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486)
검은 머리 영국 의사-486화(486/505)
486화 자유 [1]
윌리엄 4세.
대영제국의 국왕은 요새 아주 기분이 좋았다.
“이제 다 이루었구만.”
그가 왕위를 물려받고 난 후 떠올렸던 가장 중요한 과업을 말 그대로 완벽하게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뭔가 대단한 것을 뜻하는 줄 알 터였다.
아편 전쟁, 아니 영청 전쟁이라든지…….
아니면 점점 더 남하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는 러시아 제국을 저지하는, 19세기식 냉전이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실제로 윌리엄 4세 치하에 벌어진 일이니 후세는 그의 업적으로 기억하기도 하겠지만, 적어도 본인은 그런 건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애초에 본인이 작전을 짜고 시행한 일이 아니다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성년이야. 그리고…… 어지간해서는 죽을 거 같지도 않아.’
윌리엄 4세는 빅토리아 공주, 곧 여왕이 될 조카를 떠올렸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여왕이니 뭐니 하는 게 허황된 상상에 불과했더랬다.
그녀가 성년이 되기 전에 윌리엄 4세가 죽어 버리면 불가피하게 섭정이 들어설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켄트 공작 부인과 콘로이 놈이 어떤 놈인가?
속이 시커먼 것들이다.
뭔 수작질을 부려서 왕위를 가로챌지 모르는 놈들이다, 이 말이다.
허나 이제 하늘이 무너져도 왕위는 빅토리아 공주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길었다. 길고 긴 오욕의 세월이었어…….’
윌리엄 4세의 현재 나이는 무려 72세다.
영국 왕의 평균 수명이 고작해야 50세 정도라는 걸 감안하면 22년을 더 살았다는 얘기다.
가장 사랑받는 왕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엘리자베스 1세도 69세 영면에 들었으니…….
지금 이대로 죽어도 역대 영국 군주 중에 장수한 걸로만 치면 6위다, 6위.
딱히 건강 관리를 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방탕하게 살았다.
왕이 될 거라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젊어서부터 술과 도박 마약 그리고 파티에 절어 살았다.
기왕 왕가에 태어났는데 왕도 못 할 거 화려하게, 불꽃처럼 살다 가자! 싶어서 그랬다.
‘티에피영 경의 공이 없다 할 수 없겠지.’
허나 형님인 조지 3세가 후사 없이 덜컥 죽어 버리는 바람에, 또 중간에 있던 형들이 미리 가 버리는 바람에 졸지에 왕이 되어 버렸다.
즉위 자체를 큰형이 죽은 나이보다 더 많은 64세에 했는데 무려 8년을 더 해 먹고 있다는 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아니, 기적이다.
그걸 일으킨 것은 역시나 온 영국을 넘어 이제 유럽 본토에까지 그 명성을 떨치고 있는 김태평이리라.
‘감사한데 너무 싫다.’
그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뭐냐.
바로 ‘안 된다’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왕에게 감히 ‘안 된다’라는 말만 해놓고 명을 이어 나갈 수 있다니.
그것만 봐도 그가 의사가 아니라 주술사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의 주술이 끊어졌던 때, 그러니까 그가 잠시 미국에 다녀올 때가 윌리엄 4세의 위기이기도 했더랬다.
건강이 확실히 좀 안 좋아졌다, 이 말이다.
‘그래도 행복했어, 그때가…….’
그가 돌아오고 나서는 이전보다 상황이 더 나빠졌다.
미친놈이…….
고문 기구로나 쓰이는 물건을 감히 궁전에 설치하더니 매일매일 그 위에 왕을 떠밀고 있다.
하인들이야 매수할 필요도 없이 왕의 편이니 김태평의 말을 듣지 않았지만 그걸 용케 알아차린 놈은 무엄하게도 자기 사람들을 여기저기 심어 두었더랬다.
아니, 심어 두지 않았다 해도 소식이 어떻게든 흘러 나가긴 했을 터였다.
사특한 놈이…….
이리저리 돈 쓰는 데 인색하지도 않을뿐더러 돈이 통하지 않으면 주술로 협박도 했기 때문이다.
“전하, 태평 경이 입궁했습니다.”
“그래? 바로 간다 전해라.”
“네, 전하.”
그 때문에 왕은 운동도 매일 해야 했을뿐더러 밥도 마음대로 못 먹었다.
특히 그렇게 좋아하던 색색깔의 디저트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었다.
왜?
그 악마 같은 김태평이 반대했으니까.
심지어 회춘 좀 해 보겠답시고 맞았던 소불알액도 놈이 막았다.
이게 다 전하를 위한 일이다, 몸에 좋은 약 치고 입에 쓰지 않은 약이 없다는 말로 현혹했지만…….
아니, 현혹은 아닌 거 같다.
맞는 말일 테니까.
하지만 사람이 태어나서 단순히 오래 살기만 하면 되는 걸까?
‘아니야…… 인생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야…….’
왕은 언젠가 리스턴이 찾아왔던 때를 떠올렸다.
생긴 거야 김태평이 아니라 역사에서도 호적수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이나 악랄하게 생긴 놈이었지만…….
아무래도 김태평보다는 말이 좀 통하는 놈이었다.
-전하,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일단 이런 말로 대화를 시작한다는 거부터가 싸가지가 있지 않은가?
왕은 흡족한 얼굴로 그의 말을 들었고, 종래에는 무릎까지 찰싹 후려쳤다.
-그래! 내 그렇지 않아도 그 훌륭한 티에피영 경이 마땅한 연애도 못 해 보고 있다는 걸 듣고 안타까워하던 참이다!
-허나 그렇게 되면…… 제법 오래 못 돌아올 텐데, 괜찮으실까요? 이제 전하의 춘추도 여간 많은 게 아닙니다.
중간에 리스턴이 자신의 의중을 못 알아듣고 이상한 소리를 하길래 어르고 달래기도 했다.
-허허. 이제 내 나이도 일흔이 넘었네. 천수를 누렸다 할 수 있지. 게다가 빅토리아 공주도 어엿한 성년인데…… 내 더 살아 무엇하겠나. 가끔씩은 하루빨리 주님의 품으로 가고 싶다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전하. 10년은 너끈하십니다.
-아니, 아닐세. 하하. 그…….
그냥 데려가라고 이 새꺄, 라는 말을 참 지난하게도 빙빙 돌려서 말해야만 했다.
이럴 때면 차라리 왕이 아니라 야인으로 살았을 때가 나았다 싶었다.
야인은 돌려 말할 필요가 없거든.
그냥 대강 뒤통수를…….
‘아니, 아니지. 왕도 아닌 야인이 리스턴의 뒤통수를 쳐……?’
그랬다간 곱게 죽긴 글렀을 거다.
아마 사지가 분해되지 않을까?
아무튼.
-그래. 티에피영 경이 앞으로 아무래도 빅토리아 공주를 모실 날이 더 길지 않겠나?
-음…….
-결혼해서 가정을 이룬 사내가 그러지 못한 사내에 비해 훨씬 안정적으로 국무에 임할 수 있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지 않나. 내가 이래 봬도 영국의 국왕일세. 후대를 생각하고 있다, 이 말이야.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계시는지는…… 이 리스턴 감복했습니다. 확실히 영국 내에서는 찾지 못할 거 같아 어려운 부탁을 드렸는데 이렇게 흔쾌히…….
-아닐세. 내게도 티에피영 경은 은인이야. 은인을 위해 이 정도는 해야지.
-감사합니다, 전하!
윌리엄 4세는 머리를 쥐어짜서 간신히 명분을 만들었다.
왕가의 일뿐만 아니라 귀족들의 일이 다들 그렇듯 한번 명분이 쌓이면 그대로 달릴 수 있는 법이지 않은가.
더군다나 이번 일은 왕이 정말로 바라 마지않는 일이다 보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본으로 가면 혹 아시안들에게 혹해 배반을 할지도 모른다는 둥, 가서 또 아편에 중독되면 어쩌냐는 둥 하는 반대 여론 따위를 수수깡처럼 꺾은 채 김태평의 일본행이 결정된 데에는 다 이러한 내막이 있었다.
* * *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는 거 같지.”
“이틀 전에도 왔네.”
“그러니까요.”
나는 언제나 그렇듯 보무도 당당하게 궁 안으로 들어가 왕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역시나 왕께서는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다.
빅토리아 공주께서 성년이 된 이후로는 내내 이러고 있다.
벌써 왕위를 물려주기라도 한 것처럼 굴고 있다는 얘기다.
이럴 때마다 불현듯 600년 조선의 DNA가 들끓어 충언을 하고 싶어지지만 간신히 참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듣기 싫은 소리만 하고 있는데 여기서 더 하면 어떻게 될까?
‘오자서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지.’
아무리 옳은 소리라 해도 듣기 싫은 소리만 하면 안 되는 법이다.
특히 상대가 왕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자칫하다가는 말 그대로 죽게 되는 수가 있다.
아니, 숱한 역사서가 그러한 죽음들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래, 내가 이렇게 현명한 사람이다.
옳은 말도 절제할 줄 아는 사나이, 그게 나다.
“어, 왔는가.”
왕께서는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왜인지는 자명했다.
내 덕에 빅토리아 공주가 성년을 넘길 때까지 무사히 살아남았으니 뭐…….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는 상태지 않겠나?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나와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일 텐데…….
‘괜찮아. 오늘 충분히 인사하고 갈 거니까.’
나는 그런 왕의 기분을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껄껄 웃으며 답했다.
“폐하, 건강해 보이시니 주치의로서 기쁩니다.”
“다 자네 덕이지, 하하.”
“이제 먼 길을 가야 하는데…… 그나마 마음이 좀 가벼워지는군요.”
“걱정은 말게나. 자네 덕에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막말로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어!”
왕도 껄껄 웃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의 마음속에 그늘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긴, 죽는 게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딨나?’
노인들이 하는 거짓말 1위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아닌가.
80살이고 90살이고 100살이고 어김이 없는 법이다.
물론 너무 고통스러운 상황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튼, 제가 떠나기 전에 마지막 진찰이군요.”
“허허, 그래. 자 보게나.”
내 말에 왕은 아무렇지도 않게 팔을 걷었다.
올 때마다 내가 혈압을 재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별 의미는 없는 짓이라고 봐도 된다.
혈압이 높다 한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리스턴은 사혈을 주장하지만…… 혈관의 탄력성 문제나 너비 문제로 생기는 고혈압을 단순히 피를 흘림으로써 해결하려고 들면 오히려 더 많은 부작용이 생길 터였다.
물론 현대 의학에서도 사혈을 하는 경우가 있긴 하다.
혈액암의 일종인 진성적혈구증가증(Polycythemia Vera)이 유일한 적응증인데, 이건 진짜 극히 드문 경우니 그냥 사혈은 안 한다고 해도 좋을 거다.
‘그걸 내가 알아서 주장할 수는 없지.’
패러다임을 바꾸려는 사람이 이전 걸 따 오는 거만큼 꼴 우스워지는 일도 없지 않겠나.
적어도 나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좋군요.”
“하하, 자네 덕이지.”
왕은 연신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마치 명절날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자에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노인이 되면 겉과 속이 달라진다더니…… 어느새 우리 왕도 일흔이 훌쩍 넘었단 생각이 들었다.
말은 더럽게 안 들었지만 그래도 정이 들어서 그런가 코끝이 시큰해진 나는 주섬주섬 준비해 온 도구들을 꺼냈다.
대개는 처음 보는 것들일 거다.
“이게…… 뭔가?”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이미 여러 차례 실제 사람들에게 사용해 본 적이 있으니까.
심지어 우리 부모님한테도 썼다.
이제 왕한테만 쓰면 유교적 교리 완성이다.
군사부일체…… 간다.
“일단 누워 보시죠. 앨프리드!”
“네!”
“아니, 잠깐! 이게 뭐냐고! 근위병은 뭐 하나! 쇳덩이가 있는데, 여기!”