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485)
검은 머리 영국 의사-485화(485/505)
485화 유방암 [3]
검사라고 해서 무슨 끔찍한 일을 벌이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이제 중세는 아니지 않나.
여전히 이전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긴 했고, 심지어 과학마저 그랬지만…….
14세기에 불과 수년 만에 수천만의 피해를 입힌 흑사병과 함께 지난 천 년 동안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종교의 힘이 허약해지지 않았나.
애초에 르네상스가 꽃피우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21세기 대한민국이 앞두고 있는 인구 감소와는 달리 인구 구조 자체는 망가지지 않은 채 벌어진 인구 감소였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도 장난이 아니었다고 했지?’
나는 사모님의 종양 주변을 갈라 나가면서 동시에 이전에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하필이면 11월 1일, 즉 만성절에 벌어진 대참사라고 했다.
모든 성인을 기리는 행사 당일 거대한 지진과 해일이 도시를 덮쳐 무려 5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일으키고, 리스본 내의 건축물 중 무려 85%를 무너뜨려 버렸다.
사람들이 대체 신은 어디 있는가를 울부짖을 만한 대사건이라 할 만하지 않나?
그 덕에 유럽에서는 볼테르, 루소, 괴테 등 당대의 철학자들이 앞다투어 ‘전지전능하면서도 한없이 선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을 다 죽인 대지진을 막지는 않은 주님’에 대한 회의감을 쏟아 내게 되었다.
그 덕분이라고 하면 좀 이상한데, 하여간, 유럽은 전반적으로 계몽주의가 판을 치게 되었다.
“자…… 피를 좀 낼 거야. 이 피가 환자분의 피와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보자고.”
“블런델 형님. 형님은 수술에만.”
“아, 알겠네. 수혈한다니까 나도 모르게.”
영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로서는 답답할 정도로 느린 속도지만 뭐가 되었건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려 한다는 건 확실했다.
그전까지는 새로운 지식이건 뭐건 간에 옛 가르침과 다르면 무조건 배척하고 심지어 이단으로 몰아 죽이려 하거나 죽였다는 걸 감안하면 대단한 일이다.
처음에야 왜 19세기인가 하고 한탄도 했지만…….
이전이었으면 이마저도 안 되는 일이다, 이 말이다.
“좋아, 너랑 너. 흠…… 누가 더 어리지?”
“제가 더 어립니다.”
“좋아, 그럼 너부터.”
“감사합니다!”
수술을 진행하다 보니 어느새 제물, 아니 피 주머니, 아니 뭐라고 해야 되나.
그래 헌혈 자원봉사자가 선정되었다.
딱 봐도 10대 초중반이나 되었을까 싶을 만큼 어린 얼굴이었다.
21세기 기준으로만 보면 세상에 이런 아동 학대도 없겠지만…….
19세기에서 10대 초중반이면 이미 훌륭한 사회의 일원이었다.
게다가 이 녀석은 유태인이다.
‘불쌍한 놈들.’
대한민국에 살면서는 아무래도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온전히 체험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물론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그 비슷한 느낌이 있었겠지만…….
아무리 그때라 해도 한반도는 한민족의 땅이라 봐야 하지 않겠나?
그에 비해 유태인들은 그들만의 땅이 없다.
영원한 이방인이다.
“후우…….”
“너무 걱정 말게. 자네들은 이제 태평 조직의 일원이야. 아무도 차별하지 못해.”
“네, 감사합니다.”
대대로 그 땅에 살아왔지만 그럼에도 이방인이다.
왜?
종교가 다르니까.
그들의 관습이 다르니까.
어찌 보면 되레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거의 2천 년 가까이 남의 땅에 살면서 자신들만의 가르침을 지키고 살다니.
심지어 그 가르침 때문에 숱한 차별과 박해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덕분에 우리는 아주 안전한 피를 확보할 수 있으니 잘된 건가?’
이들에 대한 박해를 과거형으로 쓰는 것도 이상하다.
물론 흑사병이 한창 돌 때처럼 ‘유태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하면서 막 죽이진 않는다.
하지만 공직에 오르기도 어렵고, 설령 오르더라도 출세는 거의 글러 먹었다고 봐야 한다.
자본주의가 점차 휩쓸면서 천 년 전부터 도시민으로 살아온 유태인들의 힘이 강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역으로 공격도 더 받는다.
실제로 헤이트 크라임의 희생자가 되는 유태인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정도다.
그 때문에 내게도 협조를 이렇게 필사적으로 하는 거다.
적어도 런던 내에서는 내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될 테니까.
사실 나도 소수자라 언제든 박해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이렇게 유태인과 커넥션이 생기면 나 이후에 동양인들이 유럽이나 미국에서 활동할 때 상당히 유리하게 될 거란 계산도 있다.
‘진정한 애국자 김태평…….’
정말이지 이렇게 내가 인류의 미래와 대한민국만 생각한다, 정말로.
“휴. 혈압 올라갑니다.”
이제 슬슬 수술은 끝나가는 참에 드디어 피가 연결되었다.
이 시기 수혈이라는 건 늘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 않겠나?
제대로 된 ABO식 혈액형 검사가 아예 불가능한데 안심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때문에 앨프리드는 수혈이 잘 이루어지는 데에 대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반대편, 그러니까 애 쪽에는 나이팅게일이 붙어 있었다.
혹여라도 혈압이 흔들리거나 심박동수가 너무 올라가게 되면 수혈을 중단해야 하기에 그랬다.
“자…… 여기 종양 나왔습니다. 이제 지혈하고 봉합할게요.”
“네. 얼마나 남았죠?”
“한, 20분. 얼마나 됐지?”
“이제 1시간가량 됐습니다.”
“1시간…… 괜찮나?”
내 말에 앨프리드가 잠시 환자의 상태를 살피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습니다. 눈에 띄는 부작용은 없습니다.”
나도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물은 거긴 하다.
사실 대부분의 약물 부작용은 지연성이 아니라 급성으로 나타나는 법이라 그렇다.
처음 훅 들어갈 때 괜찮았으면 대개는 괜찮다, 이 말이다.
물론 우리가 쓰는 마취제는 빈말로도 안전하다고 하긴 어려운 약이다 보니 오래 써서 좋을 건 하나도 없긴 하다.
치익.
치익.
해서 나도 달군 핀셋을 받아다가 지혈에 동참했다.
콜린이 기가 막히게 환부를 벌리고, 심지어 피가 나는 부분을 찾기 쉽도록 거즈로 툭툭 닦아 주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얘 아니라 다른 놈이 들어왔으면 나도 보조를 하거나 아니면 블런델이 그래야 했을 거다.
칙.
치이익.
연기 석션 따위는 바랄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에 수술방 안은 곧 매캐한, 기름 타는 연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이전엔 아무것도 안 보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했더랬다.
막상 해 보니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인체 공기 청정기가 있어서 그렇다.
다시 말해 우리가 다 정화하고 있다는 얘기다.
‘별로 건강에 좋진 않겠지…….’
탄 공기에는 뭐가 되었건 미세 먼지가 있을 수밖에 없다.
위안이 되는 건 런던 공기가 여기보다 나빴으면 나빴지 결코 좋지는 않을 거란 거다.
아니, 위안이 될 만한 일은 아닌가……?
“자, 실.”
하여간, 지혈은 곧 끝났다.
약간 새어 나오는 건 있긴 한데 저 정도는 저절로 마르길 바라야 할 거다.
21세기처럼 적혈구 하나까지 다 지질 생각을 했다가는 환자가 다른 이유로 안 좋아질 수도 있거든.
우리의 똘똘이 존 스노가 정리한 그간의 수술 결과에 따르면 아무리 넉넉하게 잡아도 1시간 반 이내에는 마취를 끝내는 것이 좋다.
안 그러면 우리의 소중한 마취제가 환자를 망가뜨릴 수 있다는 보고가 있다.
“네.”
“잘 보세요, 형님.”
“어, 고마워.”
다행히 나는 봉합의 달인이다.
외과라고 하면 어쩐지 험한 봉합만 할 거 같겠지만…….
우리라고 백날천날 배만 열고 다는 게 아니다.
가슴이나 목도 한다.
특히 나는 절친 중에 이비인후과 친구가 있었다 보니 녀석에게 섬세한 봉합술도 여러 개 배웠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거다.
‘일명 American suture라 하지.’
상처의 안쪽으로 해서 실을 빙빙 돌려 봉합하는 건데, 이렇게 하면 밖으로 도는 실이 최소화되어서 상처가 이뻐진다.
배는 몰라도 가슴이나 목은 이렇게 하면 좋다.
아니, 가슴에 최적화된 봉합술이라고 보면 된다.
목은 이리저리 움직임이 많은 관절 부위인 데 반해 가슴은 그냥 살덩이잖아.
장력이 전해질 일이 없다 보니 봉합이 아주 셀 필요가 없다, 이 말이다.
“허.”
“마법 같죠?”
“그렇구만. 확실히…… 근데 왜 이걸로 다 안 해 주나?”
“배는 이렇게 하면 뜯어져요.”
“아…… 그럼 죽나?”
“아마도요? 아, 근데…… 아니, 아닙니다.”
사실 제왕절개 시에도 쓰는 봉합이긴 하다.
현대 의학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는 학문이다 보니 제왕절개의 흉터에 대한 고려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세로로 째는 대신 팬티 라인에 맞춰 가로로 째는 것이 가능해진 이후로는 아메리칸 수처 또한 도입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환자의 살성이나 상태가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무조건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긴 하다.
무엇보다 가로로 째야 쓸 수 있는 거다.
세로는 안 된다.
“아니라고? 뭔가 얘기하려다 만 거 같은데?”
“아니, 아니에요.”
지금 블런델에게 괜한 가르침을 주었다가 정말이지 돌이키기 어려운 결과를 낳을 수 있단 얘기다.
아직은 불도 그렇고 기구도 그렇고 술자의 능력도 그렇고…….
제왕절개를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저 크게 열고 꺼내는 것이 최선인데, 고작 흉터 고려하겠답시고 설치다가 산모와 애 모두 죽는 건 좀 그렇다.
아직 우리의 의학은 죽고 사는 문제 이외의 것에 대한 고려를 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설익은 정도가 아니라 아직 불도 안 땐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으음…… 뭔가…….”
“아닙니다. 아무튼, 이거 할 수 있겠어요?”
“연습하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 같긴 하네.”
“그래요. 배에는 금기입니다. 딱 가슴에만 할 수 있어요.”
“어떻게 아나?”
“제가 해 봤어요.”
“아, 해 봤구만. 죄수한테?”
“네.”
“역시 자네는…….”
그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누명도 썼다.
그간 하도 이런 누명을 많이 썼더니 이제 정말이냐고 묻지도 않는다.
약간 섭섭한데…….
뭐 어쩌겠나.
원래 선지자가 가는 길은 가시밭길인 것을…….
‘나는 위버멘시…… 예수님이다…….’
마법의 주문을 되뇌었더니 멘탈이 회복되었다.
동시에 사모님도 슬슬 깨어나고 있었다.
아직 수혈은 진행 중이었고, 우리가 쓰는 수액 라인이라는 것 역시 뻣뻣한 금속이었기 때문에 움직이는 건 곤란했다.
자칫하면 혈관이 다 찢어질 수 있기 때문인데…….
“으…….”
우리 가스가 아직 후져서 보통 난동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걱정하지 않았던 건 리스턴이 있어서였다.
“으.”
건장한 성인조차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인데 노인이라 해도 무리가 아닌 사모님이 리스턴의 힘을 대체 어떻게 견딜 수 있겠나.
리스턴이 그렇게 버텨 주는 동안 앨프리드가 사모님에게 말했다.
“수술 잘 끝났어요. 움직이면 상처가 덧날 수 있으니 숨을 쉬세요. 숨 크게.”
“후…… 우우…….”
다행히 사모님은 얌전한 편이었다.
곧 숨 쉬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일단은 살았다, 이 말이다.
‘이제 슬슬 궁에도 가 봐야겠구만그래.’
아직도 챙겨야 할 사람이 남았다.
바로 왕이다.
별로 말을 들을 거 같진 않다.
이미 목적은 달성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