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462)
검은 머리 영국 의사-462화(462/505)
462화 마취의 진보 [3]
다그닥.
우리는 바로 마차를 타고 경찰서로 향했다.
평소와는 달리 제자들과 블런델도 다 대동하고서였다.
애초에 마취는 나보다 앨프리드가 낫기도 하거니와 어차피 기관삽관 연습할 거라면 이참에 팀 내 모든 의사들이 하는 게 나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거참. 뭐 그런 걸 가지고 우거지 죽상을 하고 있나.”
“그러게. 가만 보면 이상한 데서 유약할 때가 있단 말이지.”
“이보게, 평. 저것들은 사람이 아니야. 사람 죽인 놈들이 어찌 사람이란 말인가!”
“설령 사람이라 해도 마찬가지네. 속죄할 기회를 주님 대신 우리가 주는 거야!”
리스턴과 블런델의 말을 듣다 보니 이 좀 부러지는 건 예삿일이 맞는 거 같았다.
내가 아직도 21세기에 갇혀 있단 생각도 들었다.
이 와중에도 죄수들에게는 인권이 없나? 하는 생각이 불쑥 드는 걸 보면 나도 참 어쩔 수 없는 21세기인가 보다.
인권이라니, 참 웃기지도 않는 얘기 아닌가.
마차 밖을 내다보면 어렵지 않게 사람 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이들을 찾을 수 있는 시대다.
아무 죄 없는 사람들도 그렇게 사는데 죄수들에게 뭐? 인권?
이거 너무 말랑말랑한 사고방식인 거 같다.
‘그래, 내가 나 하나 잘살자고 하는 짓도 아니잖아.’
게다가 내가 뭐 어? 돈 벌자고 하는 거야?
오직…… 더 많은 사람 살리자고 하는 짓이다.
의산데 당연한 거 아니냐고?
그런 말할 때 안 부끄럽냐?
뉴스만 잠깐 틀어 봐도 저건 의사가 아니라 범죄자 아닌가 싶은 놈들이 천지다.
그 와중에 철저히 사명감에 기대서만 돌아가게끔 설계된 외상외과에 지원했던 나야말로 참의사…… 아니, 성인이다, 성인.
“뭘 또 그렇게 수상한 얼굴로 히죽거리고 있나.”
“다른 실험은 하지 말게. 아무리 저놈들이 죄수라 해도 지금까지 한 짓은 좀 너무했어.”
“뭔 소리예요. 내가 그럴 리가 있나.”
그런 나를 감히 19세기 의사들이 중상모략하니 어찌나 억울하겠나.
해서 발뺌했더니 리스턴이 한술 더 뜨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있냐니…… 논어에 증자의 이야기도 모르나.”
“증자……?”
“이런 무식한 종자를 봤나.”
“아니…….”
이제 조선말 배우는 걸 넘어서 아예 과거 준비라도 하는 모양이다.
논어는 몰라도 증자라니?
공자, 맹자 말고 또 자가 있었어?
“보아하니 증자가 누군지도 모르는 모양이네. 공자님의 제자일세.”
“아…… 제자…… 제자 많겠지. 근데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그분이 남긴 말에 이러한 것이 있네. 나는 매일 나 자신을 세 번 살핀다. 다른 사람을 위한 일을 도모하는 데 충실하지는 않았는지, 벗과 사귀는 데 신의를 잃지 않았는지, 스승에게 배운 것을 익히지 않았는지. 이를 일컬어 삼성오신이라 하네.”
“그…… 좋은 말이네. 근데……?”
“증자 같은 분도 하루를 끝마칠 때 늘 반성을 그치지 않았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막살아서야 되겠나? 특히 자네는 말이야. 죄가 많지 않나.”
“뭔…… 뭔…….”
이래서 배운 놈들이랑 얘기하다 보면 화가 나는가 보다.
아예 모르겠는 얘기로 말문을 틀어막다가 갑자기 푹 찌르니 화가 나 안 나.
갑자기 분서갱유의 주인공 진시황과 문화 대혁명의 마오쩌둥을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단 생각도 들었다.
아니, 거기까지 갈 것도 없다.
사람이란 대체로 지위가 올라갈수록 듣기 싫은 소리는 무시하게 되거든.
근데 그 사람이 신념까지 가지고 있다?
홀로코스트 가는 거다.
“그래…… 내 반성합니다.”
“그래도 군자의 도를 아직 완전히 잃지는 않았구만. 다행이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도 일단은 한발 물러서는 수밖에 별다른 수가 없었다.
동시에 리스턴에 대한 걱정도 슬금슬금 일기 시작했다.
다른 게 아니라…….
‘저 정도면 저거 나보다 조선에 대해 잘 알 거 같은데…….’
지금까지 조선 팔아먹은 거 다 알고 있을 거 같았다.
이 인간이 눈칫밥 말아먹은 사람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이래서 어른들이 눈치 빠른 꼬맹이를 싫어하는 거구나.’
아마 꼬맹이보다 리스턴을 더 싫어할 거 같다.
꼬맹이는 사탕이나 돈으로 꼬실 수도 있고 여차하면 눈앞에서 슥 치워 버릴 수도 있는데 저건 잘못하면 내가 치워질 거 아니야.
‘그렇다고 물어보기도 뭐 하고…….’
에이, 모르겠다.
내가 어쩔 수 없는 문제로 고민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오X영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거 같아.
아닐 수도 있는데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치우는 게 좋을 거 같다.
“워워.”
일단 경찰서에도 도착했잖아?
당장 할 일에 집중하는 게 내 스타일이다.
가만 보면 리스턴이 또 정에 약한 놈이라 나를 어떻게 할 거 같진 않기도 하고.
일단 머리도 심어 줬잖아.
두씨 뺏긴 관우도 화용도에서 조조 살려 줬는데 리스턴이라고 다를 거 같진 않다.
심지어 평범한, 그러니까 싸가지 없는 19세기 앵글로·색슨 영국인에서 군자의 도리를 배운 조선 양반으로 진화하고 있는 중이니 더더욱 그럴 거다.
“요새도 나쁜 놈들이 많나?”
리스턴은 경찰서가 제집 안방인 양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경찰들도 그런 리스턴을 집주인처럼 맞아 주었다.
“어이구, 교수님.”
“너무 많죠.”
“뭐 또 실험할 게 생겼습니까?”
“하하, 잔인한 거면 구경 가게 해 주십쇼.”
이따위 말을 하면서였다.
참고로 저거 다 장난 아니다.
진심이다.
흔히 뉴스에 너튜버나 연예인이 건물을 사고 하면 하는 게 뭐가 있다고 저렇게 돈을 버냐고 욕하고 하잖아?
엔터테인먼트라는 게 없는 시대에 와서 살아 보면 아마 욕이 쑥 들어갈 거다.
생각보다 남을 즐겁게 해 주는 재주라는 게 정말이지 대단한 거다.
여기 사람들 뭔가 재밌는 거 하나라도 있었으면 아마 지금보다 자살도 덜 하고 심지어 사람도 덜 죽일 거다.
인생이 팍팍하니까 그냥 좋게 넘어갈 수 있는 것도 그러지 못하는 측면이 아주 커.
“하하 얼마든지 와도 되지. 근데 잔인한지 어떤지는 모르겠는데…….”
“어떤 실험인데요?”
“일단 우리 닥터 평이 고안한 걸세.”
“에이, 그럼 엄청 잔인하겠네요! 다들 가겠습니다!”
저기서 왜 내 이름이 나오고 환호성이 이어지는지 도통 모르겠다.
내가 실험한 적이 없다고 발뺌하는 건 아니다.
했다, 분명히.
하지만 이렇게 하면 안 되다는 걸 분명히 알려 주기 위한 실험뿐이었잖아?
‘막말로…… 남의 소변 좀 먹고 하는 게 그렇게 잔인한 것도 아니고.’
프레임이 이렇게 무섭다.
한번 잔인하네 어쩌네 낙인이 찍히면 실제론 그렇지 않더라도 그냥 그렇게 생각해 버린다니까.
이건 리스턴 탓도 있다.
말을 좀 이상하게 한다니까?
“호흡을 강제로 중지시키고, 쇠로 된 관을 입안에 넣어 그 안으로 숨을 불어 넣으면 사는지 안 사는지 볼 거야.”
“어우…… 그건 좀…….”
“진짜 흉악범들에게나 해야 하겠군요.”
“아무래도 쇠로 된 관이니 집어넣는 과정에서 혀가 찢어지거나 이가 부러질 수도 있긴 하니, 잘 고르긴 해야겠지.”
“이야…….”
“진짜 같은 편이라서 다행입니다.”
저 봐.
기관삽관술 시험이라고 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굳이 저렇게 말해서…….
“닥터 평. 마침 나쁜 놈들이 있습니다요.”
“그래요?”
“너무 웃으니까 무서운데요? 하긴, 그래서 저희가 좋아하는 거긴 하지만요!”
“내가 웃었다니 대체 뭔 소리예요. 아무튼, 어딨어요?”
“지금 취조 중입니다. 물증에 심증까지 다 완벽한데…… 글쎄 이놈들이 발뺌하고 있어요.”
“그럼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 목에 쇠관을 꽂으라고요?”
나는 연구소에 딸린 대장간에 의뢰해 잔뜩 만들어 온 각양각색의 강철관을 떠올렸다.
최대한 넣기 좋게 만들려고 노력하긴 했다.
하지만 노력한다고 해서 꼭 선한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지 않나.
19세기 의사 놈들이 다 살인에 미친 놈들일 리가 없는데 병원만 가면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 나가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내가 그것보다야 낫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냥 막 사람 목에 꽂는 건 좀 그렇다.
해서 망설이고 있으려니 경관 하나가 웬 꼬맹이를 데리고 왔다.
“얘예요?”
“아, 아뇨…… 닥터 평.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뜨악한 얼굴로 물었더니 제가 부연 설명도 없이 데려온 주제에 경관도 뜨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애한테까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냐, 뭐 이런 뜻일 거다.
어이가 없었다.
조선 사람이면 또 몰라도 영국 놈이 뭐?
당장 니네 집 굴뚝 청소 오늘 누가 했냐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아이는 몸이 작으니 굴뚝 청소를 하기에 제격이죠.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신 거 아닐까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애를 저 좁은 곳에 들어가게 시키냐고 했더니 돌아온 말이다.
‘아…… 그것도 어떻게 개선하긴 해야 하는데…….’
그냥 고생만 하는 거면 말도 안 했다.
사실 그런지도 몰랐다, 나는.
런던에 거의 오자마자 부잣집에서 돈 걱정 없이 지내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보통 이런 일은 집주인은 모르게 진행하기 마련이다.
잉? 할 필요는 없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니까.
의심되면 네이버에 ‘청소 노동자’라고 치고 뉴스 한번 보면 의문이 해결될 거다.
‘세상에 시커먼 검댕 묻히고 낑겨 죽은 애 시신을 보게 될 줄이야.’
나는 돌연 아이에 대한 측은지심을 충전한 채, 경관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경관은 내 마음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여전히 이게 사람인가 하는 얼굴이었지만, 괜찮았다.
악역은 익숙하니까.
“그, 얘 부모가 희생자예요. 얘가 봤다는데 시치미를 뚝 뗀다니까요?”
“아…… 그래요? 정말 봤어?”
“네, 봤어요! 근데 저놈들이…….”
“허…….”
내 표정 변화를 읽어 낸 경관이 재차 말을 이었다.
“이 외에도 여러 범죄에 혐의가 있어요. 근데 이게.”
“근데…… 목격자 없어도 원래는 처넣지 않아요?”
화가 나는 것과는 별개로 의문이 일었다.
이 시대 경찰도 물론 과학 수사를 하긴 한다.
최근에 전기치료에서 영감을 얻어 전기의자도 만들었고 그걸로 취조를 하니 과학 수사 맞잖아.
범인 아닌 놈도 범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가히 신의 영역에 닿았다고 할 수 있는데…….
목격자도 있는데 그걸 못하고 있는 게 이상하잖아.
“아…… 이놈들이 뒷배가 있어요. 증거가 없이는 넣을 수가 없어요.”
“누군데요?”
“귀족 나리죠, 고리대금을 하는 놈이에요. 뭐. 애초에 얘 부모 찔러 죽인 것도 빚 독촉하다가 그렇게 된 건데…….”
“허.”
“자백이 있어야 되는데 이게.”
“맡겨 주시죠.”
이런 일이 있었다니…….
몰랐다면 또 몰라도 알게 된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마침 고문 도구 비슷한 것들과 약보다는 독에 가까운 약품이 내 손에 들려 있는 게 우연일까?
나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의학의 진보뿐 아니라 정의의 구현을 위해서도 나를 보낸 거구만그래.’
오늘따라 런던 특유의 짙은 안개를 뚫고 한 줄기 빛이 내리쬐고 있었는데 내게는 그것이 신의 응답 아니, 허락같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