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482)
검은 머리 영국 의사-482화(482/505)
482화 먼 길 가기 전에 [3]
“어디 한번 보겠습니다.”
“이게 이래도 되는 건지…….”
“의학에는 성별이 없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그에 비해 원장님 사모님은 의사가 아니었다.
19세기의 보수적인 귀부인이었다.
물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문란한 시대이긴 하다.
바람피우는 것 정도는 그냥 넘어갈 정도였다.
‘별명이 강간 대장인 명사도 있었을 정도니…….’
차트리스 대령이라고…….
돈 많이 번 후에 시골에 하인들 보내서 순진하고 이쁜 여자들 꼬셔다가 집으로 데려와서는 강간을 그렇게 했는데…….
이게 무죄 판결이 나 버렸다.
민간에서는 조롱의 뜻을 담아 강간 대장이라고 불렀지만 그게 처벌이 되겠나?
하지만 반대로 정말로 정숙한 사람들도 많았으니, 그것이 바로 우리 원장님의 사모님이었다.
“괜찮아. 진료잖아. 빨리 치료해야지. 게다가…… 이걸 통해서 우리 영국 의학의 진보가 이루어질 수도 있는 일이야.”
그렇다 보니 원장님이 직접 설득에 나섰다.
저게 부부 사이에 할 말인가 싶긴 했다.
아픈 김에 기여를 하라니…….
뺨 맞아도 할 말 없는 거 아닌가 싶은데, 의외로 저게 먹혔다.
서양에서도 아직 개인보다 전체가 훨씬 중시되는 시대라 그런 거 같다.
하긴, 따지고 보면 애초에 파시즘(전체주의)도 서양에서 확립된 거잖아?
“그래…… 제가 희생해서 그럴 수 있다면.”
“희생도 아니야. 치료가 될 거 같다고 했어. 직접 봐야 알겠지만.”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티에피영 경.”
해서 나는 다시 부인을 진찰하게 되었다.
사실 외과를 전공했다 보니 환자 가슴은 많이 진료해 본 경험이 있었다.
유방암을 보는 과가 외과거든.
심지어 재건도 외과에서 한 큐에 해 버리는 센터도 있었는데, 그게 우리 센터였다.
나야 레지던트 시절에 겪은 것이 다고 실제 분과는 외상외과 쪽이었긴 하지만…….
“흠…….”
아무리 그래도 익숙하다, 이 말이다.
아마 부인도 느꼈을 거다.
희롱하는 손짓이 아닌 무언가 진찰하는 손짓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그런가 부인도 처음엔 부끄러워하는가 싶더니 이젠 좀 편안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사이 나는 나이팅게일이 찾아낸 종양을 찾아낼 수 있었다.
부인이 가슴이 제법 큰 편이다 보니 자칫하면 놓칠 수도 있었을 텐데 용하다 싶었다.
‘확실히……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위인은 다르구만…….’
나이팅게일…….
없는 동안 병동 전체를 도맡아 꾸려야 할 텐데, 뭐라도 좀 쥐어다 주고 가야겠다 싶어졌다.
그런 거 없이도 평생 사명감 하나에 기대 살다 가신 분이지만 거기에 보답 하나 보태면 더 좋지 않겠나.
아무튼, 그렇게 찾아낸 종양은 안타깝게도 양성은 아닌 거 같았다.
“주변 조직과 들러붙어 있고…… 잘 분리가 되지 않네요. 유방암이 맞을 겁니다.”
“아.”
“이런.”
암이란 소리에 순식간에 보호자가 된 원장님이 탄식을 내뱉었다.
대체 어떻게 암을 그렇게 만져만 보고 알 수 있냐는 말은 없었다.
이미 파리에서 한번 했었으니까.
거기에 더해 원장님은 내 접신을 리스턴보다도 더 격렬하게 믿어 주시는 분이지 않나.
‘그걸 믿으면 사실 암도 주님이 치료해 주실 거라 믿으면 될 텐데…….’
약간 편의주의적인 믿음이지 않나 싶긴 하다.
하지만 믿음이란 원래부터가 합리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다.
사실 생존 하나만을 놓고 보면 사람이 다른 사람을 믿는다는 게…….
이게 그렇게 유리해 보이진 않잖아.
저 인간이 대체 어쩔 줄 알고 믿는단 말인가.
허나 사람은 그렇게 설계되어 있는 것인지 뭔지 곧잘 다른 사람을 믿곤 한다.
‘그 믿음을 이용해서 나쁜 일을 하는 놈들도 있지만 말이지.’
사기꾼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21세기 대한민국을 보면 쉽다.
어쩌면 그렇게 사기꾼들이 많은지…….
보이스 피싱에 전세 사기에 다단계에 코인에…….
하지만 그런 대한민국도 시야를 보다 넓혀 보면 뭐가 되었건 신뢰를 기반으로 세워진 사회였다.
각기 직업인들이 그 직업인에 걸맞은 일을 해줄 거란 믿음, 도로 위에 달리는 차가 갑자기 인도로 달려들지 않을 거란 믿음 등등 그런 게 없으면 사회는 굴러가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수술해야죠.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유방을 잘라 내야 된다…… 이 말인가?”
“전절제술…… 흐음. 그건 고민을 해 봐야 할 문제죠.”
마찬가지로 우리 병원도 나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굴러가지 않는다.
사람마다 내게 보이는 신뢰의 크기가 차이가 있긴 한데, 원장님은 거의 뭐 신봉자 수준이지 않은가.
그간 내 덕에 벌어들인 돈만 생각해도 당연한 일이긴 하다.
이 양반 이제 조상들이 프랑스에 버려두고 와야 했던 유산보다도 더 많은 돈을 벌었거든.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야.’
원장님은 분명 맹목적인 믿음을 보이고 있다.
아마 치료가 실패한다 해도 그 믿음을 저버리진 않을 거 같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은 절대 유방암 치료를 하지 않으려고 들 거다.
“블런델 교수님. 전에 우리가 얘기하던 거, 말씀 주시죠.”
“어, 어어.”
어쩌면 나에게는 받으려고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 한 명만 할 수 있는 수술은 결국, 아무도 하지 못하는 수술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모든 치료는 보편화되어야 하지 않겠나?
나 혼자만의 의견이 아니라…….
21세기 의학이 그런 식으로 굴러가고 있다.
심지어 수술 방식이나 치료 방식에 대한 로열티는 없다.
완전히 무료로 학회에서, 논문에서 심지어 책에서 다 공개한다.
“유방암에 대한 기술은 사실 오래되었습니다. 몇백 년도 더 되었어요. 잘 아시겠지만 말이죠.”
“그렇긴 하지. 고치지 못하는 병이라 알려져 있기도 하지.”
블런델의 말에 원장님이 어두워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치지 못하는 병이 한두 개가 아닌데 유독 유방암에 대해서 저러는 이유는, 뭔가 자르면 될 거 같은데 그게 안 되어서 그러는 거다.
원래 될 거 같은데 안 되는 게 진짜 사람 미치게 만드는 법이지 않던가.
“하지만 유방을 완전히 절제한 결과 살아남은 사람에 대한 기술은 있습니다.”
“부정확한 기술들일 뿐이네. 적어도 정식 기록에서는…… 닥터 평이 파리에서 수술한 케이스밖에 없어.”
“그렇죠. 하지만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참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작정 다 떼 볼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그거야…… 그렇겠지.”
여자 죄수들도 있긴 하다.
하지만 유방암은 당뇨처럼 흔한 질환이 아니다.
적어도 이 시대에는 상당히 드문 병이다.
뭐 내가 하다못해 초음파라도 만들어서 진단해 내면 또 모르겠는데…….
맨손으로 진단할 수 있는 영역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해서 보면 확실히 전절제술이 예후가 좋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가…….”
“하지만 그 전에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어요.”
“그게 뭐지?”
“과연 유방암이 어떤 병인가이죠.”
“아…… 하긴, 그렇구만. 음…… 그냥…… 종양 아닌가? 아닌가?”
원장님의 말에 이번에는 내가 나섰다.
애초에 아직 블런델은 악성과 양성에 대한 개념이 좀 부족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게 간단하게 딱 두 가지 종류로 양분할 수도 없는 일이거든.
어떤 양성 종양은 계속 양성으로 남기도 하지만 또 어떤 놈은 악성이 되기도 하는데, 또 종류에 따라 어떤 놈은 빨리 되고 어떤 놈은 늦게 되고 그런다.
심지어 이게 어떤 조직에서 기원했느냐에 따라서 다 다르고, 같은 조직에서 기원했음에도 종류가 여러 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같은 종류의 종양이라 해서 매번 같은 양상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 안에서 또 갈린다.
이래서 의학이 X같은 거다.
“종양이라는 말씀은 맞습니다. 원래는 없던 덩이가 우리 몸 안에 생기는 것을 총칭하는 말이 종양이죠. 그런데 어떤 종양은 사람을 죽이지 않고 그냥 얌전히 있는 데 반해 또 어떤 종양은 사람을 죽입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나는 안다.
조직학적인 차이가 있다.
암세포는 일종의 브레이크가 고장난 세포라고 보면 된다.
망가진 세포가 계속, 심지어 맹렬한 기세로 분열을 하니 숙주인 환자가 죽어 나가는 수밖에 더 있겠나.
“음…… 그건 모르겠군. 유방에 생기면 사람을 죽일 수 있나?”
아쉽지만 내가 말한 저 간단한 진리를 깨우치려면 텔로미어라는 아주 미세 단위의 연구까지 진행이 되야 한다.
그리고 그건 20세기 중엽 이후에나 밝혀진 진리이고 면역학적인 측면까지 밝혀지게 된 건 21세기의 일이다.
지금부터 200년간 과학 기술이 얼마나 빨리, 또 방대하게 발전했는지를 감안해 보면 19세기에 벌써 그런 걸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거다.
“위치는 상관없을 겁니다. 제 내시경 보셨죠? 그걸로 위암을 진단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랬지. 절반은 죽던데.”
더 죽을 거다.
암은 5년 생존율을 따져야 하는데 지금 우리는 수술 1달 만에 벌써 반이 죽었으니까.
아주 높은 확률로 그냥 뒀으면 더 살았을 환자도 있긴 할 거 같다.
아무튼.
“여러 보고를 보면 피부에도 생기고…… 그냥 온 몸에 여기저기 다 생긴다고 보면 될 거 같습니다.”
“거참…… 주님의 벌인가.”
벌이라.
페스트를 겪어 놓고도 이런다.
그때 예수 안 믿는 사람만 골라 죽었으면 모르겠는데…….
영국은 인구 절반이 죽었잖아?
거의 100%가 예수 믿는 나라인데.
‘하긴…… 21세기 대한민국에도 천벌이라는 말이 있지.’
심지어 나쁜 짓 저질러놓고도 천수를 누리고, 심지어 호의호식 하다가 가는 꼴을 수도 없이 봐 놓고도 그런 말을 한다.
사람 본성이라는 얘긴데, 19세기에 너무 과도한 것을 기대하면 안 되는 거 같다.
해서 나는 원장님의 말을 교정해 주는 대신 그냥 악성과 양성에 대한 말을 했다.
“제가 제 명성에 기대서 지난 2주간 종양 환자들을 엄청 불렀습니다. 별의별 환자들이 다 오더군요. 심지어 농양이 잡힌 환자들도 많이 와서 그건 우리 제자들이 치료를 좀 했어요.”
“아…… 뭐, 민간에서는 그 정도 이해도겠지.”
“하여간, 그렇게 관찰을 해 보니 이 암이라는 놈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 종양과 명확한 차이를 보이더군요.”
“어떤……?”
“일단 괜찮은 놈들은 다른 조직을 침범하지 않아요. 잘 구분이 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순하겠죠. 이유는 모르겠지만요.”
“아하…… 그리고?”
“암은 출혈도 잘 일어납니다. 심지어 그 와중에 썩기도 하고, 어디 한군데에만 자라는 게 아니라 다른 곳으로 마구 번집니다.”
사실 지금 내가 하는 말이 꼴랑 2주간 관찰한 결과 도출해 낸 이야기는 아니다.
그냥 원래 알고 있던 것을 읊고 있는 거다.
하지만 언제나 말은 메신저가 누군지, 또 그게 그럴싸한 근거를 지니고 있는지가 중요한 법이다.
그러한 견지에서 보면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그럴싸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확실히…… 평의 말대로입니다. 제가 봐도 그래요. 이건 그렇게 어려운 기술이 필요하지도 않아요. 누구나 구분할 수 있을 겁니다.”
블런델이 나를 거들었다.
그러자 원장님의 표정이 아까보다 밝아졌다.
이 새끼들이 파리에서 우연히 환자 고치고 했던 게 아니라는 느낌을 받아서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