고 있는 이국적인 식물은 잘만 쓰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내 기억에 갈라파고스산 약초는 없었던 거 같지만, 뭐가 되었건 지금 여기서 쓰는 것보다는 낫지 안겠나.
“뭐가 되었건 성공적이었네요.”
우리는 다윈에게서 꽤 질 좋은 와인까지 얻어다가 배정받은 침실에서 마시는 중이었다.
확실히 런던이 아니라 그런가 밤하늘이 아름다웠다.
휘엉청 밝은 달이 유의미한 시야를 제공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러게나 말이야.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제 자네도 슬슬 누구 만나 보는 건 어떤가?”
“저요?”
“그래, 막말로 다윈 같은 애도 한 방에 되는데 자네도 되지 않겠어?”
“제가 객관적으로 쟤보단 나아 보이는 거 맞죠?”
“나야 자네를 오래 봤으니까…… 아무래도 객관적이진 않지.”
“아니, 이 사람이.”
다윈은 일단 삭았잖아.
안 그래도 노화가 빠른 시대에 배까지 5년을 탔으니 당연한 일이다.
해서 화를 냈더니 리스턴이 껄껄 웃었다.
“아무튼, 내 알아볼게. 자네가 아무래도 완연한 영국인은 꺼리는 거 같아서 내가 이리저리 알아보는 중이야, 안 그래도.”
“잉. 왜요?”
“혼자 살다 죽으려고?”
“그…….”
그런 생각은 안 해 봤다.
일단 죽음이라는 단어를 나랑 연관 지으려는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나라고 여기서 멀쩡하게 수십 년 더 살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
건방지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김태평이라는 명의가 없잖아.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외과 의사도 자기 배는 못 여는 법이다.
“음.”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나.”
“알겠어요.”
밤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술을 마셔서 그럴까.
나답지 않게 센티해진 탓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잔에 남아 있던 술을 비우고 잠에 들었다.
이 시대 와인이 다 그래서 다음 날은 숙취로 죽어 있다가 그 다음 날이 되어서야 런던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작해야 이틀 만에 돌아온 런던은 벌써 적응이 안 될 만큼 소란스럽고 더러웠다.
무엇보다 우리 병원 앞이 그랬다.
“제발 살려 주십쇼!”
늘 그렇듯 또 뭔 일이 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