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47)
검은 머리 영국 의사-47화(47/505)
47화 수액 [3]
“닥터 제멜 환자였다고?”
“네.”
“음…… 난리 칠 것 같은데……. 가족들에게 연락은 했나?”
“아뇨, 이 환자 이름도 모릅니다.”
“아.”
대충 상황이 정리된 후, 블런델이 다가와서 물었다.
아무래도 로버트 리스턴 박사에게 자기 없는 동안 우리를 부탁받은 탓인지, 아니면 그간 내가 보여 준 능력에 감명을 받은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열심히 챙겼다.
“일단 그럼 내 앞으로 입원시키지. 어차피 모를 거야.”
“네.”
전산이 있길 하나, 뭐가 정리되어 있길 하나.
그냥 서류로 관리하는데 그마저도 체계가 없다 보니 엉망진창이었다.
매달 돈 안 내고 도망가는 환자가 열 명도 넘는다고 하지 않나.
그런데도 잡을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그러니 제멜이 드나들지 않는 병실에 환자를 입원시켜 두면, 딱히 입단속도 필요치 않을 터였다.
“문제는…… 이 환자가 또 죽을 가능성이 아무래도 높다는 건데.”
블런델은 여전히 창백한 환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까 관에서 꺼낼 때와 비교하면 혈색이 나아지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조혈 작용이 활발해졌다고 해도…… 흘린 피가 많지 않나.
그 피 자체를 보충한 게 아니다 보니, 환자의 상태는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맥박도 빠르고…… 확실히 블런델 말대로야. 근데 어떻게 이렇게 잘 알지?’
나는 그저 내려다보는 대신, 환자의 손목을 짚고 있었다.
아까는 너무 맥이 약해서 손목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더니, 지금은 맥박을 측정할 정도는 되었다.
‘120회…… 휴식 상태에서 이 지경이면…… 여전히 혈류량은 부족하다는 건데……. 이게 시발 감염이 진행되면서 더 그렇게 되는 건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으니.’
열?
열은 먹고 죽으려 해도 없었다.
아예 체온이 정상 체온보다 좀 낮을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감염이 없다고 단정 지을 수 있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열이라는 건 결국, 우리 몸이 바이러스나 세균을 상대로 싸우기 위한 방어기제 아닌가.
그런 힘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더 줘야지.’
나는 이미 다 들어간 채, 내가 어설프게 막아 둔 중심정맥관을 바라보았다.
말이 관이지, 여전히 바늘이 들어가 있었다.
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굵어서, 옆에서 누군가 지키고 있어야만 했다.
아무리 환자가 의식을 되찾는다고 해도 온전치는 않을 텐데 그때 저걸 함부로 휘저었다간, 죽자고 살려놨는데 저거 때문에 죽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미리 끓이고 증류까지 한 물을 집어 들고 있으려니 블런델이 날 불렀다.
왜 그러나 하고 돌아보니 블런델이 수액을 보고 있었다.
너무 허접해서 이걸 수액이라고 해도 되나 싶은 수준이긴 했지만…… 하여간, 보고 있었다.
“그거 말일세.”
“아, 네.”
“혹시 피 대신 넣을 생각을 한 건가?”
그러곤 내 기준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질문을, 그러나 19세기임을 감안하면 꽤 진보된 질문을 던졌다.
“어…… 네.”
하릴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려니, 블런델은 감동했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래, 그런 방법이…… 허. 이게 그럼…… 음. 근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닌가? 피가 돌아야 하는 혈관에 물이 같이 도는 것이지 않나.”
그리고는 질문을 이어 나가는데, 아무래도 이 문제에 대해 꽤 오랜 시간 고민을 해 온 것 같았다.
뭔가 아는 눈치?
안다고 하기는 좀 그런데.
그래, 쉽게 나오지 못할 질문이었다.
“음…… 글쎄요. 당장 피를 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일단 물이라도 줘 봤습니다.”
“자네가 별 생각이 없이 했을 것 같진 않은데. 뭔가 이유가 있는 거 아닌가?”
블런델은 진중한 얼굴이었다.
나도 그랬다.
이유는 달랐다.
나는 이제 깔때기를 놓고, 환자의 중심정맥관 안으로 물을 붓고 있었다.
너무 빠르면 안 된다.
빠를 이유도 없었다.
한고비는 넘겼으니까.
“이유라면…… 일단 제 생각에는 말입니다.”
그 와중에 옆에 블런델이 있다는 건, 어찌 보면 다행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별 보람이 없는 일이 될 공산이 큰데, 외과 의사가 되어 가지고 물 붓는 일이 내게 기분 좋은 일이겠나?
그것도 힘들게 물 붓는 과정 전체를 느리게 조절하면서, 심지어 내가 다 해야 하는데?
필시 지루하고도 고통스러운 시간이 될 게 뻔했는데 블런델과의 대화 덕분에 그러한 짐이 좀 덜어지는 느낌이었다.
“피도 결국, 액체지 않습니까?”
“그렇지.”
“물도 액체고요.”
“그렇지.”
“둘이 섞이면, 희석된 피일지언정 피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세상에는 물과 기름처럼 좀처럼 섞이지 않는 액체도 있지 않나.”
“아.”
말을 고쳐야겠다.
반드시 덜어 주는 건 아니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닐 텐데, 방금 목에 뭔가 툭 얹히는 느낌이 일었다.
하…….
물과 기름이라니.
그럼 피가 기름…… 아니, 또 어떻게 생각해 보면 기름이 있긴 했다.
고지혈증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나.
“피가 흘러나오면 물로 씻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때 봤죠. 둘이 확 섞이는 걸.”
“아하. 그게 근거였구만그래. 그래, 그런 생각에서 넣었다…… 모자란 피를 보충하는 대신…… 흠.”
그렇다고 이런 말을 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니, 나름 머리를 굴려서 모자란 답을 해 주었다.
그럼에도 블런델은 감탄한 얼굴 그대로였다.
조금 희석한 진리라 해도, 진리는 진리지 않겠나.
진리를 탐구해야 하는 직업인 과학자에게 21세기 지식의 편린은 신비라 해도 좋을 터였다.
“그런데 얼마나 넣었나? 물은?”
“아…….”
이번 질문도 꽤나 훌륭했다.
그냥 하는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물 얼마나 넣었냐는 거, 사실 21세기 대학 병원에서도 노상 묻는 말이지 않나.
나간 만큼 채워 줘야 한다는 것.
즉 IN & OUT의 균형을 맞춰 줘야 한다는 것.
이건 진짜 중요한 개념이었다.
“대략 2리터요. 이거까지 더 들어가면…… 3리터는 될 겁니다.”
“3리터라.”
사람의 몸에 피가 얼마나 들어 있는지 알아낸 건, 생각보다 오래되었다.
이건 쉬운 일이지 않나?
당장 해부 실습실에서도 노상 하는 게 피 뽑는 일이었다.
딱히 해부 때문에 뽑는 건 아니었다.
인류는 고대 시절부터 도축을 해 왔고, 피를 뽑아야 부패를 더 미룰 수 있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환자가 아무리 피를 많이 흘렸어도 3리터를 흘렸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럼 안 되는 거 아닌가?”
오.
이 인간 오늘 자꾸 나를 놀라게 하고 있었다.
나간 만큼 줘야 한다는 개념을 알다니?
아닌가?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건가?
‘아니, 아냐…….’
난 조지프와 앨프리드를 떠올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시신을 발굴해 오느라 정신이 없었다지만, 이런 질문은 절대 안 했잖아.
당장 지금도 자리에 없었다.
피곤하다고 집에 가 버렸다.
새끼들…….
딱 봐도 30대 후반인 블런델은 응? 졸린 눈을 비비며 자리 지키고 있잖아.
“음…… 근데 농도가 희석되었으니, 어쩔 수 없지 않을까요?”
“더 희석을 시키면 안 좋아지는 거 아닌가?”
“하지만…… 음. 이건 순전히 제 생각인데요.”
그런 블런델이 기특하다고 하면 너무 좀 건방진 건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말을 이었다.
이런 친구는 더 알 자격이 있었다.
‘심지어 블런델 이 양반은 산부인과잖아?’
산모들이 그냥 감염으로만 죽어 나가겠나.
그럴 리가 없었다.
인간은 머리가 큰 동물이다 보니, 애초부터 다른 동물에 비해 모성 사망률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애가 안 돌았다면, 그럼 진짜 거의 사망이었다.
그걸 해결해 준 게 제왕절개인데, 아직 그 수술은 보편화되지 못했다.
마취가 이제 가능해졌는데 벌써 되겠나.
‘피나서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
생각해 보니까 블런델이 이 문제에 대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온 건 우연이 아니었다.
산부인과 의사는 기대를 막론하고 막대한 출혈에 노출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태반은 핏덩이 아닌가.
전치태반이니 뭐니 하는 문제로도 대량 출혈이 발생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수혈이 있거나 한 것도 아니고, 중상자가 반드시 병원으로 오는 것도 아니니, 어쩌면 병원에서 출혈 때문에 죽는 환자를 제일 많이 본 사람은 블런델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까 환자 저희가 발견했을 때 말입니다. 그때는 환자 맥이 잡히질 않았습니다.”
“맥? 아, 이거 말인가? 이게 뭐?”
“이 맥이란 게 결국…… 뭘까요?”
“음.”
혈압의 개념을 지금 다 가르쳐 줄 생각은 아니었다.
그건 가능한 일도 아닐뿐더러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냥 무언가, 실마리만 던져 줄 참이었다.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래, 어떤 생각을 했지?”
“혈관을 통해 피가 움직일 때, 피가 혈관벽을 쿵쿵 치는 거 아니겠습니까?”
“벽을 친다고?”
“네. 동맥에서만 뛰는데, 해부실에서의 동맥을 생각해 보십시오. 벽이 더 두껍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괜히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피가 자꾸 치니까 그런 거 아닐까요?”
물론 설명 중간중간 내 불타는 신앙심을 입증하기 위해 애썼다.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블런델은 내 말을 잘 듣고 있었다.
“으음…… 친다…… 그래. 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그게 잘 안 느껴진다는 건…… 피가 그만큼 부족한 거라고도 볼 수 있겠죠?”
“그렇지.”
“근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느껴지죠.”
“으음. 보충을 해 줬으니까. 근데, 그래도 약…… 아. 그럼 더 줘도 된다는 건가? 이상한데? 이게 왜 이렇게 되지?”
블런델은 정말로 혼란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혈관의 복잡한 구조를 저 사람이 대체 어찌 알겠나.
그건 미세 해부학이 지금보다 훨씬 더 발달하고 나서야 밝혀질 일인데.
아마 머릿속으론 구리로 된 파이프에 물이 흐르고 있는 상상이나 하고 있을 터였다.
설마하니, 삼투압에 의해 우리가 흘려 준 물이 체내로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나.
블런델이 못나서가 아니라 그냥 시대의 한계였다.
이 시기의 과학은 전반적으로 지식이 미진했을뿐더러, 각기 분야에 갇혀 있어서 종합적인 발전을 이루지도 못했다.
“그건 모르겠지만…… 하여간 이 맥박이라는 게, 아프지 않은 사람만큼은 아니더라도 너무 약하진 않은 수준으로 강해져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 그렇겠네. 흐음. 자네의 말이 아주 일리가 있어. 으음. 이걸 우리 환자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흐음.”
블런델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동안 남은 물을 마저 넣고는, 바늘 위를 밀가루 반죽으로 덮었다.
멸균적 처치와는 거리가 멀지만, 이제 슬슬 혈압이 돌아오기 시작한 마당에 그냥 두었다가는 저 구멍을 통해 피가 줄줄 새어 나올 터였다.
그렇다고 뽑았다가 물을 줘야 할 때마다 또 박을 수도 없지 않나.
그건 안 될 일이었다.
“그럼 저는 밤새 이 환자나 좀 보겠습니다.”
“혼자?”
“네.”
“안 될 말이지. 나도 지켜보겠네. 뭐 생각나는 거 있으면 지금처럼 토론해 보세.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난 방금…… 지난 수년간 고민하던 것이 좀 해결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단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