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454)
검은 머리 영국 의사-454화(454/505)
454화 학회 [1]
학회.
학문과 연구 종사자들이 각자의 연구 성과를 공개 발표하고 과학적인 타당성을 공개하여 검토 및 논의하는 자리다.
심사, 연구 발표회, 강연회, 학회지, 학술 저널 등의 연구성과 발표의 장을 제공하는 업무와 연구자 간의 교류 등의 역할도 담당 기관이기도 하다.
어떻게 봐도 19세기랑은 좀 거리가 있어 보이는 기관인데…….
놀랍게도 이미 꽤 많은 학회가 활동하고 있다.
그중에서는 당연히 의료 학회도 있다.
“다음…… 연자로는 런던 칼리지 의과 대학의 티에피이영…… 킴 교수님이십니다. 박수로 맞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있는 걸 몰랐던 건 아니긴 했다.
그냥 안 갔던 거다.
칼 맞을까 봐.
‘설마 의사면 그래도 좀 배운 사람들인데 그러려고?’ 하면 정신 나간 거다.
이미 사람은 충분히 죽이고 있잖아?
심지어 얘네가 주로 휘두르는 칼은 리스턴식 칼로써 그 위력은 21세기 마체테와 비견될 만하다.
“안녕하십니까. 김태평입니다.”
“와아아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더 큰 칼을 휘두르면 된다.
내가 생각할 때 자신이 옳다고 믿는 명제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는 건 선비나 독립운동가 정도거든?
그 외에는 다 굽히게 되어 있다.
심지어 저 새끼들이 믿는 게 그렇게 낭만적인 것도 아닌 만큼 훨씬 쉬웠다.
-이번 학회에 드디어 그놈이 온다더군…….
-그놈? 아, 김태평?
-그래.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총이라도 쏴야지!
-잡았다, 이놈.
-뭐, 뭣?
그렇다고 내가 진짜 무력부터 사용한 건 아니긴 하다.
더 쉬운 돈부터 풀었다.
애매한 놈들 솎아 내는 데는 원래 돈이 최고잖아?
그렇게 프락치들을 심고 선 넘는 놈들은 이미 감옥으로 보냈다.
뭐 차차 풀어 줄 생각이긴 하다.
그럼 앙심 품고 더 미워하게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런 놈들도 있기야 할 텐데 대다수는 꺾일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사람의 정신은 생각보다 나약해서 몸이 아프면 금세 망가지거든.
“심장이란 장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 이런 생각도 잠시 뒤로 묻어 둬야 할 때다.
지금은 입을 털어야 하거든.
나의 이 위대한 업적을 천지사방에 알려야 하지 않겠나.
“심장은 24시간 한시도 쉬지 않고 펄떡이며 우리 몸에 있는 혈관을 따라 혈액을 돌리는 장기입니다. 혹 ‘공급’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상식입니다. 심장은 그저 돌리기만 합니다.”
근데 그것도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해부학은 그나마 제법 발전한 마당이긴 하다.
일단 내가 방부제로 포르말린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알린 후로 수많은 이들이 조금이나마 더 느긋하게 해부할 수 있게 된 것을 이유로 들 수 있다.
또 하나는 이 시기 의사들이 열정이 미쳐 버린 수준이다 보니 포르말린이 없던 시기에도 벌써 수많은 시신을 도굴하거나 심지어 생산하면서까지 해부를 한 덕? 탓? 아무튼, 이게 또 있다.
‘그에 비해 생리학은 처참한 수준이지.’
어찌 생겼는지 보는 건 그냥 째고 보면 된다.
물론 사람은 블록 장난감이 아니기 때문에, 무작정 째다 보면 ‘이게 어디 있더라?’ 싶은 게 아니라 ‘원래 어떻게 생겼더라?’가 될 정도로 어렵긴 한데…….
그래도 이게 뭐 하는 장기일까보다는 훨씬 쉬운 문제라고 보면 된다.
그에 비해 기능은 차원이 다르다.
‘사실 나도 이 상황에서 뼈가 피를 만든다?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하나.’
뼈?
어떻게 봐도 그냥 단단한 무언가다.
얘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이거다.
물론 그 안으로도 피가 통한다는 건 이미 알지만 왜 통하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런 상황이니만큼 심장이 피를 공급한다고 믿는 건 어찌 보면 숨 쉬듯 자연스러운 상황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내가 이런 것도 딱딱 알려 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쉽게도 그건 무리다.
뭘 하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는 배웠는데 어쩌다 알아내게 되었는지는 안 배웠거든.
“그 증거로 지금까지 피 흘리며 죽어 간 사람 모두를 걸겠습니다. 만약 피를 만들어 내는 장기가 심장이고 그 피가 딱 한 바퀴만 돌고 사라지는 것이 맞다면 어찌 피가 난다고 죽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런 거 다 쌩까고 그냥 소리 높여 외쳤다.
스스로 당당했다면 스티브 잡스식으로 외쳤겠지만, 지금 내가 하는 건 선동에 가까운 행위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미래의 어느 짝불알 콧수염이 그랬던 것처럼 손을 막 이리저리 휘두르면서, 조금 불리한 말을 할 때는 좀 웅얼거리기도 했다.
방구석에서 혼자 연습할 때는 솔직히 불안했다.
이게 되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역사가 증명했다.
이건 통한다고.
심지어 그 냉철한 독일인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유태인을 가스실에서 죽이고, 보다 많은 유태인을 죽이기 위해 서부 전선에 이어 동부 전선도 열고 수백만 아니, 수천만을 죽음으로 이끄는 전쟁을 수행했다.
“우아아아!”
“이게 맞다!”
심지어 중간중간에 내가 심어 둔 프락치들까지 있다 보니 반응은 그야말로 열광적이었다.
아직 본론에 들어간 것도 아닌데 이 정도라니, 후후.
나는 실로 악당들이나 지을만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심장은 펌프이기 때문에, 오랜 세월 칼 대는 것이 금기시되었습니다. 실제로 부검 외에 칼 대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맞죠?”
이제 조용해졌다.
맞는 말이라 그랬다.
선동이 아니다 보니 나도 아까처럼 지랄하는 대신 진중한 태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역시 사람은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진실을 말하니까 얼마나 편하냐.
몸만 아니라 마음도 편하다.
“저조차 그랬습니다. 펄떡대는 심장에 칼을 대는 건 미친 짓이니까요.”
여기저기서 그렇지, 암, 하면서 고개 끄덕이는 것이 보인다.
맞다, 미친 짓.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수많은 것들이 21세기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할 정도니 말 다 한 셈이다.
흉부외과, 그중에서도 심장 분과 전문의들이 경원시되는 이유가 있다.
“하지만 의사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을 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전생에는 진짜…….
감히 범접하지 못할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백날천날 끔찍한 환자들만 보는 외상외과임에도 그랬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어깨를 나란히 한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의사였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데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을 내가 내 입으로 할 줄은 몰랐다.
멋진 말이긴 한데 현실적인 말은 아니거든.
실제 의료 현장에서 뭐라도 하다가 잘못되잖아?
그럼 소송을 당한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죽도록 억울하다.
사람 살리려다가 그렇게 된 거니까.
그땐 나도 엄청 욕했다.
너무 좀 악해 보이잖아?
‘근데…… 19세기에 와 보니까 맥락이 이해가 된다, 이거지.’
사람 살리겠다는 마음.
이건 분명 선의다.
하지만 우린 이런 말도 있다는 걸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야생의 치료사들도, 정규 의과 대학을 나온 도살자들도 다들 사람 살리겠다는 마음만은 진짜일 거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을 살리는 대신 죽이고 있다.
그렇다면 21세기 의사들은 모든 면에서 떳떳한가?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 공부를 하고 또 하다 보면 이게 정말 환자를 위한 일인지에 대한 고민이 될 때가 있다.
사실 의사로서의 자의식이 가장 강했을 땐, 내 경험을 비추어 보자면 레지던트 3년 차 때였다.
그땐 내가 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 해 보니까 좀 병신이기도 하단 생각이 들었다.
‘21세기에도 뭐든지 하게 해 주면 아마 사고가 나긴 할 거야. 그렇다고 소송으로 손발 다 묶는 건 아니겠지만…….’
이럴 때 보면 나는 오히려 19세기에 와서 더 성장한 거 같다.
다시 21세기로 보내 준다면 이전보다 훨씬 잘할 자신이 있다.
뭐, 잘하기 전에 뇌종양으로 죽겠지만.
“일주일 전 심장을 찔린 환자가 병원에 왔습니다.”
아무튼, 나는 발표를 함에 있어 시청각 자료가 얼마나 효과적인지 아는 21세기인이다.
해서 이번에도 그림을 그리게 시켰다.
윌리엄 터너에게다.
원래 엄청 비싼 양반인데 백내장도 치료해 주고 해서 그런가 싸게 해 주고 있다.
물론 현장에 그가 있었던 건 아니다.
말하자면 상상도다, 이 말인데…….
“허…….”
“피가 엄청…….”
“어이구…….”
일부러 좀 극단적으로 그리라고 했다.
피를 팍팍 그리고 상처 막 어? 크게 그리고.
사실 의학적으로만 보면 이미 죽었어야 할 그림이긴 한데 뭐 어쩌겠어.
원래 발표에서는 조금 과장도 하고 그러는 거다.
“당시 혈압은 60에 40 정도였습니다. 혈압에 대해서는 아직 더 밝혀야 할 지점이 많긴 한데…… 건강한 성인들은 대부분 120에서 80 정도로 유지 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그보다 낮다는 건 좋지 못한 소견이겠죠?”
“으음…….”
“흐음.”
내가 요새 이런저런 강연에서 물건을 팔아서 그런가 작게 ‘혈압계 팔아먹으려고 저러나?’ 하는 소리도 들린다.
억울하다.
태평탕 같은 것과는 달리 이건 진짠데.
뭐 어쩌겠나.
이게 시대의 한계인 것을.
‘나를 알아주지 않는 놈들이 손해지’라는 생각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안색이 창백하고 입술이 바짝 마르고 또 눈꺼풀의 색까지 거의 하얗게 보일 정도였습니다. 이는 대부분 심각한 출혈을 의미하죠.”
“피가 엄청 났던데……?”
“어?”
다음 그림으로 넘어갔다.
아까와는 달리 피가 하나도 묻어 있지 않은, 그러나 창백하기 이를 데 없는 환자가 누워 있었다.
아무래도 싸게 후려치다 보니 환자 외에 다른 의료진들은 거뭇하게만 그려져 있었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싶었다.
남들은 이런 거 아예 생각도 못 하는 시대니까.
“다 닦아 내고 보니 의외로 신규 출혈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안색은 점점 더 창백해져 가고 있었죠. 이건 당시 사용했던 탐침자에 대한 묘사입니다.”
다음 그림은 탐침자였다.
옆면에만 살짝 피가 묻어 있을 뿐 끝은 깨끗했다.
과연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들이 알까?
그러려면 해부학적인 구조를 통달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심장의 기능과 피의 순환에 대해서도 완벽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고도 천재여야 할 거다.
이 시대엔 아직 심낭 압전이라는 진단명 자체가 통용되고 있지 않으니까.
원래 있던 개념을 기억 속에서 불러오는 것과 없던 개념을 머릿속으로 만들어 내는 건 그냥 차원이 다른 작업이라고 보면 된다.
“으음…….”
“뭐지……?”
“출혈이 없는데, 대규모 출혈이 있는 것처럼 보여……?”
역시나 다들 그저 중얼거리고만 있을 뿐, 아무런 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나서야 할 때였다.
“심장은 심낭이라는 주머니로 둘러싸여 있죠. 설마하니…… 이 자리에 있는 분들 중에 이러한 해부학적인 구조도 모르는 분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맞죠?”
“아, 알지.”
“그럼 그럼.”
몇몇이 영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자, 이 심장에서 피가 나는데 심낭은 비교적 온전해서 그 안에 고이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럼 여기에 들어찬 압력 때문에 심장이 제대로 뛰지 못하겠죠. 그럼 순환이 되지 못할 겁니다. 출혈과는 기전이 좀 다르지만 결과는 유사하겠죠.”
다음에 이어질 말에서 대부분 버벅거릴 거라는 걸 알아서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