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459)
검은 머리 영국 의사-459화(459/505)
459화 무모한 도전 [4]
“음…….”
제임스 호프가 모아 둔 환자의 수는 대강 20명 정도 되었다.
실제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환자는 이보다 수백 배는 더 될 거라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아니, 의견이라기보다는 통계가 그렇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기 병원에 모인 환자들은 수많은 환자 중에 1%도 채 안 되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란 얘기가 되었다.
“뭐라 말을 해야지?”
“아니…… 그렇게 말하라고 해도…….”
이들 앞에서 내가 뭔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차라리 죄수들이면 편할 거 같다.
걔네는 죽을 각오는 안 되어 있으니 반발이 더 심하긴 하겠지만, 죽을 만한 놈들이기도 하잖아?
하지만 이 사람들은 아니다.
그냥 일상을 살아오던 이들이다.
심지어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다.
‘아니…… 19살 주부는 뭐냐고.’
어린 시절 류마티스열을 앓았다고 하던데 어느 순간부터 숨이 차서 일생생활도 어려웠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여기까지도 마차를 타고 간신히 왔다.
지금도 내가 만든 휠체어를 타고 있고.
여전히 리스턴이 수많은 사람들의 팔과 다리를 잘라 대고 있는데 휠체어는커녕 제대로 된 목발도 없는 시대다 보니 환자들이 고생하는 게 보여서 만든 거였다.
그때는 이렇게까지 쓰일지는 몰랐는데 역시 만들어 두면 다 언젠가는 요긴하게 쓰일 날이 있는 거 같다.
‘어째…… 어쩝니까?’
간신히 가벼운 생각을 떠올렸지만 역시나 잠시뿐이었다.
나는 이제부터 여기 모인 20명 남짓한 이들의 가슴을 열어야 한다.
당연하게도 동시에 열진 않는다.
순서대로 열어야 한다.
‘처음 환자가…… 살아날 수 있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현대 의학 시스템에서 의사에게 그토록 긴 수련 과정을 왜 요구하겠나.
6년 공부하고 1년 인턴 하고 4년 레지던트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2년간 펠로우까지 해야 최소한의 요건을 갖춘 분과 전문의로 활동할 수 있다.
심지어 실제로 ‘이 새끼 제대로 하네?’ 소리를 들으려면 분과 전문의를 딴 후로도 거즘 5, 6년은 더, 적어도 대학병원급 이상의 병원에서 자신이 전공한 분야의 환자를 봐야 한다.
내가 내과는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외과계 의사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거다.
이게 뭐 혼자 어디 산에 들어가서 면벽 수련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도제식, 즉 스승이 딱 달라붙어서 가르쳐야 한다.
의사에게 있어 제2의 스승이라는 환자도 충분히 있어야 하고.
‘스승도 없고 심지어 서포트해 줄 인원도 없어.’
아무것도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심장 수술이 대강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된다는 것 정도에 불과하니, 진짜로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다.
몇 명이나 죽어 나갈까.
가늠이 안 된다.
어쩌면 20번째 환자도 죽을 수 있을 거 같다.
“태평?”
“아, 네.”
그러나 해야만 한다.
여기 모인 이들이 원하고 있다.
어차피 죽을 거 뭐라도 해 보자는 생각과 함께 의학의 진보에 한몫하고 가자는 생각으로 죽음을 각오한 이들이다.
“그…… 김태평입니다. 외과 의사죠.”
이들에게도 구라 마스터의 면모를 보여 줄 만큼 뻔뻔하진 못하다, 아직은.
나중이라면, 지금 지키고 있는 마음이 좀 더 닳아 버린 후라면 또 모르겠지만…….
거기까진 아직 가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거의 대부분의 상황에서 선동이나 거짓이 더 유용하다고 믿지만…….’
의사가 되어 가지고 환자에게 진실만 말하는 게 맞나 싶다.
하지만 원래 역사에 남는 위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극복하기도 해야 하는 법이지 않겠나.
“후.”
머리는 이렇게 팽팽 돌아가는데 입은 바짝 말라서 일단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다른 사람에게 죽어 달라는 말은 역시나 쉽게 나오질 않는다.
내가 뭐 저기 악랄한 인간 중 하나면 또 모르겠는데…….
소문과는 달리 진짜 나는 역사에 남을 성자 중의 성자 아닌가.
“까놓고 말해서 전에 했던 심장 수술은 제대로 된 심장 수술은 아닙니다. 껍데기가 상했던 것을 재건했을 뿐이에요. 그에 비해 여러분이 받아야 할 수술은 그 수준이 아예 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판막 재건술이다.
현대 의학에서는 판막 치환술로 이름이 바뀌었다.
인공 판막이라는 신통방통한 물건이 나와서 그렇다.
그럼 되게 쉬울 거 같겠지만, 사실 그것도 어려운 수술이다.
쉬울 리가 있나?
심장 째고 안에 구조물을 걷어 낸 다음 다른 걸로 바꾸는 건데?
하지만 인공 판막이고 나발이고 없는 이 시대의 심장 수술보다는 나을 거다.
‘아…… 돌아가고 싶다.’
요새 그래도 뭔가 착착 되는 느낌이라 19세기에 만족하고 있었는데 심장 수술할 생각을 하니까 미쳐 버릴 거 같다.
사실 21세기에서는 판막에 어지간히 문제 있는 걸로는 가슴 열지도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하냐고?
심혈관 중재 시술이라는 게 있다.
카테터 넣어서 해결한다, 이 말이다.
아마 지금이 아니라 20세기 중반까지도 그런 짓을 하겠다고 하면 미쳤다고 했을 텐데, 21세기에는 그게 대세가 되었다.
진짜 미친 기술의 발전이고, 진짜 복 받은 시대라 할 수 있겠다.
“심장을 열어야 해요. 당연히 그냥 열 수는 없습니다. 그 순간 피가 팍 튈 테니까요. 막을 수도 없습니다. 심장에서의 출혈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에요.”
부러워하면 뭐 하나?
다시 돌아갈 수는 없을 게 뻔하다.
가챠 한 번 더 돌린다는 심정으로 죽어 볼 수는 있다.
그런데, 그 가챠에서 다시 한번 살아난다는 보장이 있나?
살아난다고 한들 미래로 갈까?
초등학교 수학에도 나오는 규칙 개념을 떠올려 보면 여기서 더 과거로 갈 거다.
여기도 지옥인데 거긴 어떨까?
“그래서 심장으로 들어가고 심장에서 나오는 혈관을 틀어막아야 합니다. 무한정 그럴 수는 없어요. 제가 생각할 때 제한 시간은 최대 5분? 좋은 건 3분 이내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이번에도 역시나 내가 지금 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19세기라는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보기로 작정했다.
평소와 달리 희망에 찬 구라를 뺐기 때문에 분위기는 처참할 정도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어려운…… 수술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무척 어렵습니다.”
“근데 3분, 5분이면…….”
“어쩔 수 없어요. 그렇게 안 하면 수술 성공해도 환자분은 죽어요. 머리에 피가 안 가니까요.”
안 죽을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죽느니만 못한 상태가 된다.
뇌가 망가지면 아무것도 못 하게 되거든.
특히 이 시대에서는 생명 유지조차 하기 어려울 거다.
“무슨 말인지…….”
“세계 제일의 의사가 하는 말이니 믿으시면 됩니다. 제가 뭐 상황이 안 좋다고 거짓말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 그렇죠.”
“아무튼, 그렇게 해야 하고…… 또 열어 봐야 알 텐데요. 지금 환자분들에게서 주로 문제가 되는 게 승모판이라는 얘기는 들으셨죠?”
나는 오늘 구해 온 심장을 집어 들었다.
모형이 아니라 진짜 심장이다.
19세기 영국에서는 어지간한 장기는 그냥 진짜를 구하는 것이 훨씬 쉬워서 그렇다.
별로 문제 될 일도 없다.
돈 주고 샀는데 뭐?
“아…… 네, 거기가.”
“이게 정상적인 모양인데…… 환자분들은 이게 협착이 됐거나 아니면 늘어져 있을 겁니다. 두 가지 형태로 망가져요.”
“으음…… 들었습니다.”
환자의 말에 나는 제임스 호프를 돌아보았다.
이 사람은 진짜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초의 심장 전문의라고 떠들어 재낄 만한 자격이 있다.
부검도 열심히 해 가지고 관련 지식이 대단해.
단순히 ‘승모판이 망가졌다’ 이 정도가 아니라 두 가지 형태로 망가진다는 것까지 알아냈으니 뭐 말 다 한 셈이다.
“그중에서 좁아진 형태는 그래도 좀 나을 겁니다. 이건 넓혀 주면 되니까요.”
물론 넓히는 것이라고 해서 쉽진 않을 거다.
그게 쉬웠으면 벌써 했겠지.
19세기 의사들만큼 실험 정신에 미친 사람들이 어딨어.
각만 보이면 바로 달려드는 게 이 사람들이다.
거기에 더해 환자들도 용감하다.
‘까짓거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라는 말을 진료실에서 실제로 들을 수 있는 게 바로 이곳 19세기 런던이다.
“문제는 넓어져서 역류하는 형태인데…… 이건 다시 꿰매거나 해야 할 텐데…… 보세요. 얇죠? 정상인 심장도 이런데, 망가진 심장은 어떻겠어요. 찢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허나 방금 내가 말한 역류되는 형태의 수술보다는 훨씬 나은 게 맞다.
내 생각에 이건…… 아마 살릴 수 있을 확률이 거의 없을 거다.
나를 비롯한 팀의 실력이 확 올라가도 그럴 거다.
이건 그냥 심장 멈출 수 있는 시대, 그리고 인공 판막이 있는 시대가 와야 생존율이 올라갈 거야.
“수술 전에 이걸 알아볼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그게 아직은 불가능합니다.”
“아…….”
“열어 봐야 안다는 얘기죠.”
“아.”
절망하는 환자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불현듯 리스턴이 ‘열어 볼까?’ 했던 것이 떠오른다.
그땐 미친놈인가 했었다.
세상에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열어 보는 놈이 어딨나? 했는데 그게 나였습니다……라는 결론이 나서 그렇다.
‘시벌…….’
대개 가챠라는 건 그리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그 대가가 돈이라고 해도 그렇다.
부끄럽지만 나도 추억 속 게임이 모바일로 리메이크되어 나왔을 때 몇십 질러 본 경험이 있는데 그만큼 만족했냐고 한다면 단연코 아니라고 하겠다.
목숨을 걸고 하는 가챠는 당연히 더 현명치 못한 방법일 거다.
그나마 내 목숨이라면 떳떳하기라도 할 텐데 그게 남의 목숨이라면…….
“교수님.”
“응?”
해서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노라니 19세 주부보단 나이가 많아 보이지만 그래 봐야 20대 초반에 불과해 보이는 사내가 나를 불렀다.
왜 그러냐는 얼굴로 돌아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너무 그러지 마시죠. 어차피 죽을 목숨이고…… 의사들도 수술을 안 해줍니다. 이렇게 선뜻 나서 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입니다.”
“무슨…….”
“그렇지 않겠습니까? 눈앞에서 사람 죽는데 멀쩡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심지어 교수님은 런던 최고의 의사신데 이렇게까지 자세히 설명도 해 주시고, 수술까지 해 주신다고 해서 저희는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영광?
죽을 수술을 해 줘서 영광?
21세기에서 돌아온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뭐라 말을 이어야 할지 모르겠기에 그냥 있었다.
그랬더니 또 다른 환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런 행동만으로도 숨이 찬지 씩씩거리면서였다.
“네, 이렇게 한두 달 더 살아 봐야 뭐 하겠습니까. 교수님께서 수술을 해 주신다면…… 설령 그게 제 마지막이라 해도 감사히 가겠습니다.”
다른 환자들이라고 가만히 있진 않았다.
다들 한마디라도 보태었다.
내게 힘을 주기 위해 곧 죽을 사람들이 위로를 건네었다는 말이었다.
“아…….”
그제야 이 무식해 보이는 19세기 의학이 어떻게 단 2세기 만에 현대 의학으로 진화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장구한 의학의 역사 속에 노력했던 게 의사만은 아니었다, 이 말이었다.
오히려 환자들이야말로 목숨을 걸고 노력했다는 걸 실감했다.
역시 의사와 환자는 동료다.
질병이라는 적과 싸우는 전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